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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여 하나님이 살리실 수밖에 없는 죽은 흙
본문 : 행 5장 30-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아멘.
제가 5장을 지금 단어 하나, 하나를 다 풀어드리고, 풀고 있는데 오늘은 이, 다른 건 다 했어요, 그죠? 다 했고 오늘은 30절에 있는 하나님이 살리셨다, 하는 고 부분을 제가 설명해드릴라 그래요. 사람들이 이제 우리 교회에 처음 오면 설교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면서 새가족반을 오래오래 해가지고 기본적인 교리부분을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건의사항들을 많이 하시는데 그분들은 새벽기도에 오시면 그런 개념들에 대해서 잘 배울 수 있으실 텐데 그걸 어떻게 이, 많은 걸 어떻게 새가족반에서 다 합니까? 새가족반 하다가 은퇴하게. 그 전 설교들을 좀 주의 깊에 들으시면은 될 텐데. 그런 수고도 안 하려고 하는 거 같애요.
오늘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살펴볼 텐데요. 사도가 사도행전 2장에서도 우리가 봤지만 오순절 날 설교 때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강조하여 얘기를 하고 사도행전 17장이나 여러 곳에 가면 사도바울이나 많은 사도들도 예수님의 부활, 살아나심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를 합니다. 그게 왜 그렇게 설교 때마다 강조되어야하는 걸까요? 여러분. 부활이라는 게 왜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됩니까? 왜 설교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이 돼야 되는 거죠? 물론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설교가 그 설교 전체를 다 기록한 거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가, 성경의 유일한 독자인 교회가 꼭 알아야 할 것들, 그것들을 설교의 내용에는 반드시 이 설교가 들어가야 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설교의 전부가 바로 이거다, 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설교들을 기록해놓은 것인데 그 때마다 부활의 이야기가 꼭 들어가 있어요.
여러분 부활이라는 게 뭐죠? 죽었다가 살아나는 건가요? 나사로도 부활한 겁니까? 나사로는 부활한 게 아니에요. 도르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한 거 아니에요 죽었다가 살아난 걸 소생이라고 해요. 부활이라는 건 죽었다가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아야 부활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먼저 난 자가 됐다고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 그러니까 먼저 난 자. 이제 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 자가 되는 거예요. 새로운 생명으로 영생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걸 우리가 부활이라고 그러죠?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부활한다, 라는 것을 우리가 왜 그렇게 숙지를 하고 있어야 되는가?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잔 말이죠. 이 역사와 공간이라는 게 도대체 왜 생긴 건가? 어차피 우리는 이 역사와 공간이 이제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영원한 것으로. 그러니까 이 왜곡되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역사와 공간은 이제 다 (?)버릴 거라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연속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전혀 무관한, 이 세상과 전혀 무관한 그런 세상이 따로 마련이 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역사와 공간이 다른 차원의 완벽하게 완성된 상태로 차원을 달리하여 존재하는 걸 천국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우주 저편에 이렇게 마련되어 있는 게 아니라요 역사와 공간이 지금 3차원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어요. 이거는 그냥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역사이며 공간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차원, 다른 차원의 공간적인 개념이 있는 그런 곳이에요.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사는 이들이 살아야 되기 때문에. 거기에 공간이 없으면 안 되고 거기에는 이 세상의 시간과 다른, 다른 시간대인 영원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시간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굳이 우리가 갖고 있는 제한된 언어를 빌려서 쓴다면 ‘하나님의 시간대’에요. 영원이라는 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이 되어 있는 상태죠.
그래서 거기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넘나드는 게 아니라 그런 개념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이 세대에 오가는 천재들이 조금씩 눈치를 채서 공상과학 영화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건데요. 시간을 넘나든다는 건 우리가 지금 이 세상 속에서도 잘 생각해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도대체 지금 수천 년 후에 사는 우리가 무슨 시간적으로 보면 엄청난 갭이 있단 말입니다. 근데 그 아담과 하와의 그 행위가 우리에게 전가가 된다는 건 내가 지금 영원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시간이 통합된 영원이라는 상태로 뛰어올라 과거로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내가 먹은 겁니다, 다시.
그러니까 성도는, 원죄를 유일하게 인정하는 성도는 영원을 사는 존재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그걸 인정한다는 건 내가 지금 영원 속으로 뛰어올라 이 여기로 갔다는 거예요, 선악과, 에덴동산으로. 그리고 이천 년 전에 선 예수님의 십자가, 그게 어떻게 나에게 적용이 됩니까? 내가 영원으로 뛰어올라 십자가에 같이 예수님과 달려 죽은 거예요. 내가 어떻게 부활을 소망해요? 미래에 있을 그 부활을 영원 속으로 뛰어올라 가서 동참하는 거예요, 내가. 그러니까 이 땅을 사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전부 이 땅에서 지금 영원을 사는 거예요. 이해가 가세요? 그 영원을 사는 생명을 뭐라 그래요? 영생이라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영생을 사는 거다, 아니다. 사는 거예요. 근데 무슨 영생이 이따위 영생이 다 있냐? 굉장히 행복하고 기쁘고 좋은 것일 줄 알았는데 야, 이때까지 고난의 연속이, 이게 영생이냐? 그럼 나 안 살래. 아니요, 이 그러한 영생, 믿음으로 사는 영생에서 이제 타락과 왜곡과 썩어짐이 싹 빠져나간 거기를 천국이라 그래요.
