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라!
구글의 창업자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1995년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만나게된다. 처음 만남부터 그들이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래리페이지보다 먼저 스탠포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던 세르게이 브린은 벌써 주위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세르게이 브린은 어디에가서도 눈에 띠는 외향적인 성격에 유머감각을 갖춘 전형적인 리더였다. 이에 비해서 래리 페이지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조용하지만 치밀하고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항상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세르게이 브린이 래리페이지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둘에게는 공통적인 성격이 있었으니 자신의 지식을 자랑할수 도 있고 또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는 토론을 좋아했다.
그들에게 토론은 일종의 놀이였다. 어린시절부터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집안에서는 여러가지 주제로 토론하는게 일상사였다. 그리고 둘은 몬테소리학교출신인데 이 영향의 덕분으로 사물을 암기하기 보다는 원리를 이해하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의문을 표시하고 질문하는데 익숙해진 그들은 토론의 과정에서 나누는 대화에 재미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논쟁으로 발전하기 까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토론이라는게 결국 컴퓨터 게임처럼 경쟁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지적인 놀이일뿐 이었다. 그들은 함께 토론에 참가하면서 어느덧 서로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의 대학 캠퍼스에서 함께 붙어다니는 단짝으로 유명해질정도였다.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사회,정치, 경제,문화, 과학등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논의하였다. 그들의 토론수준이 얼마나 높았던지 같은 스탠포드 대학원생들은 대화에서 소외감을 느끼기 일수였다. 그래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토론이라도 시작할쯤에는 조용히 그 방을 나오거나 음악을 헤드폰으로 들으면서 그들 대화에 끼지 않을려고 노력했다.
스탠포드 대학원에서는 학생들에게 조를 짜게해서 고유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도록 했다. 원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는 브린은 다른 프로젝트에 소속되어 있었다. 래리 페이지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웹사이트를 하나의 컴퓨터로 모두 저장하는 프로젝트였다. 원래 일주일이면 다 될줄 알았던 프로젝트였지만 1년이 넘게 진행된 무모한 일이었다. 세르게이 브린은 영화의 등급을 매기는 일이었다. 아마존의 성공요소가 책의 평점을 객관적으로 매겼기 때문이듯이 영화의 등급을 사람들의 취향과 성향을 고려해서 적당하게 점수를 매길줄 아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래리페이지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링크가 많이 된 웹사이트가 그만큼 가치가 많다는 자신의 이론이었다. 훌륭한 논문일수록 다른 논문에서 인용되는 횟수가 많다는 점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특정사이트가 다른 웹사이트로부터 링크가 되는 연결고리을 알아보기 위해서 백링크(BackLinks)를 조사하면 된다. 만약 A라는 웹페이지와 B라는 웹이지가 C라는 웹페이지로 이동시키는 링크를 걸었다면 A와 B는 C의 백링크가 된다. 전세계의 웹사이트들의 백링크들을 조사하면서 그는 기존의 검색엔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해낸다. 그전까지 검색엔진이라고 하면 검색어와 맞는 단어가 되도록 많이 포함된 인터넷 웹사이트들을 보여주는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러한 검색방법에는 심각한 맹점이 하나 있었다.
만약에 운동화를 검색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일것이다. 그런데 정작 운동화의 대명사인 나이키나 아디다스의 홈페이지에는 운동화라는 단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플레이스테이션 홈페이지에는 가정용 게임기라는 말이 적게 사용되고 코닥에는 디지털 카메라는 단어가 별로 없으며 모토롤라에는 휴대폰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검색어와 동일한 단어가 웹페이지 내에서 얼마나 빈번하게 사용됐느냐에 따라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은 결국 검색의 정확도를 높여주지 못한다. 래리 페이지는 이의 대안으로 논문에서 인용하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가치있는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새로운 검색방식을 구상한다. 이것이 바로 웹페이지에 담겨진 정보들을 과학적이고 수학으로 분석해서 검색어와의 상호 연관성과 중요도에 따라서 순위를 매겨서 결과를 보여주는 페이지 랭크의 시작이었다. 페이지 랭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중에 하나는 웹페이지가 다른 사이트에 얼마나 많이 링크되었느냐인데 이는 백링크를 조사하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웹사이트의 링크 경로를 역추적한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백럽(BakcRub)이라고 하였다. 래리페이지의 이러한 생각은 세르게이 브린의 흥미를 자극했다. 초기에는 래리 페이지가 검색엔진을 작업하면서 난관에 봉착하면 세르게이 브린이 같이 고민하면서 해결점을 찾는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덧 세르게이 브린은 래리페이지와 공동 운명체가 되어서 적극적으로 개발에 참여했다.
