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
서랍을 뒤져 노란색 서류 봉투를 꺼낸다. 겉면에 ‘복인당(福印堂)’이라는 상표가 찍혀 있다. 봉투 속에는 도장을 담은 케이스 하나가 얌전히 들어앉아 있다. 예서체 한자로 이소영(李所映) 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 상아로 된 도장이다.
이십여 년 전 어느 날, 불현듯 내 이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항렬 돌림자인 못 연(淵) 자 앞에 어머니가 은혜 혜(惠) 자를 넣어 지어준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 시대의 이름치곤 세련되고 예쁘다고 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기껍게 사용해왔다.
언제부턴지 그 이름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여 있는 기분이랄까.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친가(親家)와 멀어진 것이 그런 감정을 더욱 부추긴 듯도 싶다. 그렇다고 호적을 바꾸기는 어려운 일.
지인에게 그런 내 속마음을 얘기하자 새 이름을 지어 도장을 파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아직은 사인보다 도장이 주로 쓰이고 있던 시절이었다. 솔깃했다. 그 지인의 소개를 받아 간 곳이 작명(作名)을 겸하고 있는 복인당이었고, 그렇게 지은 이름이 소영이다. 작명가는 ‘소영’을 영어로 하면 ‘So Young’이 되니 금상첨화라는 해석을 덧붙였다. 한글로 너무 흔한 이름이기도 하고, 젊은 기를 받고 싶은 것도 아니어서 영어식 풀이 또한 마땅치 않았으나, 지인의 소개도 있고 해서 그냥 받아왔다.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하고 서랍 속에 잠자고 있던 그 도장을 꺼내 본 것은 영화 「한 남자」를 보고 온 후였다.
「한 남자」는 일본 영화로, 원작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이다. 그 작가가 신인 시절 발표했던 소설 『일식』에서 서양 중세 역사와 고어(古語)에 대한 해박한 지식, 뛰어난 상상력, 치밀한 구성, 세밀한 묘사에 감탄을 했던 기억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티저 영상에 흥미가 끌렸다. 한 남자가 정면을 보고 있고 그 뒤편으로 그 남자의 뒷모습이 거울 혹은 액자 속에 또 하나의 뒷모습을 연출해내고 있는 영상이었다.
장르 상으로는 범죄 추리 영화에 속하지만, 감독은 사건보다는 인물의 심리 추적에 집중을 한 것 같았다. 일본 영화 특유의 기승전결 없는 밋밋한 전개가 자칫 지루한 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추리에 몰입하느라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시골 동네에서 문구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혼녀 '리에'에게 나타난 한 남자. 그림 도구를 사가곤 하던 그 남자는 스케치북에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그 여자의 아들을 그린다. 그 인연으로 여자와 같이 살게 된 남자. 그는 자기를 타지에서 료칸을 운영하고 있는 집안의 작은아들 다이스케라 한다. 남자는 벌목공으로 일하면서 딸까지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남자는 벌목 중 실족하여 나무에 깔려 죽는다.
여자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이스케가(家)의 큰형을 부르지만, 남자의 사진을 본 큰형은 자기 동생이 아니라고 한다. 여자는 이혼할 때 도움을 받았던 변호사 키도에게 남자의 정체를 밝혀줄 것을 의뢰한다.
변호사가 'X'라 명명한 그 남자의 정체는 오랜 추리 끝에 파친코에 빠져 두 사람을 살해한 전직 복싱선수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X를 따라다니던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를 닮은 자기 모습과, 몸에 새겨져 있을 아버지의 유전자를 부숴버리고 싶어서 복싱선수가 되어 스스로의 몸을 망가뜨린다. 언제 자신도 살인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그. 결국 그의 선택은 호적 중개업자를 통한 이름 바꾸기였고, 3년여 동안 리에와 함께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가정의 행복을 누리다 간 것이다.
그 이름의 본래 주인 다이스케 또한 유산 상속 과정에서 큰형과 마찰을 일으켜 혐오감에 집을 떠났고, 이름을 바꿔 숨어 지낸다. 변호사 키도 역시 재일교포 3세라는 꼬리표 때문에 장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혐한(嫌韓)의 차별대우를 받고 있어, 시시때때로 이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고 있다.
마침내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된 리에가 변호사 키도에게 묻는다
“X, 그는 3년 동안 누구의 인생을 산 것일까요?”
잠깐의 침묵, 이어 키도가 대답한다.
“자기 그대로의 모습을 산 것이겠지요.”
X에게 거짓 신원을 만들어준, 교도소에 수감 중인 호적 중개업자를 찾아간 변호사 키도가 그의 신원을 확인하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OO입니까?”
그러자 그가 되묻는다.
“내가 OO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죠?”
문득, 지나온 내 삶이 궁금해졌다. 나는 지금껏 누구로 살아온 것일까? 이혜연이란 이름? 이름 이전의 나?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도장에 새겨진 '이소영'이란 이름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이 이름을 사용했더라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변호사 키도가 바에서 옆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한다.
“저는 료칸을 운영하는 집안의 작은아들 다이스케입니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던 X. 그렇게 얻은 X의 새 삶이란 것이 사실은 마음작용이었을 뿐임을 알면서도 슬쩍 자기 이름을 지워보는 키도.
유명론(唯名論)은 옳기도, 그르기도 하다.
첫댓글 어쩌면 이름과 그 사람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은 당연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이 당연합니다.
이름은 그림자의 숙명처럼 그 사람을 따라다니며 규정짓기도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이혜연' 아닌 다른 이름은 어째 상상이 안 갑니다.
저도 이름을 바꾸고 싶을 때가 많지만 역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요. ㅎㅎ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이름이 주는 어감이 나라는 사람의 분위기에 '딱'이더라구요.
비록 '복'은 없지만...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