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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유래가 없었던 긴 봄 가뭄의 끝에 예보에도 없던 비소식이 어제 저녁에 들렸다.
이상기후로 계속 남쪽지방에 머물 것으로 보였던 장마전선이 잡자기 북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다했다. 그러나 여기 충주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하나 그런 일기예보에 쉽게 수긍을 하지 않는다. 한반도 전체에 태풍이 들이닥쳐 물난리 경보를 울려도 여기 사람들은 ‘충주는 실제로 내려 봐야 비가 오는지 알지. 여기는 일기예보가 안 통하는 특별지역이여’ 하며 건성으로 들어 넘긴다.
충주는 호반의 도시다.
호수가 많아서 그런 것 보다는 호수보다 더 크고 넓은 강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서 그렇다. 이 도시에 들어오려던 나가려던 커다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는 동서남북 어디로도 통행이 불가한, 강에 둘러싸인 도시가 바로 충주다. 그 물줄기들은 종국엔 모두 한강으로 흘러들지만, 천연의 해자라 할 수 있는 강에 둘러싸인 호반의 도시가 바로 충주다. 아울러 도심의 울타리쯤으로 호암지라는 둘레 약 4km의 저수지도 있고, 또 인근에 함지연못도 있다. 물이 넘치다 보니 대가미 연못은 아예 메꿔 버리고 녹지 공원을 조성해 버렸다.
충주엔 가뭄이 없고 물난리가 없고 거기에 태풍도 없다.
5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가뭄을 타 본적이 없고, 70년대 후반에 한강수위가 극도의 위험에 처했을 때 서울사람들 물난리 막으려고 한강의 댐들을 죄다 잠그게 해서 일부 동네의 강둑이 범람해 침수가 된 적이 있다. 50년 이상동안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그 숱한 태풍 중에서 간접 영향으로 바람피해를 입은 적은 한두 번 있었으나 티브이 뉴스에 나오는 그런 태풍의 피해를 입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충주는 소박한 도시다.
사람들도 순박하다.
척박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악착같다고 하는데.......... 환경이 좋은 탓인지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요렇게 조렇게 어울려 살아간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배짱이나 도전정신이나 끈기는 적은 편이다.
충주는 중소도시 치고는 아주 깨끗한 도시다.
한 때, 충주비료공장이 왕성하게 가동되던 시절에는 ‘대한민국 8대도시’에 이름을 올리던 도시다. 산업화 까지는 좋았으나 산업 환경의 변화에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했던 1차산업과 2차산업의 중간쯤에서 한동안 성장을 멈추어버린 도시다.
충주는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지 10분만 나가면 산이며 계곡이 넘친다. 나는 기를쓰고 타지방으로 여행하는데, 내 지인들은 기를 쓰고 이 고장을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충주는 대한민국 안에서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답고 소박하고 조용한 도시라고...........
비가 내렸다.
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쏟아 부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천둥과 벼락이 오만한 호통을 어찌나 요란하게 쳐대는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새벽녘에 창문너머로 내리 퍼붓는 비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아침이 되고 날이 새도록 비와 천둥 벼락은 멈추지를 않았다.
그러던 하늘에 어느 순간........ 짠하고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어둡고 두터운 겨울외투 같던 먹구름도 한순간에 어디론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암튼 하늘의 일이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
궁금해서 일기예보를 살피니 ‘오후에 또 장맛비가 예상되니 외출 시에는 꼭 우산을 챙겨가라’ 한다.
‘몰할까?’
일단 급한 볼일부터 해결하고 나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일단은 집을 나서보자.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무더워 지기 전에........
볼일을 보려면 나는 무조건 일단 읽을거리가 손에 쥐어져야만 한다. 읽을거리가 없으면 볼일을 뒤로 미루는 정도이다. 책장에서 책 한권을 무작정 꺼내들고 가는데 오래전에 읽었던 시집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는 시 한편이 거기에 있었다.