검색엔진의 개발이 이루어진 곳은 래리페이지의 기숙사였다. 96년도에 본격화된 프로젝트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네트워크 연결망을 통해서 검색엔진을 제공하기에 이른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들로부터 호평을 얻은 그는 외부에도 서비스를 공개한다. 외부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컴퓨터로는 감당하기가 힘들어질 정도였다. 학생신분으로 돈이 없었던 그들은 대형 컴퓨터가 그 역할을 하는 인터넷 서버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했다. 일반 개인용 컴퓨터로도 서버를 구축을 하는 대신에 효율적인 분산처리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주위에서 돌아다니는 컴퓨터에 CPU와 메인보드와 같은 핵심 부품만 있으면 인터넷 서버 구축이 가능했다. 운영체제도 무료인 리눅스를 사용했다.
그들은 검색서비스의 인기에 한층 고무되었고 좀더 친숙하면서도 의미가 있는 이름을 찾으려고 했다. 검색엔진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메신저를 통하여 새로운 이름을 고민했다. 이때 마침 동료중에 하나가 10의 100 제곱을 뜻하는 의미가 있다는 구글(Google)을 제안했다. 1에 0이 백개 붙여있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뜻하는 구글이 검색서비스의 거대하고도 방대함과 일맥상통하였고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는 구글로 이름을 결정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원래 10의 100제곱을 뜻하는 단어는 구글이 아니라 구골(GooGol)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계속해서 구글을 사용했다. 구글이라는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를 고용할 돈이 없었던 그들은 백럽의 로고를 래리페이지의 손을 스캐너로 입력해서 만들었는데 구글의 경우는 세르게이 브린이 무료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로고를 직접 디자인했다.
구글은 서비스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도메인을 사용했다. 그래서 구글서비스의 접속 주소는 http:// google.stanford.edu 였다. 하지만 하루 접속횟수가 1만건을 넘어가자 스탠포드 대학교의 회선을 이용하기가 힘들어졌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네트워크 자원을 너무 많이 잡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래리페이지의 기숙사방에서 구글서비스를 계속하는데에 한계를 느꼈다. 학교 전체의 네트워크를 마비시킬정도에 이르게 되자 그들은 서비스를 감당할 좀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제 검색엔진을 단순히 연구가 아니라 사업으로 발전시킬 생각을 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기존의 유명 포탈 사이트에 구글엔진을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좌절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도전정신
그들은 100만달러만 준다면 구글 서비스를 넘겨줄 생각이었다. 알타비스타(altavista)와 야후등을 접촉했고 실무자로부터 긍정적인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결국 상부에서는 이를 탐탁치 여기지 않았다. 계속되는 거절에 그들은 지쳐갔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감하게 학업을 중단하고 직접 회사를 창업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그들이 구글을 창업 하는 과정을 보면 역시 새로운 사업이라는 것은 결국 기존 눈으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와 충돌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드웨어 업체들의 무시를 이겨내야 했던 소프트웨어 전문 업체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게이츠도 사업 초기에는 기존 관념으로 보면 무모한 사업이었다. HP에게 애플컴퓨터를 가지고 간 스티브 잡스는 이런걸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오히려 그들의 반응에 쾌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기존의 성공방식에 매몰되어서 똑 같은 일만 반복하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HP의 냉대를 통해서 자신이 디지털 시대에 남들 보다 앞선 개척자라고 생각할정도였다. 그는 애플을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경영자라는 호칭까지 얻게 되었다. 마이클 델은 사업을 시작할 때 절대 남들에게 먼저 물어보지 말고 우선 일을 벌리고 보라고 한다. 창조적인 아이디어일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엉터리로 들릴텐데 그런 이야기에 좌절하기 보다는 자신이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묵묵하게 행동으로 먼저 실행하라는 것이다. 앤디 그로브를 세계적인 경영자로 만든 인텔 인사이드 역시 기존 광고업자들에게서 비아냥을 들어야 했지만 그의 마케팅 전략은 현재 가장큰 성공사례이다. 손정의 역시 야후에 투자할 때 일본에서 온 마지막 거품남이라는 소리를 들을정도였다. 루이스 거스너가 IBM을 컨설팅 서비스 회사로 업종을 전환한다고 할 때 역시 내부의 반발이 무척컸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팀원모두가 반대하는 게임이었고 성공을 의심했지만 놀라울 정도의 판매고를 기록해서 오늘날의 닌텐도를 만들었다.
