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정변의 역사 2007.3.20.화
73. 류관순과 고흥류씨
1919년은 서울에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생인 류관순(柳寬順.1902-1920)도 만세 시위운동에 앞장섰다.
휴교령이 내려졌고 류관순은 고향인 충남 천안군 병천면 지령 마을로 내려온다. 그는 고향에서도 일본 헌병의 감시를 피해 병천 읍내의 매봉 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이 날은 아우내 장터에 병천장이 서는 날이어서 일찍부터 붐볐다. 일본 헌병들은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자 류관순을 비롯해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는 조선 백성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았다.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 때 류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유관순은 일본 헌병대에 잡혀간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정신을 잃기를 여러 번 했다. 류관순은 곧바로 공주 재판소로 옮겨졌다.
그 사이 아우내 장터와 류관순의 고향 마을 지령리는 발칵 뒤집혔다. 젊은 남자는 무조건 다 잡아갔고, 류관순의 집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류관순이 순국한 서대문 형무소는 독립 운동가들이 갖은 고초를 겪었던 곳이다. 일본인 재판장은 류관순에게 ‘고집 피우지 말고 순순히 용서를 빌면 죄를 줄여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류관순은 “나는 당당한 조선인이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만세를 부른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결국 그는 징역 3년에 처해진다.
감방 안에 있던 다른 동지들은 어린 학생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고 상고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겼으므로 이 나라 어디에 있든 모두 감옥과 같다”며 더 이상 상고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뒤 공주에서 만세 운동을 하다 잡혀 감옥살이를 하는 오빠가 사람을 은밀히 보내 상고하라고 류관순을 설득했다. 오빠는 부모도 없이 떠도는 두 어린 동생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류관순은 아직 어리니까 형벌이 줄어들 것이라고 오빠는 믿은 것이다.
드디어 재판 날이 다가왔다. “피고 류관순에게 말한다. 풀려나면 다시는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라! 그리고 착한 황국의 국민이 되겠느냐?”
“착한 백성이 살고 있는 이 땅에 도둑놈이 들어왔길래 그 도둑을 쫓아내고자 했던 만세 운동이다. 그게 무슨 잘못이냐? 당신들은 나에게 죄를 물을 수 없는 도적들이다. 내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으니 마음대로 하라!”
이렇듯 당당하게 말하고는 앉아 있던 의자를 집어 재판장을 향해 던졌다. 재판장은 난장판이 되었고 류관순은 간수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갔다.
다음날 류관순에게는 3년형이 아닌 7년형이 선고되었다. 법정에서 소란을 일으켜 법정모독죄 4년이 더해진 것이다.
류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서도 독립 만세를 불렀다. 간수들은 그를 끌어 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모진 매질을 했다. 그럴수록 그는 독립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함께 감옥에서 만세 운동을 펼쳤다.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하고 결국 독방에 갇혔다. 그리고 두 동생의 면회를 마지막으로 조용히 숨을 거둔다.
이화학당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은 그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일본에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은 심한 매질과 고문이 세상에 들통 날까 봐 시신을 인도하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류관순의 시신을 인도하지 않으면 세상에 그 잔악상을 모두 알리겠소!”결국 형무소 소장은 피투성이가 된 그의 시신을 이화학당 교장에게 인도했다. 시신은 이화학당 교우들의 흐느낌 속에서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한편 류관순은 고흥류씨 후손이다. 류씨는 고려 개국공신 류차달을 시조로 하는 문화류씨계와, 선대를 모르면서 고려 중엽 때의 인물인 류영, 류정, 류언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문화류씨는 후손이 번창하면서 풍산, 서산, 선산, 전주, 진주 등 여러 본관으로 갈라진다.
고흥류씨는 류차달을 시조로 하는 문화류씨계와는 계통을 달리한다. 고흥류씨의 시조 류영(柳英)은 고려 문종 때 호장을 지냈다.
시조의 7세손 류청신이 고려 충선왕 때 고흥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고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고흥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지명이다.
류청신은 고려 충숙왕 때 임금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5년 만에 자신이 볼모로 잡히고 대신 임금이 환국하도록 한다. 그 후 9년이 지나도록 류청신은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일생을 마친다.
류청신의 장손 류장은 고려 말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천안으로 낙향한다. 그는 이곳에서 일찍이 조부인 류청신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호도를 재배하여 오늘날 천안의 명물로 만들었다.
조선말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류인석은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문하의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한다.
3.1운동 때의 류관순은 아오내 장터에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옥중에서 만세를 부르다 옥사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흥류씨는 64,456명이었다. 그러나 2000년 현재 53,981명으로 오히려 1만 명 이상이 줄었다.
강원도 춘성군 남면 일원, 전북 정읍시 북면. 입암면 일원, 전북 고창군 고수면. 신림면, 고창읍 일원, 전남 고흥군 고흥읍 일원, 충남 천원군 목천면. 광덕면 일원
이 집성촌이다. 주요파는 예빈윤파, 대호군파, 판밀직사사파, 삼사판관파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