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
종 목 : 보물 제377호
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경남 거창군 거창읍 노혜3길 6-33 (양평리)
시 대 : 통일신라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의 금용사(金龍寺)에 있는 이 석불은 높이 4m에 가까운 거상(居像)으로 원래 이 부근에는 금양사(金陽寺) 또는 노혜사(老惠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석불은 몸의 굴곡이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앞 시기에 비하여 얼굴이 비만해졌고 옷주름 곳곳에 도식화의 경향이 엿보여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을 계승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비만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새겨졌지만 다소 경직된 표정이며 머리는 나발(螺髮)이 뚜렷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며 통견(通肩)으로 걸친 대의(大衣)자락은 몸에 밀착되어 가슴가 허리, 양다리의 볼륨이 뚜렷하다. 왼손은 인지(人指)를 곧게 펴 가슴 높이로 들고 오른손은 곧게 내려 엄지와 인지로 옷자락 끝을 살짝 쥔 특징적인 수인(手印)을 맺었다.
대좌는 아랫폭 155㎝ 크기의 복판복련좌(複辦覆蓮座)이며, 앞쪽에 폭 135㎝, 높이 25㎝크기의 앙련석(仰蓮石)이 놓여져 있다. 석불의 주위에는 구획이 설정되어 있는데 네 모서리에 네모진 기둥받침을 설치하고 그 사이로 긴 장대석으로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정제된 조형미에서 벗어나 흩어진 조형성을 보이나 통일신라 후반기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가여래입상(釋迦如來立像)으로 전체 높이는 3.7m이고 불상 높이 2.75m는이다. 몸은 머리에 비해 약간 가늘어 보이지만, 늘씬한 체격으로 세련된 조각과 전체적인 조화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불상조각(佛像彫刻)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둥근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 반쯤 뜬 두 눈과 입가의 미소는 부처의 자비(慈悲)를 느끼게 한다. 짧고 굵은 목에는 윤회(輪回)의 인과(因果)를 뜻하는 삼도(三道)를 선으로 새겼고, 머리에 비해 약간 좁은 어깨 양쪽에는 대의(大衣)가 걸쳐졌다. 대의 아래에 입은 긴치마 모양의 군의(裙衣)는 접힌 것까지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밑으로 내려 군의 자락을 쥐고, 왼손은 집게손가락을 곧게 폈다. 여래(如來)를 받치는 둥근 대좌(臺座)에는 연꽃잎이 두텁게 조각되었다. 머리 위의 천개(天蓋)는 근년에 올려진 것이다.
불상 주위에 주춧돌과 기와조각들이 확인되고 있어, 노혜사(老惠寺) 또는 금양사(金陽寺)가 있었다는 전승을 뒷받침하고 있다.
2. 거창 상림리 석조보살입상 (居昌 上林里 石造菩薩立像)
종 목 : 보물 제378호
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보살상
지 정 : 1963.01.21
소재지 : 경남 거창군 거창읍 미륵길 19-61 (상림리)
시 대 : 고려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거창군
연화대 위에 서 있는 고려초기의 석주형(石柱形) 석불로 왼손에 연꽃봉오리를, 오른손에 정병(淨甁)을 쥐고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어깨가 각지고 신체조형이 편판적이며 전체 외형은 사각형의 돌기둥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높은 육계가 솟아 있으며 보관은 별도로 만들어 씌웠던 것으로 보인다. 장방형의 얼굴은 침잠(沈潛)된 표정을 지었으며 목에는 할 줄로 삼도(三道)를 새겼다. 가슴에는 목걸이가 형식적으로 장식되었고 통견(通肩)한 천의(天衣)는 도식화 되어 있다. 허리선에서 접혀져 드리워진 군의(裙衣)자락과 천의의 옷주름은 얇은 판을 서로 잇댄 듯 평판적이어서 마치 금동불의 옷주름을 연상케 한다.
이 석불은 고려초기 양식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 부근에 건흥사(乾興寺)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사찰에 속했던 석불로 추정되며 높이는 353㎝이다.
화강암(花崗岩)으로 만든 전체 높이 3.5m, 불상 높이 3.05m의 관음보살입상으로 오른손에는 정병(淨甁)을, 왼손에는 연꽃봉우리를 들고 있다.
보관(寶冠)은 없어졌으나 육계는 크게 표현되었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 가늘고 긴 눈을 반쯤 뜨고 있으며, 길게 새겨진 코는 약간 손상되었다. 일자(一字)로 꾹 다문 입과 각진 어깨선은 자비롭다기보다 근엄하다. 평평한 가슴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 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는 단조로운 주름의 천의(天衣)를 걸쳤다. 허리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굵은 띠가 돌아가고 아래로 U자 모양 주름의 천의를 드리웠다. 보살상을 받치는 대좌(臺座)는 연꽃잎의 상좌와 8각형의 하좌로 구성되어 있는 특징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일대에 건흥사(乾興寺)가 있었다는 전승을 존중한다면 건흥사에서 모시던 보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방화 된 불교와 불상을 짐작케 해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3. 거창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居昌 迦葉庵址 磨崖如來三尊立像)
종 목 : 보물 제530호
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지정일 : 1971.07.07
소재지 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산6-2
시 대 : 고려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거창군
금원산 자연휴양림 위쪽의 커다란 천연 동굴의 직립암벽을 얕게 파고 부조한 마애불로서 침잠한 얼굴 표정과 특이한 대좌 형식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불상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소발(素髮)의 머리위에 육계(肉 )가 큼직하다. 넓적한 얼굴은 작은 눈과 입, 세모꼴의 뭉특한 코, 납작하고 긴 귀 등은 토속적인 느낌이 강하다. 밋밋한 어깨에 신체의 볼륨은 약화되었고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평판적인 간결한 옷주름이 중첩되어 있다. 대의 하단은 짧게 표현되어 양 다리가 길게 노출되었다.