뒤란 어디쯤 시원을 알 수 없는 샘이 있어
지적지적 물이 흘러나오겠지만
그 샘을 파고 다듬어 자갈을 깔고
동그란 둑을 만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길을 찾지 못한 물들이 또 다른 길을 만들어
머위 이파리 넙떡넙떡 키워 내는 사이사이로
보랏빛 꽃대궁을 쑤욱 뽑아 올린 붓꽃과
티걱거리며 토닥거리며 이 달개비에서 저 달개비로
삶을 얽어가는 청개구리 부부와
아무 것도 차리지 않은 채 불쑥 나타나서는
헤식은 바짓단 사이로 저도 세상 보겠다는 거웃으로
감꽃 흐드러지게 떨어진 평상에 누워
뜻 없는 몇 마디 주절대다가
가노란 말도 없이 사라지는 너까지
나의 뒤란
뒤란이 있는 내 집이여
---------- (뒤란이 있는 집. 이계선님.)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본다.
아주 오랫동안 거닐어 보지 못했던 길을 따라서.........
얼핏 보면 낯선 듯 느껴지지만 이내 나의 기억세포들은 사오십년 전의 이 골목에 대한 숱한 기억들을 어디선가 찾아내어 끄집어 온다. 여기로 들어가면 어디로 나오고....... 이 골목길은 끝이 남의 마당을 가로질러 시장통으로 가로지르는 길이고..........
‘거 참. 내 머릿속 기억이라는 놈은 세월도 거슬러 올라가나보다.’
‘요기가 동호네 집, 조긴 의진이네 사랑채, 요리로 가면 덕수네 엄마가 하시던 오뎅가계고........ 어! 골목이 없어졌네. 아카데미극장 간판 그리던 창고 골목이........’
죄 다 다른 얼굴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골목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갔음에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들만이 자욱할 뿐.
내 발걸음이야 모처럼 무심하게 다시 찾았지만,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골목길이기에 이렇게 남아있는 것일까?
자동차를 가지게 되면서 기차나 시내버스를 타본지가 언제였던 것처럼, 큰 길을 따라 차만 몰고 다녔으니 이 오래된 골목길을 다녀 본지가 언제였던가.
낯익은 문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분명 남의 집 대문은 아니다.
혹간 골목으로 사랑채 문이나 사립문을 내어놓은 집들도 있었지만 그 문도 아니다.
모양새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골목길을 다녀본 사람은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그런 문이다. 측간이다. 통용되는 쉬운 말로는 변소다. 절간에 있는 해우소니 화장실이니 하는 표현이 여기 골목길에서는 좀 낯설다. 측간이나 변소가 맞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이나 점포주인은 변소를 그냥 열어 놓지만, 맘씨가 고약하거나 점차 도시화되면서 실리에 대한 이해가 변해가면서 열에 아홉은 변소에 자물통을 채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노상방료)라는 말처럼 으슥한 골목길은 반쯤 허가된 측간화 되어갔고 골목 여기저기에 (소변금지) 또는 요상한 (엿장수 가위) 그림이 나붙게 되었다.
세월은 변해서 그 (소변금지) 팻말들이 요즘엔 (주차금지)로 변한 세상이 되었다.
어찌되었던 이적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길을 거닐어 보자니........ 나름 무척이나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골목의 끝에 뒤란이 있던 내 집이 있다.
유독 그 집을 사랑했던 내 어머니가 그 집에 있다.
아주 오랫동안 가슴 깊은곳에 감추듯 억누르며 지내왔던........ 가슴이 아려온다.
임예식(林禮植)여사. 마흔 셋의 나이에 생명의 태엽이 멈추어 버린 나의 어머니가 그곳에 계신다.
이 골목이 끝나는 지점의 뒤란이 참 예뻤던 내 집에.........
골목길은 멈추어버린 듯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길이다.
왠지 낯선 듯 해보이지만 이내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길이다.
