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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마 : 또한 수자타야, 믿기 어렵다 함은 바로 諸法無我 라고 하였거니와 어찌 하여 믿기 어렵다 하는가? 사람들이 흔히 「하늘에 천주가 있다,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였다. 그 천주를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최후에는 모두 다 그 천주의 심판으로 상과 벌을 받을 것이다」고 하는 가르침은 만나기도 쉽고 믿기도 쉬우니라.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들어가기는 쉬워도 빠져 나오기는 어려우니, 마치 물고기가 그물에 들어가기는 쉬우나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오기 어려움과 같으니라.
그것은 「내(我)」가 영생한다고 하는 그 그물코에서 여간해서는 빠져 나오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저들 가르침의 모든 논변은 다 이 「내(我)」가 영생함에 있느니라.
이 「내」가 영생하려면 내가 믿는 그 천주가 영원한, 전지전능한, 무소부재한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에 앞을 다투어 「나(我)의 하나님은 만민의 여호와 시며, 창조 주시며, 옛적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분」이라고 찬탄을 쏟느니라. 이러한 찬탄에는 돈도 드는 것이 아니고 정밀한 이치도 필요 한 것이 아니어서 옛적부터 누구든지 그렇게 말함에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듣기 쉽고 믿기 쉽다 함이니라.
만일 이들에게 가서 영생할 「내(我)가 없다」고 말하여 둘째 법인(法印)을 얻게 하려 한다면 ,이는 마치 전봇대 위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땅 위에 열 두개의 콩을 차례로 꿰는 것과 같으리니, 수자타야, 이 일이 어렵겠느냐 아니 어렵겠느냐?
수자타 :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유 마 : 저들은 첫째 法印인 諸行無常도 이해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둘째 法印인 諸法無我 일까보냐? 아서라, 이쯤에서 관두자꾸나.
수자타 : 하지만 유마님, 어쩌면 이해 할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유하여보면, 연못에 네 종류의 연꽃이 있는데, 하나는 아직 물위에 나오지 않은 것이요, 둘은 이미 꽃이 져버린 연꽃이요, 셋은 이미 꽃이 활짝 핀 연꽃이요, 그리고 , 넷은 봉오리 채 있는 연꽃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연꽃과 같은 경우에는 유마님 말씀이 맞지만, 네 번째 봉오리 채 있는 연꽃은 아직 피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제법무아의 이치를 말하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또 비유하여보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와, 이미 죽어버린 이와, 몸에 죽을 병이 들어 미처 고칠 수 없는 이에게는 의원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태어나서 아직 죽지도 않았고 고치지 못할 병이 든 것도 아닌 사람들에게는 의원이 필요 한 것처럼, 어쩌면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유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희귀한 인연을 위하여서도 말씀 하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유 마 : 훌륭한 비유이다. 네 말대로라면 아직 봉오리인 채로 있는 저 연꽃들을 위하여 그리고, 태어나서 아직 죽지도 않았고 고치지 못할 병이 든 것도 아닌 사람들을 위하여서 제법무아의 도리를 내 조금만 말 해보리라.
수자타야, 이 도리는 믿기가 심히 어려우니라. 마치 마을의 큰 세력가가 있는데 몸에 병이 들어 백방으로 의원을 구할 때에 마침 지나가는 초라한 객이 들러 밥 한끼를 청하면서 '내가 그 병을 잘 아니 능히 고칠 수 있다' 하매 행색이 초라한 모습을 보고 믿지 않고 쫓아냄 같으니 이는 세력가의 눈이 달려 있어 아만심(我慢心)이 큰 연고니라. 그러므로 이를 일러 믿기 어렵다 함이니라.
또한 비유컨대, 집에 대대로 내려오는 주술이 있어 아침과 저녁으로 늘 그 주술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무당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모진 병이 들어 무당이 대대로 내려오는 주술로써 딸을 살리려고 할 때에 마침 지나가던 나그네가 이를 보고 '당신 딸은 약을 써야 살릴 수 있지 주술로는 어찌 할 수 없소' 하니 그 무당이 화를 내며 물리치는 것과 같으니,역시 아만심(我慢心)이 굳은 까닭이라, 제법무아의 도리는 믿기가 심히 어려우니라.