지금은 여러분이 좀 이렇게 조금 현대 개혁주의가 만들어놓은 그런 신학의 틀에서 한 단계 좀 더 올라섰으면 좋겠는데. 현대개혁주의 신학, 그러니까 웨스터민스터를 설파한 멘신이나 이런 사람들이 싹 그 틀로 만들어놓은, 스트럭쳐로 만들어놓은 신학 교리의 틀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는데 인간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지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하나님께서 너무 분노를 하셔가지고 이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구원에 대한 약속을 언약을 함께 주셨다. 함께 주셨고, 그리고 이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그들을 구원해내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창세전에 이미 준비를 하셨고, 왜?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시니까. 그리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역사 속에서 하나, 하나 건져내고 계시는 과정이 바로 구속사다,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제가 왜 자꾸 개혁주의에 시비를 거냐면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전지전능하심이 저는 자꾸 흠이 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알지도 못하고 마귀라는 존재의 타락을 미리 감지하지도 못하고 그러면, 루시퍼라는 그런 뭐 소설책에 나오는 이름이지만 그걸 마치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인 것처럼 자꾸 쓰고 있는데 그 타락한 천사, 그 놈들을 타락할 줄 모르고 만들어놨는데 어이구야, 엉겁결에 그냥 얘가 타락을 하는 바람에 인간까지도 타락을 하고 그리고 이 역사가 이렇게 엉크러졌다, 라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왜곡하는 거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지전능이라는 건 Omniscience, Omnipotent,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하실 수 있는 분이에요. 그분이, 그분은 영원을 사시는 분이라 그랬죠?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의 개념이 없는 곳에서 모든 과거 현재 미래를 평면으로 바라보실 수 있어요. 그런데 미래의 어느 날 사단이 그 천사가 천사장이 타락을 할 걸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렇다면 무슨 의도가 있으셔서 하나님이 그런 타락 같은 걸 당신의 작정 속에 이미 계획하신 거예요. 하나님은 계획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걸 다 하실 수 있고 아시기 때문에. 당신이 뭔가를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께는 손해가 있을 수 없지만 우리 측에서, 우리의 이 제한된 이성으로 판단할 때. 손해를 보더라도 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걸 계획하시는 거예요. 작정 속에 넣어두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중에 우리가 요한계시록으로 한번 가보잔 말에요.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그 사탄과 마귀의 개념이 어느 한 순간에 유황불 못으로 뚝 떨어져요.
그러면, 왜 이 역사와 인생, 이 공간을 한동안 그에게 맡기시냔 말에요. 왜 그에게 맡기시냐고요. 그냥 그때 바로 그냥 후 불어버리면 됐잖아요. 신앙생활이라는 건 여러분 생각을 하는 거예요.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들을 해보시란 말이죠. 그리고 인간을 왜 굳이 타락한 인간들을 이렇게 긴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건지시는 방법을 쓰냐고요. 싹 쓸어버리고 새로 만들면 되잖아요? 이제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새로 만들면 되잖아요?
네, 맞아요. 바로 하나님께서 지금 절대 타락할 수 없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고 계시는 거예요. 근데 그걸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 번에 싹 쓸어버리고 그렇게 만드시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역사과 인생을 통하여 뭔가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성과 인격을 소유한 채 다시는 하나님의 말을 어기면 안 되겠구나, 라는 걸 배우게 하는 게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그냥 죽은 흙이었던, 우리는 티끌이었잖아요. 그죠? 아담이라는 거 자체가, 인간이라는 단어지만 아다마라는 단어는 티끌이에요. 티끌 중에서도 그냥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티끌. 먼지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은 먼지에요. 하나님 앞에서. 먼지 같은 거예요. 실지로 하나님이 먼지를 모아서 사람을 만들었겠습니까? 이렇게 흙을 막 모으더니 그거를 주물럭주물럭해서 만드셨겠어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죽은 흙이었어요. 그냥 놔두면 그냥 죽은 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흙. 그 죽은 흙이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방불한 존재가 되어 영원 속 하나님 나라를 왕 노릇, 다스리며 살게 되었는지를 그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하늘 왕들이 이 땅에서 그 죽은 흙들이 토해 내놓는 배설물들과 토설 물들을 경험하면서 야, 죽은 흙들은 이런 것밖에 못 토해놓는 거구나. 그걸 내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이나 심지어 교회 교인들이나 내 직장 동료나 하여튼 그리고 뭐 오사마 빈 라덴이나 하여튼 전 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인물들과 이런 것들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영안, 눈을 뜬 자들이 이게 돼지우리구나? 이게 다 우리가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얻으려고 애쓰는 이 모든 세상의 힘과 가치가 다 돼지우리 속의 쥐엄 열매구나 이걸 깨닫게 해주시는 거죠. 이 세상 속에서.