골목의 어귀를 돌아서면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 어디까지 갈지 알 수는 없지만 결코 발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은 마냥 걸어들어 가고픈 길이다.
골목길은 도심의 뒤란이다.
뒤란이란 것이 뒷마당이며 뒤뜰이며 뒤울안이니 골목은 도심의 속내라고도 하겠다.
골목길을 걸으면서 당장 식구들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고, 아침 등교길에 울려서 보낸 딸래미의 기성회비 걱정을 하고, 장마가 들기 전에 지붕을 수리하여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면서 당시의 아비들이 고심을 하며 걷던 길이다.
요즘사람들은 그렇게 깊은 상념 속에 마냥 길을 걸었었던 기억을 모두 잊었다. 어쩌면 잊었다는 그 사실조차도 모두 잊었는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길이라는 것은 사람이 주체였다.
길의 개념이 도로라는 의미로 바뀌기 전까진 말이다.
길이라는 것은 사람을 왕래시켜주고 물건이 오가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삶의 공간들을 필요에 따라 서로 연결시켜주는 고리요 매개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위해서였다. 사람이 주체였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공간들이 편리에 따라 점차 한곳에 집중하여 모여살기 시작하여 도시가 생겨나고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당시만 해도 사람이 살기위한 주거공간이 우선이었다. 하여 생겨난 길이 골목길이다. 새롭게 들어선 집과 집 사이,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겨우 비집고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만한 길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우선이며 사람을 위한 공간이 다음이요, 그 다음의 자투리를 이용해 골목길이 생겨났다.
골목길의 연장선상에서 자동차로도 도저히 오를 수 없은 가파른 언덕이 나타나면 그 길은 차량에는 필요가 없는 길이나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라도 필요하다면, 골목인들은 그곳에 계단을 놓았다. 살아 숨쉬는 사람의 지혜인 것이다. 징검다리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요즈음의 세태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도시계획이라는 이름하에 사방으로 통하는 널찍한 길이 먼저 들어서고, 다음으로 대로 양편으로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다. 그리고 이내 그 길은 모두 자동차가 차지해버린다.
사람이 한참이나 뒤로 밀려난 것이다.
가로등 하나 켜지면 어디선가 아이들이 하나 둘 몰려나와 온갖 놀이를 하며 그 무더운 여름밤을 이겨내던 놀이터가 사라졌다. 소중한 삶의 공간이자 삶의 모습들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만 것이다.
엿판을 허리춤에 내걸고 커다란 가위로 요상한 소리를 내던 엿장수가 떠나갔다.
‘아-이스 께끼나 칸데’ 하면서 꼬맹이들을 가장 강렬한 힘으로 유혹하던 하드 장수도 어디론가 떠났다.
고등어나 꽁치를 소쿠리에 담고 골목을 돌며 팔던 아주머니도 떠나갔다.
양 팔을 벌리면 끝이 닿을락말락하는 좁은 골목에 까만 연탄을 가득 실은 미야까(리어카)라도 오라오는 날에는 한참을 뒤로 물러나 발뒤꿈치를 들고 비켜나서 미야까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약간의 언덕이라도 나오면 너 나 할 것 없이 지나던 꼬맹이까지 달려들어 미야까 뒤를 밀었다.
둔탁한 종소리를 연이어 내며 아주 투박하고 커다란 짐바리자전거라도 골목에 나타나면 화들짝 놀란 꼬맹이들이 어디든 비켜설 틈을 찾아 줄행랑을 쳤다. 전봇대 뒤로라도 잠시 몸을 숨겨야만 했다. 자전거 짐칸에 굵은 막대를 옆으로 하고 커다란 플라스틱 하얀 말통이 양쪽으로 두 개 또는 네 개가 매달려 있었다.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술도가고 배달하는 모습이었다.
‘펑’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꾸역꾸역 피어오르면 귀를 막고 전봇대 뒤에 골목 뒤로 숨었던 꼬마들이 뛰쳐나온다. 강냉이를 튀겨내는 아저씨가 골목에 들어온 날이다. 그날은 온종일 아이들의 정신이 그곳에만 모여들었다.
