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9)
*김삿갓의 양반 골려먹기
"아마 아흔 칸이 넘을 것이라고들 말하는뎁쇼." 앞선 사령이 말을 하였다.
과연 그 정도가 될 것 같았다.
김삿갓은 서 진사가 거드름을 필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서 진사 집에 당도했다. 집안은 잔치집답게 사방에 초롱불이 밝혀져 있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 다녔다.
김삿갓은 누구를 찾을 것도 없이 성큼성큼 사랑채로 향했다.
그가 사랑방 앞에 당도하니 방안에서는 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자연 양반 이야기가 나오면 그 녀석이 맥을 못출 것이 아니오?
첩의 자식도 어깨너머 글줄이나 익혀 문장깨나 할줄 안다고 거들먹거릴 수도 있으니 글 잘 한다고 모두 양반이겠소? 두고 보시오. 그놈도 서자 아니면 똑똑한 상놈일거요."
김삿갓은 이들이 자기의 내력에 대해 쑥덕공론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다시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그놈에게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사또는 사람이 없어 그런 놈을 훈장이랍시고 앉혀 놓고 용의 알처럼 떠받들고 있단말야 ... "
김삿갓은 부아가 치밀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뛰어 들어가 늙은 것들의 상투를 잡아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라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는 마당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기침을 몇번 하였다.
"거 누가 왔소?"
"예, 불초 삿갓입니다."
사랑문이 드르르 열리며 문첨지가 빼꼼히 내다보았다.
"오, 훈장께서 오셨군. 그럼 사또께서도 행차하셨소?"
"未久에 납실 것입니다."
김삿갓은 섬돌 위로 올라서며 문안인사를 올리고 안으로 썩 들어갔다.
순간, 방안의 공기가 딱딱해졌다.
양반들은 장죽 담뱃대만 빨고 있을 뿐 삿갓과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또는 언제 납신답디까?"
서 진사가 담뱃대를 박달나무 재털이에 탁탁 털면서 물었다.
"곧 납실 것입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문간이 소란스러웠다.
"사또께서 납시는 모양이네."
앉아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대문간으로 달려갔다.
사또는 사인교를 타고 납시었고 공식 행사가 아니어서 수행원은 많지 않았다.
"사또 어서 납시오소서. 이렇게 찾아 주시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소이다."
서 진사는 가마 옆에서 연실 굽실거리며 사또를 맞았다.
사또의 입장으로 연회는 바로 시작되었다.
연회장소는 여덞 칸이나 되는 별채 거실로 애당초 잔치장소로 특별히 지은 곳이다.
잔치상은 산해진미로 가득차 있었다. 십장생이 그려진 열두 폭 병풍을 배경으로 사또가 자리를 잡았다.
김삿갓의 자리는 말석으로 배정 되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날 사또의 빈청에 모였던 그사람들 뿐이었다. 기생도 그때 그 기생들이었다.
술잔이 오가고 기생들의 거문고와 장구 소리가 흥을 돋았다.
"얘들아 이제 좀 쉬거라."
서 진사가 손을 휘저어 기생들의 여흥을 중지시켜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또 나으리, 참 즐거운 밤이올시다." 서진사가 축 늘어진 턱을 들어 말문을 열었다.
"서 진사 덕택에 모처럼 즐거움을 맛보는구려. 정말 즐겁소."
사또도 취기가 거나해져 기생의 허리를 감싼채 대답했다.
"사또 나으리, 사람은 무엇보다도 근본이 중요하지 않소이까? "
"근본? 그야 물론 중요하지요. 바탕이 좋아야 합니다. 말과 소 같은 짐승도 혈통을 가려 쓰는데 항차,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김삿갓은 이 작자들이 서서히 서론을 꺼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의 말을 유심히 들으며 말을 꺼낸 의도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사또 나으리, 백로가 노니는 곳에 까마귀가 끼일 수 없는 법, 사람에게도 반상(班常)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지 않소이까?"
