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제 중 두 개 이상 역사문화해설을 작성하여 제출하세요.
Ⅰ. 주제
1. 신석기 혁명
2. 고인돌
3.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
4. 고대의 고분
5. 분묘와 왕릉(5-1 동구릉. 5-2 서오릉)
6. 불교 건축
7. 宮闕(궁궐) (7-1경복궁. 7-2덕수궁)
8. 서원과 향교(8-1서원. 8-2 향교)
9. 城郭(성곽)(9-1 수원화성. 9-2 남한산성)
10. 石造美術(석조미술)
11. 역사인물(11-1 을지문덕. 11-2 연개소문. 11-3 계백. 11-4 김춘추. 11-5 장보고. 11-6 견훤. 11-7 왕건. 11-8 서희. 11-9 세종대왕. 11-10 이황과 이이. 11-11 신사임당. 11-12 이순신. 11-13 대원군.)
12. 임당동성당
13. 오죽헌
14. 경포대
15. 단오절
16. 굴산사지
17. 강릉향교
18. 대관령 성황당 및 산신각
19. 명주군왕릉
20. 강릉비석군
21. 오봉서원
22. 보현사 대웅전
23. 강릉선교장
24. 금강산성
25. 강릉보현사
26. 관노가면극
Ⅱ. 내용
A4 10 포인트 2매 이상
Ⅲ. 작성 방법
자신이 강의하거나 해설한다고 했을 때 각 내용에 대한 해설
Ⅳ. 제출기한
~2021.6.18까지
Ⅴ. 제출방법
전자우편 alsace21@daum.net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
1. 정의
강릉 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묘.
2. 소재
강원 강릉시 성산면 삼왕길 204-39
강원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680(구지번)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285(디지털강릉문화대전)
3. 명칭 유래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5대 손으로 알려진 김주원이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封)해졌기 때문에 왕릉이라고 한다. 신라 38대 선덕왕(宣德王)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신하들은 왕족 중에 김주원을 택하여 왕위에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침 경주에 내린 큰 비로 강을 건너지 못해 김주원은 회의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다. 신하들은 “하늘이 비를 내려 김주원을 이 회에 참석치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이 김주원을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함이니 다른 사람을 뽑자.”고 하여 김경신(金敬京:元聖王)을 즉위케 하였다. 38대 원성왕은 왕위에 오른 후 김주원을 강릉에 보내 명주, 삼척, 울진, 평해 등 영동지방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주고 명주군왕에 봉하였다고 한다.
가. 왕릉(王陵. royal tomb)
⑴ 왕릉(王陵. royal tomb)
임금(王)의 무덤(陵).
⑵ 신라의 왕릉
① 소재 : 경순왕릉(연천군)외 모두 경주시 분포
② 유형
형식 | 왕릉 |
1. 봉토(封土)만 있고 둘레돌(護石)이 없는 형식 | 오릉(五陵: 1대 혁거세왕릉과 왕비 알영부인릉, 2대 남해왕릉, 3대 유리왕릉, 5대 파사왕릉. 사적 제172호), 4대 탈해왕릉, 6대 지마왕릉, 7대 일성왕릉, 8대 아달라왕릉, 13대 미추왕릉, 17대 내물왕릉,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26대 진평왕릉, 32대 효소왕릉, 43대 희강왕릉, 45대 신무왕릉, 46대 문성왕릉, 52대 효공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55대 경애왕릉 |
2. 봉토 밑에 자연석을 장치한 형식 | 23대 법흥왕릉, 27대 선덕왕릉, 29대 무열왕릉, 47대 헌안왕릉 |
3. 봉토 밑에 가공석으로 석축 둘레돌(護石)을 돌리고 가공장판석(長板石)을 받쳐 놓은 형식 | 31대 신문왕릉, 44대 민애왕릉, 49대 헌강왕릉, 50대 정강왕릉 |
4. 능 앞에 능비(陵碑)만을 세우 형식 | 29대 무열왕릉 |
5. 봉토 밑에 장판석(長板石)으로 둘레돌(護石)을 쌓고 탱주(撐柱)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양각한 형식 | 28대 진덕왕릉, 35대 경덕왕릉, 41대 헌덕왕릉 |
6. 봉토 밑에 장판석(長板石)으로 둘레돌(護石)을 쌓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석사자(石獅子)・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석화표(石華表)・능비(陵碑) 등 의표물(儀表物)을 거의 완비한 형식 | 33대 성덕왕릉, 괘릉(掛陵, 38대 원성왕릉), 42대 흥덕왕릉 |
문무왕릉: 동해의 대왕암(大王巖)에 수장
나. 식읍(食邑)과 녹읍(祿邑)
⑴ 식읍(食邑)과 녹읍(祿邑)
식읍(食邑)은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지급한 토지와 가호이다. 고구려에서는 주로 외적 격퇴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해당 지역을 식읍으로 주었음이 확인된다. 신라의 경우에는 금관국의 구형왕이 항복하자 그 지역을 그의 식읍으로 내린 예가 있으며 후백제(900~936)의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하자 935년 큰아들 신검(神劍)은 금강을 죽이고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하였다, 견훤은 감사가 소홀한 틈에 도주하여 왕건에게 귀의하자 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로 모시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녹읍(祿邑)이란 관직을 수행한 대가로 녹(祿)을 지급하기 위해 읍(邑)을 내리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신라가 주변 지역을 복속시키고 유력 세력을 귀족층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녹읍을 받은 관리는 녹읍으로 받은 지역에서 조세를 거둘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곡물만 거둘 수 있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특산물이나 노동력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⑵ 신라 시대의 녹읍(祿邑), 식읍(食邑)
① 녹읍(祿邑), 식읍(食邑)
귀족은 자신의 녹읍에 가신을 보내 수취했으며 지방관이 이를 감독했다.