아주 가끔은 온 동네 꼬맹이들을 골목에서 죄 다 쫓아내버리는 일도 있었다. 적어도 반나절 이상 골목엔 아이들 그림자조차도 꼬리를 감추는 날을 말함이다. 그날은 골목어귀에 형상이 좀 특이한 미야까(리어카)가 떡 하니 모습을 드러내면서 시작되었다. 간혹은 미야까 대신 아주 커다란 나무통 두 개를 긴 장대 양쪽에 걸어서 어깨에 걸머메고 골목에 어떤 아저씨가 모습을 드러내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측간을 치는 날이다. 누구네 집인지 골목쪽으로 머리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을 낸 측간이 가득 차 비우는 날인 것이다. 요즘말로 치자면 화장실 정화조 청소하는 날을 말함이다.
냄새에 아주 민감한 요녀석들은 낌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는 옆 동네로 마실을 떠나거나 들로 산으로 나갔다. 반나절 피접을 떠난 것이다. 돌아온다 하여도 사나흘간은 오늘 치운 측간의 골목엔 다가가기를 꺼릴 눈치들이다.
숨박꼭질에 고무줄놀이에 사방치기에 딱지치기랑 제기차기. 자치기. 오재미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겨울이 지나 해빙기에 접어들면 누구네 대문앞에 내어놓은 연탄재를 주워다가 진창을 메꾸고, 혹간은 지난밤에 탄 연탄이 아니라 그제밤 연탄재를 개구장이가 심술굿게 걷어찼다가 꽁꽁 얼어있는 연탄재에 그만 발목을 움켜쥐고 나죽는다 나뒹굴기도 하던 그 골목이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이렇게 골목을 서성이는 나의 눈가에는 마냥 선한것이 바로 엇그제만 같은데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골목 어귀에 들어선 미장원 유리창에 비친 내모습을 들여다 보자니........... 충주고을 야현동 골목에서 골목대장을 하던 그 꼬마의 모습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를 않는다.
골목길은 그 안에 자근하게 배어있고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서민들의 아환과 훈훈한 정과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담겨있는 하나의 삶의 터전이자 아늑한 생활공간이었다.
희끗희끗한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할아버지가 그곳에서 모여 놀고 있다가 엉겁결에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꼬마 녀석들 머리를 하나라도 빠트릴세라 지나놓고도 다시 돌아와 쓰다듬어 주시고 가시던 그런 곳이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한나절을 그대로 흙바닥에 퍼대고 앉아 ‘두껍아 두껍아’를 외치며 흙장난을 하고 놀아도 누구하나 무어라 하지 않는 절대적 해방공간이자 낙원이었다. 아니다. 딱 한 사람. 엄마만은 예외다. 흙에 옷 버린다고 등짝을 한바탕 후려 때리고 가실 것이다. 아님 당장 팔소매를 질질 끌다 시피하고 집으로 끌고 가셨을 것이다.
누군가는 필요해서 도로를 만들고, 또 누군가는 원치않는 상황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거기에는 빼앗고 뺏기고 하는 상관관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 이면에는 거의 대부눈 돈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 길의 흐름과 변동을 잘 알고만 있어도 떼부자가 되는 것은 식은죽 먹기 였으리라. 그런 시류에 편승하지 못하거나 애시당초 가진것이 없거나 힘이 부족한 사람들이 점차 뒤켠으로 밀려나서 최소한의 공간을 차지하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축 늘어진 어깨로 이골목 저골목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골목길엔 추억과 낭만이 스며들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골목길에 숱한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대로변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가지고 이룬자들의 삶과는 다른,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하층민이나 서민의 이름으로 살아가던 공간이 골목이다.
인사동 거리와 북촌 한옥마을을 거닐어 본다면 분명 그곳에 추억도 낭만도 넘쳐난다.