또한 비유컨대, 선녀같이 예쁜 여인이 있어 늘 거울을 마주하며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저 거울 속의 얼굴을 기뻐하는데 이웃 사람이 와서 그것을 보고는 '당신의 그 거울 속의 얼굴은 참 얼굴이 아니오' 하매 '저 거울 속의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라면 누구 얼굴이란 말이오?'라며 성내고 물리치는 것과 같이,아만심(我慢心)에 묻혀 있는 연고로 이 제법무아의 도리는 믿기가 어려우니라.
하지만 수자타야, 네 말과 같이 듣고 희귀하게 생각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물가에서 조심스레 발을 내 딛는 것처럼 인연이 있는 자를 위하여 내 조금 말하리라.
수자타야, 제법(諸法)이라 함은 몸과 마음, 즉 물질과 비 물질의 생성과 유지와 변함과 사라짐을 통틀어 말할 때의 그 법이니, 이러한 몸과 마음은 일어날 만한 법에 의하여 일어나고, 유지 될만한 법에 의하여 유지되며, 또 변할 만한 법에 의하여 변하고, 사라질 만한 법에 의하여 사라지는 까닭에 諸法이라 하느니라.
무엇이 일어날 만한 법에 의하여 일어난다 함인가? 無明에 의하여 일어나는 까닭에 일어날 만한 법에 의하여 일어난다 함이니라.
무엇이 無明에 의하여 일어남인가? 「나(我)」라는 소견이 일어남을 무명에 의하여 일어남이라 하느니라.
무엇이 「나(我)」라는 소견이 일어남인가? 여기 한 사람이 있어 생각하기를, 「나는 있다. 나의 것이 있다. 나는 모년 모월 모시에 태어났으니, 나를 낳아 준 부모의 이름은 갑과 을이고,내 이름은 갑을이니, 동네 사람들이 다 나를 불러 '갑을아!'라고 부른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을 자며, 밥을 먹고 소화시킨다. 공부를 하여 기억한 것들이 다 내 머리속에 있어 '이것은 콩이고 저것은 팥이다'라고 잘 분별하고, 아침과 저녁으로 적당히 운동을 하여 건강하고, 하늘을 섬기기를 내가 번 것의 십분의 일을 신에게 아낌없이 바치면서까지 복을 구하며, 다른 미물들의 위에 우뚝 서서 70 내지 80의 수를 누리다가 마침내 하늘나라로 갈 것이 분명하니, 이것이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나(我)」라는 소견이 일어난 사람이며 무명에 놓인 사람이라 하느니라.
수자타야, 이 몸은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오장육부의 몸과 그리고 정신(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일 이 중 어느 하나에라도 진정한 '나(我)' 가 있다면 그것은 '나(我)'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자타야, 눈이나 몸이 「나(我)」이겠느냐?
수자타 : 그렇습니다. 눈이나 몸은 「나(我)」입니다. 눈이 「나(我)」이므로 나는 보고 이것은 노란색이다 저것은 빨간색이다고 아는 것입니다. 몸이 「나(我)」이므로 나는 가고 오며, 부딪칩니다.
유 마 : 아니다 수자타야. 눈이 「나(我)」가 아니다. 나(我)」가 아니므로 나의 눈도 아니다. 몸이 「나(我)」가 아니다. 나(我)」가 아니므로 나의 몸도 아니다. 만일 눈이나 몸이「나(我)」라면 이제 막 죽은 사람에게도 눈과 몸은 손상되지 않고 있지만 어찌 하여 눈은 보지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를 못하느냐? 죽으면 없어 지는 것을 가지고 「나(我)」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수자타 : 그렇다고 한다면 육체를 통하여 영혼이 보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육체는 나고 죽지만 그 속에 영생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영혼이야말로 진정한 '나(我)'가 아니겠습니까?
유 마 : 영혼이 만일 「나」라면 왜 영혼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고?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영혼이 아니라 육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하거니와 어떤 것이 보고 어떤 것이 움직이는 것이냐?
육체의 눈이 본다거나 몸이 움직인다고 하면 영혼 없이 육체의 눈이 보고 몸이 움직인다 함이니 네가 주장하는 그 영혼은 어디 갔느냐? 설마 하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고, 움직일 때는 숨어 있다가 죽을 때에만 영생하기 위하여 나타난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육체를 통하여 영혼이 본다고 한다면 눈병 난 사람이 사물을 보기 위하여 눈에는 안경을 쓰는데, 그러면 영혼이 안경을 쓰는 것인가 육체가 안경을 쓰는 것인가? 몸이 늙어 지팡이를 짚는데 그러면 영혼이 지팡이를 집는가 육체가 지팡이를 짚는가?
