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樂民 장달수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 북쪽으로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1Km정도 낙동강의 강줄기를 따라 산길로 내려가면 경치 좋은 절벽 위에 합강정(合江亭)이 있다. 남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으로, 강좌(江左)와 강우(江右)지역의 경계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 인적이 거의 끊겨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정자지만, 절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1633년. 함안 선비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란 분이 세웠다.
간송은 퇴계학파(退溪學派)에 속하는 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선비다. 퇴계학파 선비들은 성리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저술도 남겼지만, 간송은 성리학에 대한 저술보다도 배운 학문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평생 고민한 선비다. 남명의 학문 정신과 비슷한 경향이다. “대저 학문하는 길은 반드시 분발하고 단단히 뜻을 세워,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하게 하여 가르침을 받들어야 한다.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공(功)을 쌓아야 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 힘써 행하여 도에 이르러야 하고, 느긋하게 푹 젖어 들어 덕을 길러야 한다.”
간송은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 힘써 행하여 도에 이르는 것이 학문하는 길이라고 했다. 바로 남명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간송은 50세 때 남명을 모신 김해 신산서원(新山書院) 원장을 맡아 학덕을 기리는 일에 앞장섰다. 간송은 퇴계학파를 계승한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익힌 선비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명 정신을 이어가고자 노력하기도 한 것이다. 자신이 은거했던 합강정이 강우와 강좌지역 경계에 위치한 만큼 강좌의 퇴계학맥과 강우의 남명학맥을 아우른 선비라고 할 수 있다.
1585년(선조 18년) 함안군 검암리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가야읍 검암리다. 5대조 어계 조려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지조가 빼어났다. 어계가 함안 원북에 정착한 뒤로 그 자손들이 함안에 많이 살게 되었다. 간송은 8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 아버지를 따라 합천, 경북 청송, 영주, 봉화, 의성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때 간송은 퇴계학맥을 이은 여러 선비들로부터 공부를 배웠으며, 17세 때 경북 인동에서 여헌 장현광을 만나 스승으로 섬겼다. 19세 때 비로소 고향인 검암에 돌아와 곤지재(困知齋)를 짓고 시냇가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서 ‘간송’이라고 호를 붙였다. 그리고 시한 수를 지어 좌우명으로 삼고자 했다. “시냇가의 소나무를 사랑하니 날씨가 추워도 그 모습 변치 않기 때문이라네(爲愛澗邊松 天寒不改容)”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아 올곧은 선비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23세 때 함안 용화산 아래 배 위에서 퇴계와 남명의 제자인 한강 정구를 뵈었다. 이때 한강은 성주로부터 배를 타고 동래 온천으로 가는 도중이었는데,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 지점인 이곳에 머물며 인근의 선비들을 만난 것이다. 간송의 스승인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 등 여러 선비들이 함께 있는데, 간송이 예를 올린 것이다. 이해 노파 이흘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노파 이흘은 삼가 선비로 남명선생의 학문을 독실하게 계승한 사람이다.
이보다 앞서 간송은 20세 때 향시에 합격을 하고 과거공부를 하고 있는데, 32세 때 과거를 포기하고 독서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당시 경상좌우도 선비들과 두루 교유하며 퇴계와 남명의 학문을 익힌다. 49세 때 합강정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살고자 했던 것이다. 간송은 자기 자신을 “재주는 성기어 짧고 천성은 고집스러우며 어리석네. 세상에 나가서는 엎어지고 산에 있으며 수양하네. 자연 속에서 금하는 것 없으니 물고기와 새들과 사귄다네. 내 좋아하는 것을 따라서 한평생을 마치고자 한다네”라 하며 자연 속에서 살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조정에서 간송의 명성을 듣고 공릉참봉(恭陵參奉)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공조좌랑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자연을 벗 삼아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던 간송은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조정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쌀과 베를 내려 애도를 표했다.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666년 사림들의 건의로 조정에서 사헌부 지평 벼슬을 추증했으며, 1721년에는 함안 안인리에 송정서원(松亭書院)을 건립하여 간송을 모셨다.
간송은 남명을 좋아했다. “남명집”을 읽고는 “남명이 한 일 없다 말하지 말라 백세의 맑은 바람 우리나라에 떨쳤네(莫道南冥無事業 淸風百世振東韓)”라 하기도 했다. 안인리에 있는 송정서원을 찾았다. 서원은 없어지고 그 터에 퇴색한 비석만이 서 있다. 조정에서 불러도 벼슬에 나가지 않은 징사(徵士) 간송 조임도 유적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합강정도 찾는 사람이 없고, 송정서원 유허비도 찾는 사람이 없어 세월 속에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