세상이 살만해진 다음의 피맛골 정취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피맛골도 처음 생겨난 이유에서 근세까지의 아주 오랜 세월동안 꼭 그렇게 뒷골목에 의지해서 살아야만 했던 숱한 인생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이 배어있는 것이다.
충주에 근자에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골목길이 있다.
아주 협소하고 어둡기까지 한 이골목을 아는 사람은 정말 별로 없는 버려지다 시피 한 그런 골목길이었다.
충주시 봉방동의 무학시장 언저리쯤이라 하던가, 무학시장 어딘가의 버려지다시피한 찌그러져 가는 음산한 골목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시청의 공고에 의해서 이 골목 언저리가 대폭적이이다 못해 전폭적으로 보수에 나섰던 것이다.
처음엔 '무슨 도시계획에 의해서 개발'이 이루어 지나보다 했다. 그 협소한 시장 골목들 틈새로 작은 주차장들도 생겨났던 것이다. 좀 우스웠다. 좁은 시장골목에 굳이 차를 끌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좀 혐오스런 시선으로 보아던 차에 엉뚱하게도 이곳에 공터만 있으면 주차장이라니.......
더 황당하기로는....... 좁은 골목을 새롭게 넓고 환하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옛모습으로 복원을 한단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이 후줄거니 한 모습의 골목을 지난 시대 모습으로 엄청난 인력과 돈을 들여 복원한다니...........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그리고 얼마후......... 나는 이 소란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옛것을 알차게 복원하고 산교육 내지는 교훈으로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참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억지의 성역화나 억지 행정에서 파행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면......... 그 일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좀 측은해 지고, 이런 시류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가슴아프다.
살아있는 사람을 추앙하다시피 받드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하다.
누군가 훌륭한 사람이 진실로 훌륭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기려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 번듯이 살아있고, 아직도 할 일들과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을 숭상하듯 치장해 놓으면.......... 한국인들 참으로 요런 상황에 잽싸게 편승하는 부류가 상당히 많이 있다. 어쩜 한국인 기질에 내포되어 있는 지도 모를 일이고..........
김수녕 양궁장도 그랬고, 황영조 기념사업도 그랬고, 천안의 이봉주 도로도 그렇고,............ 모가 그렇게 급할까?
그렇게 숭배하듯 추앙해 벌려놓은 기념사업들 다음에.......... 그런사람들 중 어느누구 하나 제대로 나머지 삶을 제대로 사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 순간에 그들은 일체히 성장을 멈추어 버렸다. 그것은 사회적 폐단이다.
김수환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이나, 그리고 그 바보 아저씨나........ 참으로 바르게 삶을 사신 분들은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 마음과 가슴속에 진한 여운처럼 오래오래 살아계시며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골목을 새롭게 만들게끔 하신 분에 대해서도 굳이 폄하하거나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 까지는 없다.
훌륭한 분인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분이 가지신 나머지의 시간 중에도 지금보다 더 훌륭한 일들을 하시고 업적을 이루어 내신다면........ 훗날 차분히 그 훌륭한 삶을 살다가신 그 분을 그리워하고 기리면서 이런 기념 사업들을 그때가서 차근차근 해 나가도 늦지 않을것을...........
'내가 당신을 존경하여 이런 사업을 이루어 놓았으니, 살아 계실때 둘러 보시고.......... 누가 나서서 이런 이쁜짓을 벌였는지 아시고 어떤 빽이라도 좀 하사해 주셔요' 라고반대급부를 먼저 계산하고 벌이는 사업들은 아닌지.............
오래전 외신에서 이런 기사를 읽었다. UN에 드나드는 외신기자들 사이에서 그 분을 부르는 호칭(별명)이 '기름바른 장어'라 하는 글을 보았다.
무슨 의미일까?
