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備邊司) = [최고회의 기구]
비국(備局). 주사(籌司). 묘당(廟堂)이라고도 했다.
1. 설치
가. 중종(1510) : 삼포왜란을 계기로 임시기구로 설치
나. 명종(1555) :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됨
2. 기능의 확대
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문·무 최고기구로 확대
나. 임진왜란 기간 중 국방, 외교, 내정 등 국정 전반을 담당하는 기구로 변화
3. 구성
가. 당상관(=정3품) 이상의 전·현직 고관이 참여
나. 3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 판서, 군영대장, 관찰사, 대제학 참여
4. 결과
가. 의정부와 6조 기능이 유명무실화됨
다. 왕권의 약화 초래
5. 폐지
조선 후기에 비변사는 국정 전반을 총괄했는데, 공신집단·당파·외척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이들이 비변사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국정전반을 주도했기 때문에 의정부·6조·도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1801년 이후로는 노론 1당독재와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등 외척세력이 극대화되고, 이들이 비변사의 요직을 겸대하면서 국정을 자기들 멋대로 결정했다. 이는 통치질서의 문란을 가중시키고 매관매직의 성행, 가렴주구, 삼정문란, 민란 발생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전제왕권의 재정립을 지향했던 흥선대원군은 고종 1년 1864년 의정부와 비변사의 사무한계를 규정하여 의정부의 국무총괄기능을 회복시키고, 비변사는 외교·국방·치안관계만을 관장하게 했다가 고종 2년 1865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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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備邊司)는 조선 중기 이후의 행정 관청이다. 비국(備局)·주사(籌司)・묘당(廟堂)이라고도 한다. 비변사는 왜란과 호란 이후 의정부의 기능을 실질적으로 대신하였고 이런 이유로 묘당(廟堂)이라 불리기도 했다.
1. 배경
조선 초기부터 정치체제는 정무와 군무를 구분하여 문·무의 관직을 분명히 하고 무관은 정무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무는 민정·군정 모두 의정부가 맡아 다스리고 2품 이상의 문관이 회의하여 결정 사항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성종 때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계속되자 문관만으로는 정확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여 변경(邊境)의 사정에 밝은 종2품 이상의 무관도 참석하게 하여 문관과 군사 방략을 협의하도록 하였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이라 하였다.
2. 설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도체찰사(導體察使)가 설치되고 다시 병조(兵曹) 안에 1사(司)를 두어, 종사관(從事官)에게 그 사무를 맡기면서 비변사라 칭하게 되었다. 당시의 비변사는 자체로는 아무 권한도 가지지 못하였으며 단지 병조의 3사 이외에 1사를 임시로 설치한 데 불과하였고, 설치 및 폐지도 도체찰사의 임명·해임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뒤 변경 등에서 외침이 있을 때마다 편성되었던 임시 관청이었으며, 일반 관제상의 관청은 아니었다.
3. 변천
1554년(명종 9) 정규 관청으로 독자적인 합의기관이 되었고, 이듬해 청사(廳舍)가 설치되어 도제조·제조·낭청이 정하여졌다. 비변사의 권한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크게 강화되어 일반 행정도 물론 정치·경제·외교·문화 등 국내의 일반 행정도 모두 협의·결정하게 되어 의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다. 임진왜란 때부터 의정부(전직 정승 포함)와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이 비변사의 관직을 겸하였으며, 각 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등 국가의 중요한 관원이 비변사에 참여하였다. 그에 따라 사실상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여 행정, 국방, 인사 등이 처리되었으므로, 지나치게 확대된 기능으로 인해 존폐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비변사 기능의 확대·강화는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행정체제를 문란하게 만든다는 인식으로 1864년(고종 1) 의정부와 비변사의 업무 한계를 규정하여 외교·국방·치안 관계를 제외한 모든 사무를 의정부에 이관하였고 이듬해 비변사는 폐지되었다.
4. 관제
비변사의 관제는 《속대전》에 따르면, 도제조는 정 1품으로서 현직 및 전직의 의정(議政)이 겸임, 제조는 종 2품 이상으로 일정한 정원은 없었으나 이·호·예·병·형조의 판서, 훈련대장·어영대장·개성유수·강화유수·대제학이 보통 겸임하였다. 제조 중 4명은 유사당상(有司堂上), 8명은 팔도구관당상(八道句管堂上)을 겸임하였으며, 부제조는 정3품으로 정원은 1명, 낭청은 종 6품으로 정원은 12명이었다. 그 뒤 《대전통편》에서 금위대장(禁衛大將)·수어사(守禦使)·총융사(摠戎使)는 제조를 겸직하도록 새로운 규정을 세웠다. 비변사에서 논의된 중요 사항을 기록한 《비변사등록》이 전하고 있다.
5. 기타
비변사 등록은 조선 중기, 후기의 국가최고회의기관이었던 비변사(備邊司)의 활동에 대한 일기체 기록으로 273책의 필사본으로 되어 있다. 원본은 1년에 한 권씩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사건이 많을 때는 두 권 또는 세 권으로 나누어 작성하였다.
비변사가 설치된 1510년(중종 5)에서 1555년(명종 10)까지 45년 동안 임시 기구로 존재할 당시의 등록 작성 여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명종 10년에 국가 상설기구로 확정된 때부터는 등록이 작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다른 기록과 함께 모두 소실되어 왜란 후 1616년(광해군 8)까지, 즉 전후 합계 62년간의 등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617년(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276년간의 등록 273책만이 남아 있다.