이처럼 세계최고의 디지털 리더들에게 있어서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성향중에 하나는 기존의 벽을 깨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창조란 기존의 상식을 깨는 일이기 때문에 기존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나 비아냥에 쉽게 좌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욱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물론 자신들 성공이 반복되면서매너리즘에 빠진 경우도 있지만 이것이 어쩌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넷스케이프의 개발자 마크 앤드리슨은 만약 세상을 깜짝 놀랄만한 사업이 있다고 해도 자신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이미 타성에 젖어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업을 볼 안목이 못 된다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였다. 또한 스티브 잡스는 기존 데이터를 분석해서 아이디어를 평가하는 마케팅방식에 불만을 가졌을 때 벨이 전화를 개발할 때 마케팅 조사를 했느냐고 반문한적이 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란 결국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반발의 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이에 대해서는 무시할줄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세계최고 디지털 리더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결국 그들의 처음 성공은 남들이 생각 못했던 독창성과 신선함이 무기였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좌절을 이겨내고 강력한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담당교수인 데이비드 체리턴 교수를 찾아갔다. 다행히 스탠포드 대학교는 벤처 업계의 요람이었다. 실리콘 밸리의 젖줄이라고도 불리우는 스탠포드 대학교는 학생들의 창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도와줬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창업을 하겠 다고 하자 데이비드 체리턴교수가 나서서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체리턴 교수는 실리콘 밸리의 여러 벤처 투자자들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벡톨샤임이었다. 백톨 샤임은 세계적인 워크스테이션 컴퓨터 업체인 썬 마이크로 시스템즈를 공동창업하였고 당시에는 네트워크 장비시장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시스코의 부사장으로 재직중이었다.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을 만난 백톨샤임은 구글의 비전에 마음에 들었다. 설명을 듣던 그는 10만달러의 투자를 결정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수표를 던져줄 정도였다. 벡톨샤임의 투자는 돈도 돈이지만 계속 거절만 당했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1998년 본격적으로 치열한 비즈니스의 세계로 뛰어든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우선 사무실을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구글의 첫번째 사무실은 세르게이 브린의 여자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지인의 차고를 빌리기로 했다. 그들이 그곳으로 사무실을 결정한 이유는 욕실에서 따뜻한 물이 나온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두 명의 친한 친구가 차고로부터 사업을 시작했다는 성공신화는 미국 IT 업계에서는 가장 흔한 스토리중에 하나다. 실리콘 밸리의 1호 벤처기업인 휴렛팩커드가 사업을 시작한곳 역시 차고 인데 이곳은 역사적인 장소라 하여서 보존되고 있다. 그 밖에 애플, 아마존 닷컴, 야후등이 차고로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차고는 아니지만 빌게이츠는 옆방의 소리가 다 들리는 모텔에서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했고 손정의와 마이클델은 원룸 에서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디지털 리더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다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성경구절 말씀이 저절로 떠오른다. |
첫댓글 악착같은게 있어야 성공하죠..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