정녕 나는 그분이 나머지 임기나 남은 여생에서 이런 은유적인 호칭을 불식시킬만큼 더 훌륭한 업적을 남기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의 지명으로는 봉방동이라 부른다. 인근의 봉계와 방동을 통합하여 도시구획정리를 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조선새대부터 이곳 일대의 지명을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바로 무학당(武學堂)이다. 충주고을 관아에 속한 병사들이 이곳에서 무예훈련을 하던 장소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일제치하에서 읍성쪽을 가로막고있던 충주천에 대수정다리가 놓여지면서 그때부터 여기 무학당 일대가 고을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하천변을 따라 처음부터 노천시장이 서기시작해서 오늘에 까지 이른 동네이다.
무학당 골목의 이곳저곳을 기웃기웃거려 본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충주고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 바로 이 무학시장 일대가 아닐까 한다.
골목 안쪽의 낡고 허름한 집들에는 거의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는다. 여기저기 지붕도 허물어지고 마당가득 잡초만 무성한 집터들은 오래전부터 버려진 흉가가 되어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철대문 앞에 주먹만한 자물통들이 채워진 채 녹슬어 있다. 이곳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떠난 것이다. 워낙 낙후된 지역이고 굽이굽이 이어진 좁을 골목들이다 보니 재개발은 굼에도 못꿀 형편들이라 아예 마음을 접고 내집을 떠난 것이다. 땅떼기라면 재산가치를 지녔을 터인데 그것마저도 포기하고 떠났으니...... 오죽하면 그랬으리오.
그날도 그네들은 여기 골목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떨어지지않는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떠났으리라.........
시장으로 이어지는 골목 끝에는 아직도 국수집이 있었다. 안채로 이어지는 마루에 부모님이신듯 너르신 부부가 앉아계셨고, 국수집을 물려 받으신듯 젊은 한 분이 쪼그리고 앉아 국수 포장을 하고 계셨다.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하자 '그러세요' 라며 수줍게 인사를 받는다. 반갑고 고마운 모습이다.
골목길을 몇 개 이리저리 빠져나오다 보니 아주 낯익은 골목이 하나 나온다.
(한국 기독교장로회) 로고가 들어간 작은 간판이 골목어귀에 매달려 있다. 많은 추억이 아로새겨있는 정말 반가운 골목길이다.
더먹머리 말썽꾸러기 소년을 성인으로 자라게 하여 세상에 내보내 준 나의 삶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교회가 있는 교회 뒷골목이다.
사실 이제야 말이지만, 이 골목은 내게 썩 유용하고 크게 덕을 많이 본 골목길인 것이다.
교회 근처에 사는 여자친구를 기다리거나 교인이나 어른들 눈을 피해서 다니기엔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골목길이었다.
또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 처럼 교회에서 세례교인들에게 성찬식을 거행하는 날이면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 골목길로 숨어들어와 쪽문을 열고 들어가 성찬식에 쓰려고 준비해 둔, 장로님 댁에서 손수 재배해 단구어 논 포도주 단지를 슬며시 들고는 내뺐다. 항상 양을 넉넉하게 준비하셨기에 성찬식이 끝나도 제법 많은 양의 포도주가 남아있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시무 집사님들은 번번히 그 포도주 단지가 어떻게 없어졌는지 익히 아시고 계셨을 것이다. 교회 안에 나를 중심으로 악동 패거리가 엄연하가게 공공연하게 존재했엇으니까.
어쩌면 내가 이날이때까지 병원신세 한번 안지고 건강하나만큼은 자신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비록 훔쳐서 마신 포도주였지만 그 포도주에 담긴 (구세주의 보혈 성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뒷골목으로 주로 다녔다해서 그렇다고 내가 정말 못된 말썽꾸러기 만은 아니었다.
우리집안은 본시 확실한 불교집안은 아니었으나, 불교적 성향을 기반으로 한 무속신앙을 믿어오던 집안이었다.
