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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停年)’이란 그동안 재직하던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나이를 일컫는다. 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저자가 자신이 정년퇴직 하던 해 수업했던 강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엮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과목의 이름이 ‘한국고전문학사’였기에, 자연스럽게 책의 제목이 <한국고전문학사 강의‘가 된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 책은 ’고전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닌, 저자만의 강의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론 누군가 이 책을 동일한 과목의 교재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책의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서 저자 자신만의 개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같은 제목의 강의를 여러 해 하고 있지만, 이 책을 참고할 수는 있을지언정 수업 교재로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저자와 내가 바라보는 문학사의 관점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뚜렷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2021년 1학기에 정년을 앞두고 마지막 강의를 진행했으며, 당시의 상황으로 비대면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침 주변에서 ‘정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학부 강의를 녹음’하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녹음과 풀어쓰기 그리고 저자의 꼼꼼한 교정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하겠다. 32회의 강의로 이뤄진 결과물이기에 그 내용 또한 적지 않고, 그로 인해 이 책은 3권의 분량으로 엮어졌다고 한다. 저자는 그동안 이 과목의 강의에서 교과서적인 지식을 나열하기보다 ‘문학사의 긴요한 문제와 의제를 툭툭 던져 가며 도발적으로 지적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수업에서는 강의의 내용과 토론이 진지하게 진행되었겠지만, 저자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전체 3권 가운데 첫 번째인 이 책의 내용은 ‘문학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문학사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과 저자가 생각하는 내용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건국신화와 광개토왕 비문’이란 제목으로, 단군신화는 물론 고대 국가의 건국신화를 조망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문학사에서 주요 자료로 활용되지 않던 고구려의 광개토왕 비문을 적극적으로 인용하여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향가와 최치원에 대해 각각의 항목을 설정하여 다루고, 신라 말과 고려 초를 뜻하는 ‘나말여초’에 창작되고 기록된 다양한 서사물들을 ‘소설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15세기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초기작으로 다루던 기존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소설의 성립’을 8세기 무렵까지 끌어올리고 그 이유를 논증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문학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개성적인 면모는 우리말 문학과 한문학을 ‘토풍(土風)’과 ‘화풍(華風)’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토풍’이 우리말로 이뤄진 문학을 의미한다면, ‘화풍’은 중화(中華) 곧 중국의 언어에 기반한 한문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계기는 고려 광종 때 실시된 과거제도이며, 그로 인해 관직에 진출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시와 한문을 짓는 훈련을 어려서부터 해야만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제도가 실시된 이후 귀족 계층이 세습하며 관직을 독점하던 관행은 사라졌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문학을 기본적인 소양으로 공부하던 모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렇듯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의 대립은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관점이 저자의 문학사를 바라보는 인식에 굳게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귀족들의 행패와 무인들의 대응으로 인해 벌어진 고려시대의 무신란과 무신정권, 걸출한 문인으로 평가되는 이규보와 그의 문학 세계, 삼국시대를 토풍의 관점에서 해석했다고 여겨지는 <삼국유사> 등의 주제가 각각의 항목으로 서술되고 있다. 고려시대 토풍을 대변할 수 있는 고려가요를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고 있으며, 조선의 건국을 주도했던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형성과 그 문학’에 대해 1권의 마지막에서 다루고 있다. 문학사를 문학 작품과 작가들을 시대별로 나열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저자가 생각하는 시대 의식의 관점에서 주제별로 제시하여 깊이 있게 정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문학사의 흐름을 적절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향가와 고려가요 그리고 고려 말의 시가문학에 대해서는 기존의 문학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아마도 저자가 한문학과 소설 분야에 대해 오랫동안 집중하여 연구했고, 시가 분야의 연구 경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탓이 아닌가 여겨졌다. 특히 이러한 점은 2권과 3권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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