영혼이 안경을 쓴다거나 혹은 영혼이 지팡이를 짚는 다면 본래는 안경이나 지팡이를 안 쓰던 영혼이 나중에는 안경이나 지팡이를 쓰게 되었다는 말이니 이 두 가변 된 영혼(안경을 안 쓰는 영혼과 안경을 쓰는 영혼) 중에 진실로 나라 할만한 영혼, 영생을 얻어야 할 영혼은 어느 것이겠는가?
너는 분명히 말하라. 만일 두 영혼이 있다면 구원은 하나인데 구원 받을 영혼은 둘이겠구나. 어떤 미혹한 사람들은 말하기를, 「천당에 가기만 하면 다 영으로 존재 하므로 생로병사가 문제가 안 된다」고 하지만, 이 말은 「만일 영생하기만 하면 생로병사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함과 같으니, 이 도대체 무슨 말이 겠는고! 우습다 하기 보다 실로 가련할 따름이니라.
영혼이 아니라 만일 육체가 안경을 쓴다고 한다면 보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이리니 육체가 그럭저럭 70년이면 잘 간다 하는데, 그 70을 대충 10년 씩으로 만 나누어도 7개의 육체인데, 그 중 어느 육체가 진정으로 나라 할 만하겠는가? 10대 때의 육체가 「나(我)」인가 20대,30대,40대,50대,60대,70대 때의 육체가 「나(我)」인가? 만일 이 모두 가 다 「나(我)」라 한다면 구원은 하나인데 구원 받을 몸은 일곱씩이나 되겠구나. 수자타야, 제일 나중 육체라고는 말하지 말라. 천당이나 지옥이 다 노인정이 될까 걱정되노라.
수자타야, 이것은 「나」라는 것이 필시 있다고 하는 소견에서 비롯되는 망상들에 가해지는 비난들이니라.
수자타야, 「나(我)」라는 것은 없느니라. 「나(我)」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我)」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요, 태어나지 않으므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더러운 것도 아니요, 더러운 것이 아니므로 깨끗한 것도 아니요, 증가하는 것도 아니요, 증가하는 것이 아니므로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 그런 고로 나의 몸, 나의 영혼, 나의 무명(無明), 나의 즐거움, 나의 괴로움, 나의 생각, 나의 삶, 나의 죽음 등등... 「나(我)」를 전제로 하여 파악되는 '나(我)의 것'은 모조리 없느니라.
「나(我)」라는 것은 고정불변하여 결정코 있기 때문에 「나(我)」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태어났다 늙었다 병들었다 죽었다 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없나니, 보았다 못 보았다 하는 것을 나의 눈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니라. 귀, 코, 입, 몸. 생각도 마찬가지이니, 늘 변하는 가운데 있을 뿐이요, 죽으면 바로 그 작용과 형상이 없어지는 것이 「나(我)」라면 누가 이 나를 영생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또한 만일 고정 불변하여 결정 코 「나(我)」라는 것이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부서지지 않는, 없어지지 않는 영생의 「나(我)」일 것이니 무엇 하러 따로 하늘에다 대고 「나(我)」의 영생을 의탁한단 말이냐?
만일 그런 「나(我)」가 있다면,「나의 것」들도 있다고 할 만 하나니, ,「나(我)」의 몸, 나의 영혼, 나의 즐거움, 나의 괴로움, 나의 삶, 나의 죽음 등등이 한번 생기면 결정 코 없어지지 말아야 비로소 나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수자타야,「한번 생기면(창조된다고 하면)」반드시 없어지나니,없어지는 것은 「나(我)」가 아니니라.'나의 몸'은 태어났다 죽는 것이요,나의 영혼은 달처럼 찼다가 이지러 지는 것이요,나의 즐거움은 아침과 저녁으로 달리 하는 것이요,나의 괴로움은 하늘에 뜬 연과 같고,나의 삶과 죽음은 몸과 마음을 따라 부지런히 옮기 우는 것인즉 이 모두는 「나(我)」가 아니니라. 수자타야, 책상이 책상이냐?
수자타 : 그렇습니다. 책상은 책상입니다.
유 마 : 어떻게 하여 책상이 책상이냐?
수자타 : 책상이므로 책상이라 합니다.
유 마 : 네가 말하는 책상이 만일 책상이므로 책상이라 한다면 내가 지금 그 책상을 부숴 버린다면 그때도 책상이냐?