"반상이? 그야 물론이오."
사또는 무심결에 이렇게 말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 진사의 어투가 개운치 않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혹시 이 자리에 김훈장이 끼여 있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번뜩 들었다.
"서 진사, 뭐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소이까?"
사또는 정색을 하고 서 진사에게 물었다.
"아니올시다. 요즘 듣자 하니 내로라 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천한 것들과 종종 어울린다는 말이 있어 여쭌 말씀입니다."
사또는 서 진사의 뒷말이 자기를 들으라는 말로 들려 내심 불쾌하였다.
출신도 모르는 젊은 과객을 빈객으로 대접하며 아들의 훈도를 맡긴 것이 이 지방 토호들에게 상서롭지 못한 일로 보일 법도 한 일이었지만 아들의 진취적인 공부를 이끌고 있는 김삿갓이 아닌가?
사또는 짐짓 모른 체 하고 한마디 했다.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내 조사를 하여 엄중히 기강을 바로 잡을 것이니 너무 염려를 마시오.
자, 취홍도 도도하니 우리 저 김 훈장의 시를 청하여 감상해 봅시다."
사또가 이쯤 말을 하자 나머지 양반네들은 더이상 군말이 없었다.
"글제는 무엇으로 하면 좋겠소?"
사또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하자 원 생원이 팔자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한다.
"오늘밤 서 진사께서 반상에 대해 말을 하셨으니 양반이라는 글자로 하면 좋겠소이다."
"음, 양반이라. 뭐 그것도 좋지. 김 훈장, 어디 멋들어진 시를 보여 주시겠소? "
"예, 사또 나으리."
김삿갓은 서 진사 일당의 저의를 알고 있는터라 주저없이 붓을 들어 단숨에 써 내려갔다.
양반론(兩班論)
彼兩班此兩班(피양반차양반)
네가 양반(兩班)이면 나도 양반(兩班)이다
班不知班何班(반부지반하반)
양반(兩班)이 양반(兩班)을 몰라보니 양반(兩班)은 무슨 놈의 양반(兩班)
朝鮮三姓其中班(조선삼성기중반)
조선(朝鮮)에서 세 가지 성(姓)이 그 중(中) 양반(兩班)인데
駕洛一邦在上班(가락일방재상반)
가락국에서는 김 씨가 으뜸 양반(兩班)이지
來千里此月客班(내천리차월객반)
천리(千里)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兩班)이고
好八字今時富班(호팔자금시부반)
팔자(八字)가 좋으니 지금(只今) 부자(富者) 양반(兩班)이지만
觀其爾班厭眞班(관기이반염진반)
부자(富者) 양반(兩班)을 보니 진(眞)짜 양반(兩班)을 싫어해
客班可知主人班(객반가지주인반)
손님 양반(兩班)이 주인(主人) 양반(兩班)을 알 만하구나
"아니?"
글을 읽고 난 서 진사는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얼굴이 붉어졌다.
"왜들 놀라시오? 김훈장의 글은 요즘 세태를 그대로 묘사하는 걸작이외다."
사또는 내심 통쾌하였다. 안변사걸이 글을 보고 놀란 까닭을 사또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술자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그러나 서 진사 등은 어떻게 하여야 이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지 대책이 묘연했다.
양반 시비로 삿갓을 곤경에 몰아 넣으려다가 자신들이 진짜 양반을
몰라보는 무식한 양반으로 되었으니, 분한 마음보다도 뭐라 공박할 말이 냉큼 떠오르지 않았다.
"여봐라, 네년들은 대체 뭣들하고 있느냐?"
사또는 기분을 바꿀 양으로 기생들을 호령했다.
"자, 이 술잔을 받으셔요."
오늘도 가련은 서 진사 옆에 앉아 은잔에 맑은 약주를 찰찰 넘치게 따라 서 진사 입가까지 올리며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들었다.
"앗따, 그년.. 애교 한번 간드러지는구나!"
사또는 일부러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돌리려고 애를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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