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에는 경계가 없다
추대식
choopr412@naver.com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미(美)에 대한 열망이 각별하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며 얼굴이나 신체 성형을 하고, 고가의 화장품이나 특별한 브랜드를 찾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해왔다. 모두 아름다워지기 위함일 것이다.
당대 절세미인 양귀비가 ‘귀한 약재 우린 물로 목욕을 즐겨한 것’이나, 클레오파트라가 ‘우유와 벌꿀을 이용한 마사지를 즐겼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듯 동서양 구분 없이 시공을 초월하여, 남녀노소가 외형적인 ‘미’에 가치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진선미’가 아니라 ‘미선진’이나 ‘미진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미’의 위치는 언제나 세 번째다. 평소의 위상과는 달리, 진(眞), 선(善), 미(美)로 굳어져 첫 번째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미’ 나름의 가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내적 결핍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 도도한 ‘진’과 ‘선’을 그냥 따라가는 구도자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누가 언제 이들 각각에 변형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일까. 아마 상술 때문 아니었을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나 인기 있는 각종 트로트 경연대회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방송 기획자들은 참관한 관중이나 일반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진선미’라는 서열을 만들어 부여했다. 이는 평소 줄을 세우는 데 익숙하고 그것을 중시하는 우리 문화적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치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 지니게 되는 중요성”이다. 그렇다면‘참 진(眞)의 가치는 있는 그대로 변함이 없다는 것, 착할 선(善)은 사물을 좋게 여기거나 착해서 좋다는 것, 아름다울 미(美)는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이다. 이렇게 각각 지닌 고유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 서열을 부여하고 이를 흥행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러면서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완전히 고착화되게 한 셈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1, 2, 3등이라는 등수를 매긴다 해도, 따지고 보면 근소한 차이 아니겠는가. 보기에 따라 ‘이현령비현령’이다. 그렇지만 결과에 따른 대우는 확실하게 다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수석, 일등에만 집중한다. 따라서 좋든 싫든 우열을 가리고, 만들어진 서열이 지배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각자 정해진 분야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의 관계가 홀로 서 있는 나목처럼 각박해지고 온정보다 삭막한 분위기가 지배적이 되었다. 이런 현상이 오래 가게 되면 결국 다수가 불행해지고 소수만이 행복을 누리게 될지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모두가 경쟁을 하거나 우열을 가리기보다 상생 화합의 장을 만들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필요에 의해 꼭 1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야까지 경쟁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특히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반도체나 고부가가치 선박 셔틀 탱크, 전기차 에이아이(AI) 산업 같은 경우는, 반드시 1등을 해야 하고 또 선두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관계에서만큼은 경쟁이나 서열 위주의 분위기를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칫하면 너무 극단을 치닫게 될 것 같아서다. 배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기울 듯, 극단은 항상 위험하다.
특히 지금 같이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는 시대에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것이 거미줄같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시기에 필요한 덕목은 무엇보다 공생하는 마음일 것이다. 식재료를 비율에 맞게 섞어 최상의 맛을 내는 비빔밥처럼, 독불장군보다는 여럿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세상이다.
다행히도 최근 여러 방송매체에서 다수의 유 ․ 무명인이 한데 어우러지도록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만큼은 우열을 가리기보다 어떻게 하면 보다 감동을 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무대는 독보적인 어느 한 사람이 분위기를 주도해 가지 않았던가. 어쩌다 여럿이 함께한다 해도 자신을 더 뽐내기 위해 애쓰고 각자 따로 노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요즘은‘진선미’는 물론 등수 외도 함께 어울리며 흥겨운 무대를 만들어 내니 더없이 보기가 좋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한 송이 한 송이 꽃이라는 말이다. 장미꽃, 들국화, 민들레, 할미꽃처럼 나름의 가치가 있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한 것 같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세상에는 경계가 없다. 사람 인(人)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 있는 모습이다. 백인백색이라고, 누구나 자기만의 매력을 갖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각자 최고의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고, 무엇에건 우열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다. 나와 너를 떠난 우리, 결과만큼 과정도 눈여겨 볼 줄 아는 그‘우리’가 있어 살맛나는 세상이다. 그저 상생만 있을 뿐이다.
새봄이다. 다시 수많은 꽃이 피어날 것이다. 아무 조건 없이 피고 지고, 보고 또 보고. 손에 손을 잡고‘두물머리’라도 다녀와야겠다.
《에세이문학, 2023 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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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문학》2023년 여름호(통권 162호) 계평
(에세이문학, 2023년 봄호(161호)를 읽고)
최 지 은
cyj8977@hanmail.net
(전략...)
《에세이문학》봄호의 신작 수필들은 총 42편이었다. 특집 형식의 수필들도 여러 편이었다. 대부분 내면 깊숙이 봉인되어 있던 타자들을 수면 위로 하나둘 끄집어 환대하는 글쓰기를 보여주었다.(중략...)
그런가 하면, 이웃을 비롯한 당대 집단적 표상에 대한 반성적 의지를 환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추대식의 <아름다운 세상에는 경계가 없다>는 1등만 잘 먹고 잘사는 극단의 세상보다 상생과 화합의 세상을 만들자는 계몽적 의지가 담겨 있다.
그렇다 보니 사람의 관계가 홀로 서 있는 나목처럼 각박해지고 온정보다도 삭막한 분위기가 지배적이 되었다. 이런 현상이 오래가게 되면 결국 다수가 불행해지고 소수만이 행복을 누리게 될지 모른다. 이제부터라고 모두가 경쟁을 하거나 우열을 가리기보다 상생 화합의 장을 만들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에세이문학》봄호, p.324).
화자는 서열이 지배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각자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한탄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결국은 다수를 불행하게 할 거라는 염려이다. 더불어 이제라도 우열보다는 상생과 화합을 장을 만들자는 요청이다.
추대식의 <아름다운 세상에는 경계가 없다>는 다수의 독자를 향한 요청이면서 권유의 글이다. 동시에 여기에는 지금껏 서열과 경쟁 위주의 사회를 만들어 온 집단적 주체에 대한 비판과 죄의식이 함께한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비판적 성찰이다. 사회가 전문화되면서 그러한 비판적 기능이 독립적으로 장르화되었지만, 박종화가 말했듯, 수필가는 “한 사람의 문인이나 시인의 여기(餘技)나 부제(副題)”가 아니다. 인간과 우주의 단면을 사색 비판함으로써 주관적인 목소리를 내는 무거운 장르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교화적이거나 훈시적인 투가 되면 그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추대식의 <아름다운 세상에는 경계가 없다>는 윤리성에 부합하지만, 감성에 호소하는 수필적 글쓰기의 미학성에 조금 더 치중하면 좋을 것 같다.
이처럼 앞의 추대식의 <아름다운 세상에는 경계가 없다>나 김윤선의 <숨은 꽃> 그리고 김덕임의 <금숙이> 등은 수필이 지극히 사적 고백의 글이라는 고정된 관념을 버리게 한다.
최지은
문학박사. 2008년《에세이문학》(수필) ․ 2017년《인간과문학》(평론) 등단. 저서로는《한국현대소설의 이론과 쟁점》(2017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창의적 글쓰기와 말하기》(공저),《인문학 글쓰기와 말하기》(공저) 등 다수의 논문과 수필집《그날 태양의 띠는 꺾여 있었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