② 녹읍(祿邑)의 혁파와 부활
관료전 지급(신문왕 7년 687년) | 신문왕 7년 687년 5월 관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
녹읍 폐지(신문왕 9년 689년) | 신문왕 9년 689년 1월 내외관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세조(歲租)로서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
정전 지급(성덕왕 21년 722년) | 성덕왕 21년 722년 8월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
녹읍 부활(경덕왕 16년 757년) | 경덕왕 16년 757년 3워 내외 월봉(관료전과 세조)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지급하였다. |
국학생 녹읍 지급(소성왕 원년 799년) | 소성왕 원년 799년년 3월 청주 거노현을 학생들의 녹읍으로 삼았다. |
4. 위치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삼왕동의 북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김주원의 묘소는 한때 실전(失傳)하였다가 김주원의 후손인 김첨경(金添慶)이 조선 명종(明宗) 때에 강릉부사로 와서 찾아냈다고 한다.
임영지(臨瀛誌)
강원도 강릉의 역사와 인문지리 행정 등을 엮은 읍지로 조선 영조때인 1750년대 또는 정조 12년 1788년에 저술된 것으로 저자를 알 수 없으나 서문에 ‘동호노인(東湖老人)’이라 하고 「부선생안제명서」에 ‘동호거사(東湖居士)’로 되어 있을 뿐이나「부선생안(府先生案)」을 근거로 보면 강릉부사인 맹지대(孟至大)로 추측된다. 3책으로 구성된 필사본이고, 크기는 세로 38.4㎝, 가로 26.47㎝이다. 원래는 전(前), 후(後) 그리고 속지(續誌) 등 다섯 권으로 구성되었으나 지금은 세 권만 전한다. 강원도 강릉시 소재 오죽헌, 시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5. 현황
현재의 묘역은 봉분 아랫 부분에는 긴 사각형의 둘레돌을 두른 묘 2기(전:왕릉, 후:왕비릉)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묘 앞에는 "명주군왕 김주원묘(溟州郡王金周元墓)"라고 새긴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동물 석상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동네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와 재실(齋室)이 각각 있다. 1971년 12월 16일에 강원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가. 석물(石物, 儀物) : 묘역에 설치된 석조물
文人石, 武人石, 長明燈, 望柱石, 床石, 魂遊石, 香爐石, 鼓石, 羊石, 虎石, 馬石 등이 있는데 김주원묘에는
⑴ 망주석(望柱石)
무덤 앞에 세우는 1쌍의 돌기둥.망두석·망주석표·화표주라고도 하며 망주는 준말이다
⑵ 문인석(文人石)
왕이나 사대부의 권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로써 무인석(武人石)과 함께 각각 한 쌍씩 마주 보고 세우는데 단지 무덤의 수호자하고 무덤의 주인(피장자)에게 경건히 참배하는 듯한 의미도 담고 있다
⑶ 동물 석상(動物石像)
羊石, 虎石, 馬石 등
나. 신도비(神道碑)
무덤의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碑
다. 재실(齋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시조나 중시조의 묘소 또는 사당 근처에 세운 건물
6. 김헌창과 김법문
가. 김헌창의 난
제41대 헌덕왕 13년 882년 3월 웅천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은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무역왕계의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웅주(熊州, 공주)에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고 대규모의 난을 일으켜 한때 무진주(武珍州, 광주), 완산주(完山州, 전주), 청주(菁州, 진주), 사벌주(沙伐州, 상주)등이 호응했으나 실패했다.
나. 범문의 난
헌덕왕 16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다시 한산(한산, 서울)에 도움을 정하고 반란을 계속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신라 하대의 왕위쟁탈전
사건 | 내용 |
대공(大恭)의 난. 36대 혜공왕 4년 768년) | 수도 및 5道 주군(州郡)의 전국 96명 각간(角干)이 서로 싸워 김대공이 피살되고 대란으로 확대되어 3년간 계속되었다. |
김지정반란(36대 혜공왕 16년 780년)과 37대 선덕왕 즉위 |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이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혜공왕이 살해되어 김양상이 내물마립간 10대손으로서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였다. |
38대 원성왕(785년) 즉위 | 내물마립간 12대손 김경신이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하였다. |
39대 소성왕(昭聖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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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애장왕(哀莊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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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헌덕왕(憲德王) | 김헌창(金憲昌)의 난(헌덕왕 14년 822년)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웅주(공주)를 근거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겼으나 실패하였다. 범문(梵文)의 난(헌덕왕 17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한산(서울)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
42대 흥덕왕(興德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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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희강왕(僖康王, 836~838년) | 흥덕왕의 사후 4촌동생 균정(均貞)과 조카 제륭(悌隆)이 싸워 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 |
4대 민애왕(閔哀王, 838~839년) | 6촌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민애왕으로 즉위 |
45대 신무왕(神武王, 839~839년) |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민애왕을 축출하고 신무왕으로 즉위 |
46대 문성왕(文聖王) | 8년 846년 장보고난(張保皐難) |
47대 헌안왕(憲安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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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대 경문왕(景文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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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헌강왕(憲康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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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정강왕(定康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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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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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