성가정을 이루는 법 1.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家和萬事成이라는 옛말처럼 가정이 원만할 때 다른 일도 원만해집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추기경이었을 때 여러 차례 대담을 나누었던 독일의 언론인 페터 제발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바실 휼 추기경의 말을 빌려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역설합니다.
“가족은 삶과 사랑을 배우는 우주적 학교다. 가족이 약해지면 우리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이 하락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하는 방법과 성숙하고 원만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페터 제발트, <수도원 이야기>)
남자든 여자든 집안에서 부부간에 서로 티격태격하거나 고부간의 갈등을 안고 산다면 직장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도 가정불화가 지속되거나 부모가 이혼을 하게 되면 학교 공부는 물론 성격 형성에 적지 않은 지장을 받게 됩니다. 어렸을 적에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범죄자들 대부분은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집안이 평안할 때 바깥일은 물론 아이들의 교육도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화목한 가정이 많아질 때 사회도 안정됩니다. 한마디로 가정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힘을 얻는 보금자리요, 사람을 키워 내는 못자리며 건전한 사회의 초석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가정에 많은 관심을 갖고 그 중요성에 대해 거듭 강조해 왔습니다. 전례적으로는 성가정 축일을 정해서 가정의 성화를 추구합니다. 성가정이란 예수, 마리아, 요셉이 이룬 가정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도 그 가정을 본받아서 성가정을 이루고자 다짐하는 데에 이 축일의 의미가 이씁니다. 요즘에는 식구들이 모두 세례를 받으면 ‘성가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가족 모두 신자가 되었다.”, “이제 신자 가정이 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성가정은 우리가 목표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지 우리가 이미 이루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가정이라고 해서 모든 일이 순풍에 돛단배처럼 잘 되어 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은 보통 가정보다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이 가정은 성립부터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기 약혼녀 마리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결혼 전에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파혼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천사가 마리아의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알려 주었고, 요셉은 이 말을 믿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마태 1,18-25) 이렇게 힘들게 결혼이 성사된 후에도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칩니다.
마리아는 황제가 명한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나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예수님을 낳게 되는데, 여관방이 없어서 초라한 마구간에서 해산을 해야 했습니다.(루카 2,1-7) 또 요셉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로데 임금의 손아귀를 피해 멀리 이집트로 가서 그곳에서 얼마간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마태 2,13-15)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키우는 데에도 그야말로 속 썩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가족 전체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다가 아들을 잃고 사흘 동안 애태우며 찾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어려움과 고난이 전혀 없지 않았던 성가정은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보통 가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예수, 마리아, 요셉을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마리아, 요셉의 가정이 성가정인 이유는 그들이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신앙인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선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귀를 기울였고 그 뜻을 기꺼이 따랐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서 비록 그 전갈의 의미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하느님을 굳건히 신뢰하면서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또 성모님은 예루살렘 순례의 귀환 길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사흘 뒤에 겨우 발견하고서 “왜 우리를 애타게 했느냐?”라고 나무랍니다.
어머니의 말에 아들은 의외의 대답을 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성모님은 비록 하느님의 뜻을, 아들의 말을 다 파악할 수는 없어도 무시하거나 내치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내가 지금 이해하지는 못해도 뭔가 드러나지 않은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러셨을 것입니다. 이는 인내와 겸손의 태도입니다. 성모님은 인내와 겸손의 태도로 ‘우리 마음보다 크신’(1요한 3,20)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그런 태도로 아들을 기르신 것입니다.
요셉 역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결혼 전에 약혼녀인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서 분명 당황하였고 고민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천사의 전갈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마태 1,24) 또한 요셉은 천사의 지시대로 위험에 처한 가족을 위해서 주저하지 않고 밤길을 나서서 멀리 피신하고, 다시 천사의 지시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마태 2,13-15.19-23)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가족의 안전을 위해 온갖 어려움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이는 자비와 헌신의 태도입니다. 요셉 성인은 자비와 헌신의 태도로 가족을 돌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묵묵히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셨습니다. 성부의 뜻에 따라서 부모를 잠시 떠나 성전에 머무르셨지만, 다시 마리아와 요셉을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순종하며”(루카 2,51) 지내셨습니다. 십계명의 넷째 계명인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에 충실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충실, 부모에 대한 효도로써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가족은 삶과 사랑을 배우는 우주적 학교다. 가족이 약해지면 우리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이 하락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하는 방법과 성숙하고 원만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신앙인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선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귀를 기울였고 그 뜻을 기꺼이 따랐습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