그런데 집안의 고모뻘되시는 이길자 집사님께서 (시댁집안도 교인이 아니데)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온집안에서 달랑 혼자 기독교인이 되신 것이다. 호암동 함지못 부근의 과수원에서 근 10리길을 마다하시고 죽어라 걸어서 교회를 다니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려 여기 이 교회였다. 어느해 부활절 총동원주일에 어떻게든 전도를 해야겠다고 동분서주하시던 고모가 '그냥 교회에 한 번만 가자. 고모가 예배 끝나고 짜장면 사줄께' 하시는 꼬임에 그만.......
그길로 내가 그만........ 예수쟁이가 되어 버렸다.
학생회를 거치고 청년회를 거치면서, 성가대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에서 학생회 교사도 하고....... 군대에 다녀와서는 집사 직분으로 여러가지 교회 일 전반에 걸쳐 했엇는데 글쎄............
연애 사건이 터져버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난 영원한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장로회에서 세례를 받았음에 나름 자부심도 가진.........
요즘도 다시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과 교회일 좀 하자고 하는 말씀들을 자주 듣는다. 교회에서 크게 은혜를 받았으니 더 늦기전에 보답을 해야하지 않느냐고도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온 분들은 말씀하신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나는 지인들에게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절대자께 아주 간절하게 애원하듯이 기도를 드린적이 있었어. 어떤 여자를 보았는데 죽어도 그 여자가 아니면 안되겠드라고. 그래서 절대자에게 매달렸지. 이 여자만 내 사람으로 만들게 허락하여 주시면 죽을 때까지 더는 부탁드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소원입니다. 절대자시여. 부디 이놈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아멘.'
어떻게 되었을까?
절대자께서 허락을 하셨음인지 불가능했던 일이 현실에서 이루어졌지. '절대자님 땡큐입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부터 교회에 안나가게 되었지. 잘 생각해 보라구. 이젠 살아가면서 내가 절대자에게 어떤 부탁도 드릴 처지가 안되고, 그 분도 들어주실 이유가 없어졌는데 내가 모하러 가겠어?
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그렇게 교회에 계속 다니지 않는 이유를 대고는 해왔다.
교회를 뒤흔들었던 연애 사건의 당사자는 바로 나와 왕짜증여사였고....... 그 위대하고 거룩한 사태의 결과로 우리 짱구가 태어났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늘 느끼고 있다.
지금은 골목의 중간쯤 담을 헐어 교회의 안마당과도 연결되어 있다. 누가 볼세라 힐끔거리듯 교회의 안마당을 서성거려 본다.
그리고는 다시 서둘러 골목길로 달아나듯 숨어버렸다. 혹시나 절대자께서 우리사이의 일에 셈이 아직 제대로 끝나지 않았다고 나꿔채실것만 같다.
헐.
허둥대듯 급한 마음으로 골목을 내달리다 보면 시장통으로 향하게 되는 골목모퉁이에 대낮인데도 형광등 불빛들이 켜있는 무학재래시장이 나오고 그곳에 그 유명한 순대먹자골목이 있다.
이런 분위기의 또 다른 골목으로는 충주의 피맛골이라 할수 있는 곳으로 바로 중앙시장 뒷골목을 꼽을 수 있겠다.
서민들의 애환이 나름대로 서려있는 아주 오래된 유서깊은 먹자골목이다.
일호집. 이호집. 삼호집. 두꺼비집. 유정식당. 중앙식당........ 등등 순대국집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순대국집들 건물의 안쪽으로는 분식집들이 들어섰는데 맛에 놀라고 저렴한 가격에 놀라고 푸집함에 놀라게 된다. 김밥이며 튀김이며 맛탕이며 잡채며 떡볶이며 만두며........ 순대국집에 들어앉아 자리를 차지하고 순대랑 머릿고기랑 시켜놓고 막걸리나 소주를 즐기다가, 잠시 분식집에 들러 주점부리고 이것저것을 주문하면 친절하게도 금방 순대국집까지 쟁반에 담아 배달까지 해 주신다. 분식집 중에는 내가 중학교때부터 드나들던 유선분식이라고 있는데 여전히 같은 주인아주머니 한결같은 손맛으로 반겨주신다. 대한민국에서 계란라면을 제일 맛있게 끓여주시는 집이고 쫄면 또한 맛이 기가막힌 분식집이다.
