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팔다 / 장수영
지하철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손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선채로 시선은 천정으로 보내고 있었다. 궁금한 나머지 손수레에 담긴 것을 눈여겨보았다. 손수레에는 상처를 감싸주는 밴드가 차곡차곡 담겨져 있었다. 그 남자는 밴드를 팔기위해 지하철을 선택하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혹시 나에게 이것을 권한다면 한통쯤은 사주리라 마음먹었다.
말없이 서 있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남자가 말이 없으니 궁금해서 서 있는 남자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손에는 하얀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남자는 종이위에 까만 매직으로 굵게 쓴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부끄러운지 목소리는 점점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눈은 활자를 보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숨어버리고 싶었을 게다. 다 읽은 남자는 승객들의 반응을 살필 겨를도 없이 손수레를 끌고 성큼성큼 다음 칸으로 걸어갔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칸과 칸 사이를 건너는 그의 발이 무겁다. 나의 눈도 다음 칸을 건너가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구부정하게 굽은 어깨에서 지난한 그의 삶이 묻어난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처음이 없이는 그 다음이 없다는 것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처음이 얼마나 어려운지, 더군다나 영업에 있어서는 타고난 소질이 없으면 버텨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도 그러한 처음이 있었기에 그 남자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일 앞에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멀미가 난다. 그러면 시간을 자꾸 미루게 된다. 지금이 아니어도 오후에, 또는 내일로 자꾸만 핑계거리를 만들다가 손을 들고 만다. 들고 나가서 파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어쩌지 못해 쩔쩔 매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남편은 일찌감치 노후대책으로 원룸을 지었다. 대학가의 원룸은 2월까지는 세를 다 놓지 않으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다. 집을 지어놓기만 하면 학생들이 방을 찾아오는 줄 만 알았다. 임대 시기도 한 달 쯤 늦었었는데 건물이 한꺼번에 일곱 채가 들어섰으니 방을 한꺼번에 다 채울 수가 없었다. 방을 구하러 오는 학생들을 불러들여 세를 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나절이 되도록 서로 미루느라 아무도 문 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더럭 겁이 났다. 낮선 사람을 만나기가 이렇게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부끄러워 설명도 못하고 그저 방문만 열어 보이고 방값만 알려주고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뻘쭘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집을 지은 그해에는 방을 제대로 놓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다가 한 학기가 지나가 버렸다. 집은 번듯하게 지어놓고 빈방이 생기니 은근히 속이 상했다. 남편은 마땅히 볼 일도 없으면서 눈만 뜨면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듯 부리나케 나가버리고 하루 종일 집을 지키는 것은 내 차지가 되었다. 입이 안 떨어지는 것은 두 해가 가도록 그랬었다.
그렇게 두 해를 보내면서 임대업을 하는 직업인으로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여러 채가 모여 있는 원룸단지여서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여러 사람에서 받게 되는 거절과 좌절감에 허탈한 때도 많았다. 더 좋은 조건이면서도 경쟁력에서 밀릴 때는 눈에 핏발이 서기도 했다. 거절도 자꾸 당하다 보면 이력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제 초연해 지고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지는 단계도 지났다. 이제는 전화 통화로도 세를 놓을 수 있을 만큼 노하우도 생겼을 뿐 아니라 흥정도 걸어오면 적당히 받아 치고 즐길 줄도 안다.
지난여름 새마을금고에서 새마을중앙회 연수원을 가게 되었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평소에 마을금고를 많이 이용하는 고객이다. 그래서인지 직원들 연수에 고객들도 몇 사람이 같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틀 동안 이어지는 교육은 ‘어떻게 하면 영업을 잘 할 수 있을까.’였다. 마을금고에서 하는 업무는 금융업무뿐 아니라 보험 상품도 취급을 한다. 뿐만 아니라 사업장을 열어두고 수익사업도 할 수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문어발처럼 다양한 영업을 해야 한다.
첫날 교육시간에는 전국에서 모인 마을금고마다 팔아야 하는 보험 상품의 할당량을 정해주었다. 나는 각 마을금고마다 정해진 금액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의 놀라움과는 달리 직원들은 열심히 하면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보험을 전문으로 하는 보험영업사원도 아니고 창구에 앉아서 언제 저 상품을 다 팔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나의 기우였다. 결국은 다 해 내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영업을 잘하지 못하면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 영업의 고수는 ‘꽃집에서 꽃을 파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파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향기를 팔 수 있는지 그것이 숙제이다. 그 숙제를 스스로 풀어야 진정한 영업의 고수라 할 수 있으리라.
젊어 철없을 때 성과급을 많이 준다는 달콤함에 빠져 대 들다가 큰 코 다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러한 성과급은 영업이 그 만큼 어렵기 때문인 줄도 모르고 겁 없이 덤볐던 것이다. 영업을 알고 나니 가장 어렵고 피하고 싶은 것이 영업이었다. 그러한 내가 지금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삶을 바탕으로 진정한 영업의 길을 걸어간다.
영업은 나를 파는 일이다. 원룸 임대업을 하면서 터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마지막으로 영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여태는 늘 일의 언저리에서 발을 반쯤 걸치고 여차하면 도망갈 자세였다면 이번에는 자세부터 다르다. 아침부터 밤늦도록 직장 상사의 노하우를 배우고 있다.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에 와서 뭘 배운다고 수선이냐는 친구들의 핀잔도 못들은 척 한다.
조금 전의 그 남자는 오늘이 첫 걸음일 것이다. 부끄러워 목은 자라처럼 기어들어가고 말은 턱에 걸려 나오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선 용기가 대단하여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양 어깨에 짊어진 가족이 있을 것이며,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절박함이 그를 이 길로 몰아내었을 것이다. 오늘 하루를 잘 견딘다면, 지하철 종점에서 종점으로 오가면서 사람들과 부딪친다면 내일은 분명 달라져 있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