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사람들은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였습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한다'는 말은
어린 아이들을 말합니다. 아직 한참 자랄 나이에 있는 아이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망하는 것을 하나님은 볼 수 없으셨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12만
여명이면, 어른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어린 생명들, 어린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에, 비록 사역하기 싫어서
도망가며 하나님께 불평하는 요나와 같은 사람을 물고기 뱃속에까지 넣어서 그 암흑과 같은 곳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면서까지 어린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보내셨던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도무지 더이상 거부할 수 없게 된 요나는 "서원한 것을 갚겠다"라며 두 손들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제 그가 살 길은 주께서 하라고 명하신 그 사역을 하는 길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만약 그 암흑
속에서도 끝까지 하지 않겠다고 했다면, 요나는 그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계속 사역하기를
거부하면서 도망가는 요나와 같은 사람까지도 긍휼히 여기사 바다 깊은 속, 물고기 뱃속에까지 넣으셔서 꼼짝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긍휼이 한이
없으신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요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한 마디에 그 온 성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일단 나오자 그의 생각에 마귀는 또다시 게으른 생각을 넣어줍니다. 3일 길을
가며 선포해야 할 그는 하루만 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제는 암흑과 같은 상황에서 나가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결단했지만, 일단 숨을
돌리게 되자 또다시 그의 죄성이 드러납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
2:8-10)
언제는 암흑 속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찬송하던 그가, 살만 하자 다른 이들을 살려주는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또다시 박넝쿨을 통해 경험하게 하시며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요나처럼 암흑을 경험했어도 조금만 살만 하면, 또다시 생각이 게을러져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에
결단하고 서원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요? 그런데 그러한 나를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은 또 다른 경험을
시킵니다. 즉 요나를 다시 괴로움 속에 넣으시고, 이제는 더이상 불평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혹시 나도 요나처럼 과거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옛 본성 그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역할 기회를 주시는 데도 또다시 게으른 생각이 나의 길을 막지는
않습니까?
이왕 할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해야지 요나처럼 3일을 해야 할 것을 하루만 하면서 대강 할 때에
그런 사람에게서는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충성하는 자의 입에서는 불평이 나올 수 없습니다. 충성하는 자는 명령하시는 분의 마음을
살피며,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몸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충 생활에 피해를 받지않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분의 마음을
살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살피기 때문에 나에게 힘들어지거나 나에게 불이익이 될 것 같으면 자꾸만 요나처럼 게을러지며 부정적이
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을 경험했으면서도 맷집이 너무 강한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또다시 그의 입에서는 부정적인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또다시 하나님으로부터 고통스러운 상황을 불러오도록 역사하시게 했던 것입니다. 요나서가
기록된 것은 요나와 같은 한 사람의 사역자가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이처럼 힘들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1장부터 마지막장까지 하나님과 요나는 서로의 뜻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한 마음이 된
적이 없습니다. 잠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회개를 한 것 같지만, 그의 회개는 진실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회개가 아니라 죽을까봐 겁이 나서
안간힘을 쓰던 '살기위한 부르짖음'이었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 것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구원을 받은 뒤의 행한 행동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3일 길이나 되는 니느웨에서 하룻길만 돌면서 외쳤고, 또 그 성이 벌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는 구원받기를 원하면서, 자기와 원수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의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의 삶 속에 파고들어오셔서 죽음의 골짜기를 헤메게 하시며
강권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만드십니다.
요나는
자기와 자기 민족을 괴롭힌 앗수르를 결코 용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면 용서하시려는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은 니느웨가 회개하여 온전케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요나는
자존심이 강했고 고집이 셌지만, 하나님은 너그러우시며 회개하는 자들 앞에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요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으며 함께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왕 인생을 살아갈 바에 하나님으로부터 형통한 복을 받으며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요나처럼 계속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주는 마귀에게 미혹되면서 힘들게 힘들게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한 번 겪었으면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사역할 기회를 주시는 데에도 아직 누워서 잠만 자겠습니까?
영적 앉은뱅이가 되어서 앉아만 있겠습니까?
일어나서, 가서, 선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관망만 하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행동을 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행동하라는 것이 무엇인가? 당장 그 행동을 시작하라.
그러려면 생각이 먼저 깨어야 한다. 생각이 일어나야 몸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요나처럼 온전히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반쪽
복음만 전할지라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에 의해 많은 영혼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영혼을, 요나와 같은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향해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도록
노력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