수자타 : 아닙니다. 책상이 부숴 지면 이젠 더 이상 책상이 아닙니다.
유 마 : 더 이상 책상이 아닐 수 있는 것을 책상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잠시 그렇게 이름 지어 부르는 것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이 견고할 것 같은 책상도 사실은 더 이상 책상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에 무한히 노출되어 있다면, 책상 자체에는 이미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고, 고정불변하는 개체로서의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상이 책상이므로 책상이라 한다면 그것은 잠시 그렇게 부르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느냐? 수자타야, 이 책상을 내가 부순다 하였지만, 사실은 저 스스로가 끊임없이 찰나도 그대로 있지 아니하고 분자적인 움직임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니라. 그런 까닭에 내가 부수지 않고 그냥 두어도 언젠가는 저 스스로가 허물어 질 것이 아니겠느냐? 만일 허물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한 책상이니 따로 영원하라고 기원할 필요도 없는 것이리라.
그러나 염려하여 말하거니와, 만일 변하고 있는 중에 있는 것을 고정불변한 영원성이 있는 「나(我)」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我)」가 아닌 그림자로서의 「나'일 것이니라. 왜냐하면 「나(我)는 영원하여 변하지 않는 그 어떤 것을「나(我)」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는 다이아몬드도, 그것을 품고있는 하늘의 별들도 언젠가는 제 수명을 다하여 도로 허공에 흩어지고 말 터인데 하물며, 70년을 기약으로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이 몸을 「나(我)」라 함이겠는가? 많은 삿된 소견이 여기에서 나오나니, 사실은「나(我)」를 섬기면서 감히 하늘을 빙자하고 있는 것 뿐이니라.
즉,「나(我)」의 영생을 위하여 하늘을 존재케 하는 짓이니라. 이는 가히「나(我)」를 섬기는 우상종교라 할만 하느니라. 밖의 황금 송아지상은 부수어 없애기라도 하련마는 이 「나(我)」의 우상은 부수기도 어려우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어찌하면 좋을꼬!!!
수자타 : 그렇지만 유마님. 여기 지금 유마님께 질문 하는 저는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고 코로는 맡고 입으로는 말하며 몸으로는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는 생각하는 이 수자타는 분명히 있습니다. 「나(我)」는 착한 일을 하여 천당에 가고 「나(我)」는 악한 일을 하여 지옥에 갑니다. 「나(我)」가 없다면 누가 이렇게 질문하고 대답을 하며 누가 착한 일을 하고 또한 악한 일을 합니까?
유 마 : 수자타야, 내가 이 책상을 부순다 해도 네게 책상이 라는 개념이 있는 한 너는 언제든지 다시 저 책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상과 저 책상이 같은 것이냐?
수자타 :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제가 다시 똑 같은 책상을 만들어 쓴다 해도 같은 책상은 아닙니다.
유 마 : 너에게 말하리라. 만일 너에게 「나」 라는 소견(개념)이 있는 한 너는 언제든지 다시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면서도 결코 똑 같은 「나(我)」라는 자신을 만날 수는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 때 마다 항상 말하리라. 이것은 「나(我)」라고... 마치 방금 한 너의 질문과 같이...
아아! 부처님께서 「이 법은 만나기도 힘들고, 만났어도 받아 지니기가 힘들고, 받아 지녔어도 믿기가 힘들며, 믿고서도 행하기가 힘들다」 하셨더니 과연 틀린 말씀이 아니로다!
수자타야, 이는 다 너의 無明으로 인한 전도망상(顚倒妄想)으로 하는 소견이니라. 내 그런 까닭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많은 삿된 소견이 여기에서 나온다고…
앞에서 제행무상을 말할 때에 저 지옥이나 천당도 알고 보면 다 이 마음이 만들어 내었으므로, 이 마음이 변함에 따라 덩달아 변한다고 하였느니라. 수자타야, 너는 그렇게 돌려 말하지 말고 차라리 이「나」가 없으면 어떤 것이 영생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 인가고 염려함이라고 말하여라. 나가 없다면 누가 나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된다고 말하여라. 말하거니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도리는 너를 삿 된 소견에서 파생되는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라 하는 것인데, 도리어 무상과 무아에 붙잡히는 구나.
수자타야, 앞에서 내가 부서진 책상과 다시 만든 책상이 같은것인가 다른것인가 물었을 때에 너는 이 책상과 저 책상이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느니라. 어찌하여 또 다시 같은 질문을 하게 하느뇨?
