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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자본>을 통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기본적으로 상품이 전일화된 사회이며, 노동자들 또한 상품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을 가지고 임금을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형태이다. 여기서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이다. 즉, 노동자가 파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며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4시간 일을 하고 나머지 4시간의 일을 더 함으로써 보다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노동f력을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구분하고 필요노동에서 발생하는 가치 부분을 잉여가치라고 규정한다. 그는 8시간 노동일=4시간 필요노동(임금)+4시간의 잉여노동(잉여가치)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논증한다.
첫째, 자본의 축적은 근원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비밀은 잉여가치에 있다. 사용자의 자산의 축적은 결국 이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를 혼자서 독식함으로써 창출된다는 것이다. 둘째, 잉여가치는 곧 계급투쟁이다. 예를 들어 1억을 투자한 자본가는 1억+잉여가치를 만들어낸다. 이때 잉여가치의 배분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 간의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 이 투쟁은 중단될 수 없다. 아울러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잉여가치를 최대한 크게 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데 이것이 과학기술혁명과 같은 생산력의 발전이다. 셋째, 잉여가치는 결국 자본의 가치로 귀속되며 이 부의 축적이 부의 양극화와 더불어 노동자, 민중의 상대적인 빈곤과 절대적인 빈곤을 낳는다. 자본의 초기투자량이 많으면 잉여가치의 양이 더 커지고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잉여가치의 양이 커지기 때문에 자본의 힘은 더욱 거대해진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삼성그룹을 보듯이 자본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다. 현재 세계 상위 20%의 부유층은 세계 총 생산의 86%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하위층 20%는 단지 1%만을 가지고 있다. 세계 3대 부자의 재산은 최빈국 48개국의 국내총생산보다 많으며, 또한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저개발국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약 15억명의 인구가 절대적인 빈곤의 상태에 빠져 있다. 넷째, 이와 더불어 자본의 모순과 한계도 더욱 전면적을 떠오른다. 이것은 자본의 한계와 모순의 극점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이윤과 잉여가치를 구분하는데 이윤은 전체 자본에 대해 증식된 가치이며 잉여가치는 임금부분, 즉 가치를 증식하는 부분에 대해 증식된 가치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자기 파괴적인 운동을 생성해 낼 것이라고 보았다. 자본의 내재적인 순환 법칙, 즉 공황에 의한 폭력적인 자기 파괴는 이런 자본의 한계치가 '폭력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본을 넘어서는 힘과 동력은 자본의 폭력, 즉 공황시기에 전개되는 노동자 해고와 실업율의 증가 등에 의해 배제되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계급투쟁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자본의 한계가 유발하는 폭력이 대부분 민중에게 전가되고 그들의 생존권을 파괴한다는 측면에서 숙명처럼 이를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사회로의 변혁적 실천을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과학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대부분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이기성에 근거한 계산과 그에 따른 행위들로 조직된 사회이다. 경쟁에서는 시장경쟁이, 정치에서는 '일인일표'와 '다수결 원칙'이 적용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국가는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하는 선거를 통해서 구성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선거도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선거를 치루기 위해 정당들은 선거자금을 모아야 하는데 정치가들은 기업으로부터 이를 모금한다. 돈을 많이 낸 사람은 당연히 이에 따른 영향력을 행사하며 각종 경제적 혜택을 누린다. 따라서 자본가는 소수이고 노동자와 민중은 다수이지만 항상 정치적인 결정들은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게다가 노동자와 민중들은 각종 신문과 TV, 라디오 등에서 자신의 입장을 선전할 수 없는 반면 돈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들은 신문사, 방송사의 기업주이거나 광고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돈으로 독자적인 선전이나 광고를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적인 권력관계는 정치적 권력관계에서도 힘의 불균형과 독점을 낳는다.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힘을 가진 자본가는 사회적으로도 권력과 권위를 독점한다. 각종 사회 단체나 사회기관들에서 자본가들은 대부분 이사이거나 창립자이다. 그리고 각종 연구기관들이나 대학에서 자본가들은 돈을 기부하거나 자기 자신이 설립자 또는 이사가 됨으로써 권력을 장악한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도층 인사들'이며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임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불평등한 관계, 부의 양극화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계속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은 권력화의 최종적인 응축 지점에 국가가 있다.
국가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인 이해를 '공공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가는 실제로 이와 같은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 '공공의 이익' 또한 자본주의 생산 방식을 선전하는 것으로만 나타난다. 국가는 만성적인 실업과 불안정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능력을 키우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경쟁을 하라고 부추킨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다수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권력 장치일 뿐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의 위기는 경제적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경쟁력 강화, 사유화, 탈규제화, 노동의 유연성, 국가 간섭의 축소, 자본 시장의 우선 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세계화'의 구호 속에서 한국 사회는 시장경제력 혹은 시장경쟁력만이 강조되고 있다. IMF구제금융 도입시 '경제 소생을 위한 구조조정' 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삶의 질은 도외시되고 있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구조조정이었는가' 라는 문제 제기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즉 노동시장에서 퇴출당한 노동자에 대한 문제이다. 바로 여기에서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드러난다. 인간이 중심에 선 노동구조가 아니라 행위의 주체인 인간은 어느 사이에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사회, 마르크스가 이미 이야기했던 '인간의 물상화'와 맥을 같이 하는 현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노동시장에서도 파레토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소위 20 대 80의 사회로 지칭되는 부의 분배구조하에서 노동의 공급자시장에서도 겨우 20%만이 안정된 고용과 임금을 통해 복지와 소비를 누릴 수 있게 되고, 나머지 80%는 이러한 모든 혜택에서 배제되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노동시장의 고용형태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이다. 그리고 현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는 경쟁사회의 논리대로만 치닫는 사회적 분위기에 있다. 즉, 우리는 비인격적인 사물이나 관계가 인간을 지배하고 경쟁으로 내모는 물적 강제가 팽배한 사회 구조에 놓여있다. 인간이 빠지고 소외된 물적, 경쟁적 사회구조에 내몰려 있는 것이다. 어느 사회구조이건 인간이 제외되고 소외된 사회는, 제외되고 소외된 다수의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이의 타파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현실화될 때, 혁명과 같은 변혁을 맞이한다. 따라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행의 사회적 체제, 구조가 이를 수용하고 개선하고자 하는 인간중심의 사회 구조로의 회귀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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