순대국집들은 어느집이든 자리가 없거나 음식이 떨어지면 옆집을 서로들 권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집저집을 옮겨다니며 맛을 보게된다.
내 경우 가장 오래되고 즐겨찾는 단골집은 2호집이다. 내 대학시절엔 키가 크신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을 하셨었다. 시도때도 없이 욕질을 해디시는가 하면 '거기 너가 꺼내다 먹어''글쎄 알았으니까 내가 갖다 줄때까지 무조건 기댜려' 라며 호통을 치시기 일쑤다. 당시엔 주전자에 담아 내주시는 막걸리와 녹두 부침개가 일품이었는데...... 가끔 어렵게 부탁하면 계란찜이나 계란말이도 나왔다. 지금은 욕쟁이 할머니는 안계시고 아마도 며느님인듯 싶다. 메뉴도 간단하게 순대국밥. 순대 머리고기 안주. 소주. 맥주. 그것이 다 이다. 너무도 간촐하다. 그래도 사람은 미어지고 젊은 주인은 억척스러울 만치 장사살림을 잘치뤄내고 계시다.
요기 중앙시장뒷골목을 조금 올라서면 가구점 골목으로 이어지는 모퉁이에 (생태탕)을 아주아주 예술로 끓여내시는 아주머니 자매분이 계셨다. 미리 예약을 하고 가야만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여 옛생각에 찾아가 보니 가계 문이 닫혀있다. 점포임대란 글자가 나붙어 있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 입맛도 변해 찾는 이가 줄어 장사가 잘 안되어일까?
아님 운영하시던 아주머니들께 변고가 생기셨을일까?
많이 아쉽다. 마침 배가 고팠기에 내심으로 기대를 했었는데.........
----- 생각보다 길어지네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피안재.
첫댓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어린 시절의 골목길 시장통 풍경! 충주가 태풍 가뭄은 적을지 몰라도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여름에 더 덥고 겨울에 더 춥지요?^^ 그래서 충주 사람들이 충주를 떠나면 더 진취적으로 더 욜심히 사는 것은 아닌지. 추위 더위를 어릴적부터 잘 견디니 다른 곳에 가면 덜 덥고 덜 추울테니^^ 피안재님 덕분에 충주 그려보았어요.
근디 교현동 아니고 야현동이라요?
고불고불 고샅고샅... 정겹고 한가롭네요...
서울도 비 좀 던져 주셔요...^__^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풍경입니다.
살아있는 충주...그리고 사라져가는 추억의 잔해임을 거부하고 아직도 따뜻하게 버티고 건재하고 있는 풍경이 참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반가우신 피안재님 화이팅...!!!
먼푸른별님 안녕하세요! 무탈하게 북구라파 잘 다녀오셨는지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아침숲에서 피톤치드향도 만끽하셨겠지요!^^
http://durl.me/46mb7d
The Beatles - Norwegian Wo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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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현동은요? 도성에 일명 '애고개'를 기점으로 아현동이 있듯이 충주에도 향교 서쪽으로 '야현'이라는 고개가 있었습니다. 교현초등학교 뒷산으로 보면 됩니다. 하여 이 고개 서쪽으로 있는 마을(고구문사거리 주위) 동아아파트 주위에서 교현성당(본래 이름이 야현성당) 주위까지의 마을을 야현동이라 불렀지요. 향교주위의 (교동)과 (야현동)을 통합해서 (교현동)이라 했는데 행정구역으로 동 치고는 너무 넓어요. 인구도 많고. 해서 교현동 지역을 (교현1동) 야현동지역을 (교현2동)하면서 구역을 좀 더 넓혔지요. ㅎㅎㅎㅎ 담에 통장이라도 나갈까봐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