착한 일을 한 「나(我)」와 그 일로 인하여 천당에 간 「나(我)」가 마치 이 책상과 저 책상과 같은 것인 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착한 일을 한 「나(我)」가 부서져서 천당 간 「나(我)」가 만들어 졌느니라. 저 천당 간 「나(我)」가 부서지면 다시 또 다른 「나(我)」가 만들어지리니,「나(我)」라는 소견을 가진 한(책상이라는 개념이 너에게 있는 한),이러한 운동은 우주가 마르고 닳도록 끝없이 펼쳐지느니라.
수자타 : 無明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 마 : 도시 캄캄한 마음을 일러 무명이라 하느니라. 무엇을 일러 도시 캄캄한 마음이라 하는가? 「나(我)」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을 도시 캄캄한 마음이라 하느니라. 네가 한번 가만히 눈을 감아 보아라. 그리고 가정하여 보아라. 이제 다시는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보아라. 아마도 그 캄캄함에서 마침내 「나(我)는 답답하고 무섭다!」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무명이란 그렇게 「나(我)를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니라. 그러나 네가 눈만 뜨면 그런 공포심에서 문득 벗어나리니,그 때에도 「나(我)」는 답답하고 무섭다!)의 「나(我)」에서 「이제 도로 다 보이니 안심이다! )하는 「나(我)」 로 전이(轉移)된 것일 뿐이니라. 전자를 불구인 「나(我) 」라 하고 후자를 구족(具足)한 「나(我)」라 하는 차이일 뿐,무명은 늘 이 둘 사이를 오가면서 결정코 「나(我)」라는 것을 일으키게 하느니라.
한번 일어나면 이를 일러 전도망상이라 하나니, 한번 망상이 일어나면 열두가지의 이런 저런 망상이 뒤이어 끊임없이 일어남이 마치 A가 B를 낳고 B가 C를 낳고 C가 D를 낳고 D가 E를 낳고 등 등 등 ... 한쪽에서는 낳고 한쪽에서는 죽는 일이 끊임없이 펼쳐지느니라. 이런 까닭에 저 종교에서는 계보를 쫙 펼쳐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하는데 까지 이르는 것이니, 다 이「나(我)의 위치확인 작업이니라. 그렇게 하여야 영생 받을 「나(我)」의 위치가 설정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거기에는(「나)라는 소견에는) 허다한 삿 된 소견들이 나올 뿐, 마치 원숭이가 원숭이를 낳고, 또 그 원숭이가 원숭이를 낳음과 같으니라.
수자타야, 사람이 이러한 무명에 놓일 필요가 없음에도 놓이게 되는 것이 분하다 할 만한 것이니라. 이 奮心(분심)이 너와 나를 분발하게 하여 마침내는 열두 개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그래 봤자 본전뿐이지만 말이다. ^^
수자타 : 유마님, 만일 그 「나(我))가 정녕코 없다면 무엇이 따로 윤회를 한답니까? 윤회한다면 윤회의 주체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윤회는 한다면서 천당 가는 영혼 따위는 없다고 하신다면 똑같은 말을 한쪽을 위해서만 쓰이는 것 같아 부당합니다.
유 마 : 이 책상과 저 책상이 같은 것이 아니다. 책상을 더 이상 만들지 말자꾸나. 책상을 더 이상 만들지 않으면 책상을 더 만들어야 하는 수고로움에서 벗어나리니 곧 열반(니르바나) 이니라.
수자타 :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유 마 : 콜록콜록... (유마가 다시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하여 대화를 계속 할 수가 없어졌다. 수자타는 일어나 유마를 부축하고 안으로 들어가 따뜻하게 차 한잔을 끓여 드리고 유마의 집을 나섰다)
수자타 : ( '이상하네... 왜 꼭 열반문제만 나오면 기침이 따라서 나올까??' ) 그 때 유마가 뒤에서 문을 열며 왜소하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유 마 : 아참, 수자타야, 무상과 무아는 잘 챙겼느냐? 잊어버리지 말고 가져가거라!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셨지마는 부처님이 만드신 것은 아니니라. 그저 발견자라면 또 모를까....
수자타 : 네 유마님, 걱정 마세요. 부처님이 창조주가 아니 란 것은 저두 알고 있으니까요. 안녕히 몸 건강히 계세요. 유마! 또 올께요.
유 마 : 그려 그려,,, 에구. .콜록콜록… 기침하는 놈이 「나(我))인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