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는 가능하지만 상속은 안된다… 공백 상태의 디지털 유산
잊힐 권리를 돈으로 사는 ‘디지털 세탁소’ 비즈니스는 나날이 정교해지고 있지만, 남겨진 가족이 고인을 기억할 최소한의 통로는 여전히 막혀 있다. 살아있는 이들의 흑역사를 지워주는 산업은 성황인 반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마지막 기록을 가족에게 전달하는 ‘디지털 상속’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십수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실제로 지난 2022년, 천안함 전사자 유족들이 아들의 미니홈피 사진첩을 돌려받기까지 무려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유족들은 싸이월드 측에 고인의 미니홈피 사진첩 접근을 요구했지만, 당시 운영사인 SK커뮤니케이션스는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제한했다. 이후 싸이월드는 2019년 서비스가 중단되었으나, 운영사가 싸이월드 제트로 변경된 뒤 다시 서비스가 재개됐다. 이 과정에서 싸이월드 제트는 이용약관을 개정해 ‘디지털 약간 보호 서비스’를 시행하여 유족이 일부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는 여전했다. 싸이월드는 이용자가 생전에 게시물 공개 범위를 직접 설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인이 비공개로 설정한 게시물은 유족들도 열람할 수 없었다. 천안함재단 관계자는 "당시 싸이월드 측에서 비공개 계정을 제외한 공개 계정은 일부 복구를 해주긴 했지만, 고인이 생전에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은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자기가 직접 올려둔 사진밖에 복원이 안 됐다"며 당시의 제도적 한계를 짚었다. 이어 "그 당시에 추모글이라든지 가족이나 지인에게 주고받은 글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끝내 안 됐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디지털 유산’ 관련 논의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명확한 법적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현행 개인정보 보호 체계는 정보 주체를 ‘살아 있는 개인’으로 전제하고 있어, 사망 이후 데이터의 처리와 권한에 대해서는 충분히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법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국가의 가이드라인이 아닌 각 플랫폼 기업의 ‘서비스 이용 약관’이다. 기업들은 고인의 프라이버시 보호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리스크를 내세워 유족의 접근을 차단하는 보수적인 약관을 고수한다. 이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업의 임의 규정이 유족의 상속권보다 우선시되는 ‘약관의 통치’ 현상을 낳고 있다. 플랫폼마다 유족에게 요구하는 서류와 허용범위가 제각각인 상황이며 이는 단순한 규정의 차이를 넘어, 고인을 추모할 유족의 권리가 기업의 정책에 따라 결정되는 불합리한 구조를 고착화하고 있다.
해외 플랫폼들은 이미 디지털 유산 관리 기능을 도입하고 있다. 구글은 ‘내 디지털 유산’ 기능을 통해 사용자가 생전에 데이터 수신자를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정 기간 계정이 비활성화될 경우, 지정된 이용자에게 일부 데이터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반면 국내 플랫폼들은 여전히 계정 삭제나 이용 제한 중심의 대응에 머물러 있다. 결국 같은 디지털 기록이라도 어떤 플랫폼을 이용했는지에 따라 유족의 접근 가능 여부가 달라지는 셈이다.
그 결과, 유족들은 고인의 사진과 메시지 등 개인적인 기록에 접근하기 어렵지만, 데이터 자체는 여전히 플랫폼과 기업에 남아 있는 모순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남겨진 데이터는 있지만, 이를 확인할 권리는 없는 상태이다.
해외에서는 디지털 유산을 상속 가능한 권리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이다. 지난 2018년 독일 연방대법원은 사망한 15세 소녀의 부모가 페이스북을 상대로 제기한 계정 접근 소송에서 부모 측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재판부는 “디지털 데이터 역시 편지나 일기처럼 상속 가능한 유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해당 판결은 디지털 계정을 단순 개인정보가 아닌 ‘상속 가능한 기록’으로 인정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으며, 이후 유럽 내 디지털 유산 논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독일이 판례를 통해 방향을 제시했다면, 미국 일부 주는 ‘디지털 자산 접근 권한법(RUFADAA)’을 통해 유족이나 법적 대리인이 사망자의 온라인 계정과 데이터를 일정 범위 내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디지털 유산 문제를 플랫폼 약관이 아닌 법과 제도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여전히 기업 재량에 의존하고 있는 국내 현실과 대비된다.
국회에서도 이러한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입법 논의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제21대 국회에서는 황보승희, 허은아 의원 등이 이태원 참사 등을 계기로 디지털 유산의 처리 근거를 신설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이어 현재 제22대 국회에서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등 갑작스러운 재난 이후 유족들이 고인의 기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들이 지속적으로 추진 중이다.
최근 발의된 법안들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정준호·신영대 의원 등이 발의한 개정안은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의 선의나 재난의 크기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유족이 고인의 디지털 정보를 확인해 사고 수습을 돕고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명시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한 유동수 의원은 이용자가 사망하거나 실종되기 전, 자신의 계정에 접근할 수 있는 대리인을 사전에 지정하도록 하여 사후 사각지대를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국회 입법조사처와 법안 발의 의원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명확하다. 고인의 디지털 인격권을 보호함과 동시에, 남겨진 이들이 고인의 기억에 접근할 권리를 조화롭게 보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