양 발은 보편적인 정면관(正面觀)의 불신과는 달리 발꿈치를 서로 맞댄 측면관(側面觀)이어서 부자연스럽다.
양 손은 가슴 앞에서 모아 엄지와 인지를 맞댄 상품중생인(上品中生印)을 맺고 있어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추정된다. 대좌의 윗면에는 5엽의 앙련(仰蓮)을 내부에는 간엽(間葉)이 3엽의 복련(覆蓮)을 표현하였다. 광배는 융기선으로 표현한 무문(無文)의 보주형(寶珠形) 두광배(頭光背)이다.
뻗은 천의(川衣) 자락과 영락 장식 등 장식성이 강하다. 특히 한 손으로 천의자락을 잡은 자세는 삼국시대의 보살상을 연상시키지만 그 보다는 훨씬 도식화(圖式化)되었다. 본존불에 비해 여성적인 얼굴에 머리에는 화려한 화관(花冠)을 썼으며 수발(垂髮)은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광배는 원형 두광배이며 대좌는 사실적인 연꽃으로 구성되었다.
좌협시보살 옆에 세로 88㎝, 가로 70㎝ 크기로 암벽을 파낸 다음 이 불상의 조상기(造像記)를 해서체로 1행 26자, 총 21행에 540여 글자를 새겼다. 글자 중의 『天慶元年十月』은 고려 예종(睿宗) 6년(1111년)에 해당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애삼존불이 있는 곳에 가섭암과 지장암 등의 불사가 있었다.
금원산(金猿山) 북쪽 골짜기 큰 바위굴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磨崖佛)이다. 가섭사지(迦葉寺址) 뒤의 돌계단을 오르면 바위굴이 있고 안쪽 남향 바위에 삼존불(三尊佛)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의 부분을 삼각선으로 그어 구획하고, 가운데는 보주형으로 다듬어 세 분의 부처를 새겼다. 중앙의 부처가 두 보살을 좌우로 거느린 모양이다. 중앙은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로 보인다.
연꽃 수미단 대좌 위의 본존불은 넓적한 얼굴에 삼각형의 코, 얼굴에 비해 작은 눈과 입, 크지만 밋밋한 귀가 토속적 인상을 준다. 좌우 보살의 얼굴도 비슷한데 화려한 옷자락은 조금은 번잡한 느낌이다. 삼존불 모두 도드라지게 새겼으나 전체적으로는 납작하게 표현되었다. 본존불의 각진 어깨, 밋밋한 가슴, 부자연스레 가슴에 모은 팔, 막대 같은 다리, 좌우로 벌린 발등과 같은 도식적인 처리는 고려시대 부처상의 특징이다. 오른쪽에 새긴 글에는 1111년에 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래의 가섭암 자리는 1770년대까지 절이 있었다는데, 지금도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석재가 남아 있다. 지금 위천초등학교에 옮겨진 삼층석탑은 비슷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애삼존불은 가섭암과 같이 고려시대에 있었던 절의 일부였을 것이다.
4. 거창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居昌 農山里 石造如來立像)
종 목 : 보물 제1436호
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지정일 : 2005.07.07
소재지 :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산53
시 대 : 남북조(통일신라)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거창군
낮은 야산에 위치한 석불은 신체 각 부분의 조화로운 비례와 생동감을 잃지 않은 조형성(造形性)과 그리고 전형적인 우드야나(Udauana)식 옷주름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불신(佛身)과 광배(光背)는 동일석으로 조각하였으며, 머리는 소발(素髮)에 둥근 형태의 육계(肉 )가 봉긋하게 솟아 있으며 방형의 얼굴은 마멸되어 상호(相好)가 불분명하다.
통견(通肩)으로 걸쳐진 대의(大衣)는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면서 신체에 밀착되었는데 양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곧게 펴 내린 특징적인 수인(手印)을 맺고 있다.
전체적으로 광배의 불꽃무늬나 원추형 대좌의 연꽃무늬 등은 비록 마멸되었지만 통일신라의 무르익은 사실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며, 불상 전체 높이는 270㎝이다.
이 불상은 광배와 받침대[臺座]를 모두 갖춘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석불(石佛)이다. 바위를 원추형(圓錐形)으로 쪼아서 불상과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었다. 머리 부분의 상투모양[肉髻]은 높고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알맞은 이목구비를 갖춘 둥근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당당한 가슴과 함께 부드러운 경사를 이룬 유연한 어깨, 잘록한 허리와 날씬한 다리, 얇은 옷자락[法衣] 속에 드러난 사실적인 몸매는 불상의 뛰어난 입체감을 더해 준다. 여기에 양쪽 어깨에 걸친[通肩] 옷자락은 가슴위로 몇 갈래의 U자형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다가 허리부분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고, 두 다리에 살짝 밀착되어 작은 U자를 그렸다가, 종아리부분에서 큰 V자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옷자락의 표현법을 인도의 우드야나(Udyana)왕 여래상 형식이라 부른다. 그 유래는 석가모니가 성불(成佛)한 후 한때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往生] 어머니에게 설법하였는데, 그때 밧사(Batsa) 국의 우드야나왕이 부처가 잠시라도 지상에 없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150㎝ 크기의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불상이 최초의 부처상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여래상의 옷자락의 조각 형식이 이 석조여래상과 같은 형태였다고 한다. 이 같은 옷자락의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몸 전체를 감싼 광배[擧身光]에는 불꽃무늬를 새겼고,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받침대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