1865년(고종 2)에 비변사가 의정부에 흡수된 이후에는 의정부 안에 비변사와 같은 조직을 두고 기록을 계속하였다. 때문에 1862년(철종 13)부터 1892년까지의 기록이 이전의 <비변사등록>과 같은 체재로 작성되어 남아 있다.
고종 2년 이후의 것은 원본 표지에 ‘의정부상(議政府上)’ 또는 ‘정부상(政府上)’이라 쓰여져 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해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이라는 명칭이 적합하겠지만, 그 체제가 철종 이전의 것과 똑같아 일반적으로 이것도 <비변사등록>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비변사등록>은 1617년부터 1892년까지의 총 276년 분이 남아 있어야 하나, 중간에 없어진 부분이 많이 있다. 276년 중 54년간의 등록이 없어졌다.
비변사는 설치 당시 변방의 군무에 대비한다는 목적으로 국방 문제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확대, 강화되어 국방, 외교 및 국정 전반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는 최고의 국정의결기관으로 변하였다. 그에 따라 <비변사등록>도 국정 전반에 관한 기본적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승정원일기> 및 <일성록(日省錄)>과 같이 조선 후기의 제1차 사료가 된다. 특히 실록을 편찬할 때 <비변사등록>을 기본 자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는 조선왕조실록보다도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비변사등록>에는 제도어염수세정수절목(諸道魚鹽收稅定數節目), 호조주전절목(戶曹鑄錢節目), 공장응행절목(工匠應行節目) 등 사회, 경제 문제와 관계 있는 사목(事目), 절목(節目), 별단(別單) 등이 무려 250여 종이나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사회 경제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도 인정되고 있다.
비변사등록은 비변사에서 회의가 있을 때마다 낭청(郎廳, 郎官)이 입회해서 매일 매일의 회의 상황과 그 의결 상황을 직접 기록하였다. 때문에 원본은 단 한 질뿐이며, 낭청이 직접 붓으로 쓴 필사본으로 되어 있다. 한 질뿐인 원본은 현재 규장각도서에 있다. 한편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59년부터 1960년에 걸쳐 해서(楷書)로 옮겨 쓴 뒤, 구두점을 찍어 영인본 28책으로 출판하였다.
[조선후기 비변사의 변화]
조선후기 비변사의 강화는 영조 연간 정치구조 변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 연간이 되면 비변사는 의정부를 제치고 최고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기구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탕평파 대신들과 군문대장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영조의 의중과도 부합되어 더욱 촉진되었다. 예컨대 영조 23년과 영조 30년에는 총융사와 금위대장이 비변사 제조에 참여하게 되었고, 영조 30년의 송파장 폐지문제에서 보이듯이 탕평파 대신들의 의견이 더욱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는 비변사가 정책 수립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인데. 특히 팔도구관당상제(八道句管堂上制)의 실시로 드러난다.
팔도구관당상제는 이제까지의 감사를 통한 지방 수령의 통제를 좀더 강화한 방식이었다. 수령들이 세력가와의 연결을 도모하여 감사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면서, 이권이 막대한 대읍과 비옥한 읍을 선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도구관당상제는 비변사가 중심이 되어 지방을 지배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이 제도는 숙종 39년(1713)부터 실시되었다. 각 도의 상문(狀聞)과 문보(文報)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하여 팔도에 구관당상을 각각 한 사람씩 차정하고 다시 유사당상 네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2도를 관장하게 하는 체제였다.
이 제도는 영조 7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비변사 당상 8인에게 각각 8도의 진휼을 담당하게 한 데서 출발하여 계속 군역 이정을 비변사에 담당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비변사가 8도를 구관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중앙정부의 지방지배력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각 지역 수령을 팔도구관당상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감사 중심의 지방 통치체계와 함께 지방에 대한 이중적인 통제장치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후 비변사는 지방 수령의 의천권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도 했다. 원래는 중요한 지역과 변방의 감사, 병사, 수령의 감사 및 6진과 강변읍(江邊邑)의 수령 역시 비변사에서 의천함으로써 결국 탕평파 재상들이 관료집단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비변사 권한을 강화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조 연간 재상권과 군문의 강화이래 계속 강화되었던 비변사의 위상은 정조 때 재상권 아래 어느 정도 통제되는 조처가 취해졌다. 비변사의 결정사항을 의정대신이 다시 의(議)를 붙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관행이 강화되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영조 연간과는 달리 외척의 정치간여 배제와 학문 정치론 등 기본적 정치의리에 투철한 세력을 중용한다는 원칙이 지켜졌다는 점도 중요하다
정치구조면에서 세도 정치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비변사이다. 16세기에 임시기구로 설치된 비변사는 그 직임이 늘어나고 정치적 기능이 덧붙여져 19세기 전반기에는 명실상부한 국가의 최고 관부가 되어 있었다. 비변사는 군사, 국가재정, 주요 관직의 인사, 지방 행정 등에 대해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청으로부터 보고되는 사안에 대해 논의하여 처리 방침을 결정하고 그것을 국왕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방침이 결정된 각종 사안은 다시 행정 실무 기관인 각급 관청에 내려져 시행되었다. 따라서 비변사를 장악한 정치세력은 사실상 통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참고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1999, 한국사32
▪ 이재철, 2001, 조선후기비변사연구, 집문당
▪ 한국역사연구회편, 1990, 조선정치사 상․하, 청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