그리고는 역사가 싹 종료될 때 그때가 바로 그냥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역사를 시간차를 두고 와서 그걸 다 배우고 다시는 우리가 선악과 따먹고 이런 돼지 같은 삶 살지 말자! 다 그렇게 배운 그때가 역사의 종결이에요. 그리고는 그 돼지우리 같은 더러움과 추악함이 싹 빠져버리고 진짜 아름다움과 진짜 기쁨과 진짜 행복과 위장된 행복 만들어진 기쁨, 이런 거 말고. 진짜 참 행복, 순수한 기쁨 순수한 아름다움만 남은 그러한 나라가 된단 말에요.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 천국이 역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와 오버랩이 된다고 쉽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리고 여기에서 이게 들어오면서 더럽고 추악한 오염된 게 싹 빠져버린. 그래서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문화나 문명을 다 무시하시면 안 돼요. 제가 어저께 꽃나무를 몇 개 사다가 꽃을 심는데요 땅 속을 파니까, 제가 사는 동네는 돌산에다가 마을 지어갖고요 이 땅 파는 게 이게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ㅎ. 어, 손이다 떨렸어요, 제가. 오랜만에. 땅을 파다보니까 바위가 말이죠, 그 땅 속에. 그걸 어떻게 파고 집들을 지었는지 참 너무 대견스럽더라고요, 그 건설업자들이. ㅎ. 지진이 나도 안 무너질 거 같애요, 그 동네는. 땅 속에 알지 못하는, 제가 정말 감히 상상도 못했던 수많은 생명체가 있어요. 근데 그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뭣들을 하고 있어요. 근데 제가 보기엔 전혀 쓸모없는 짓들인 거 같아요. 바구미들도 있고 지렁이들은 왜 이렇게 많아요? 그냥 근데 그 자리들에 가만히 있어요. 제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그 안에 정말 득시글, 득시글 있었더라고요. 근데 그것들이 만약에 뭐 먹이사슬, 이런 거 다 차치하고. 그런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았을 때 이 꽃나무가 심겨져서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 라는 거를 여러분이 꼭 아셔야 돼요.
그러니까 걔네들은요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무가치하고 전혀 뭐 쓸데없는 짓, 쓸데없는 곳에서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거 다 필요로 사용하시면서 그 자리에 놔두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심으려고 꽃나무를 뽑았더니요 그 뿌리들이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어요. 그 뿌리 하나하나에 생장성들이 다 있다는 게, 그 생물시간에 그 오래전에 배웠던, 그게 다 있다고 생각하니까 얘네들이 이 자리를 뚫고 내려갈 거라고요. 그리고 꽃 몽우리를 보는데 세상에 그렇게 귀엽고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진다는 게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의 창조물들이에요, 다.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기기묘묘해요. 그건 하나님이 그렇게 다 만드신 거거든요. 그러니까 진짜 의학을 깊이 연구한, 시로도들 말고 진짜 의학자들은 하나님 앞에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 어떻게 이런 거 까지 이렇게 관심을 두고 세밀하게 만드셨을까? 에 대해서 깜짝 놀란대요. 음악, 미술 마찬가지에요.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그죠? 저는 무용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제가 대학교 때는 거의 주말에는 현대무용 공연장에 가서 그냥 앉아 있었어요. 그러한 인간의 몸짓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그런 어떤 예술 같은 건 전혀 무시하시면 안 돼요. 여러분이 천국 가면 그런 모든 아름다움이 다 있습니다. 왜? 자연계가 있는 곳에는 문화가 없을 수가 없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자연 모든 이 천지 만물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린다고 얘길 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교회가, 제가 주일날에도 설명해드렸지만 교회는 개별적인 선택을 받는 게 아니라 집단적인 에클레시아, 하나의 무리로 그러니까 한 무리가 밖으로, 에크가 아웃이거든요. 밖으로 건져내는 게 교회거든요. 그러니까 교회 자체는 하나의 집단성을 갖고 있어야 돼요. 개별성을 추구하면 안 된단 말에요, 그래서. 교회는 개별적으로 착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교회는 집단적으로 창세전에 구원받았다고요. 그런데 교회가 자꾸 개별성을 추구하면서 착한 자, 악한 자를 자꾸 구별하는 게 개혁주의란 말에요. 지금요. 그냥 착하게 살자,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자, 이게 된단 말에요. 그거 말고 교회는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를 배워야 되는데 말이죠. 그걸 그 지평까지 못 들어가고 있단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 교회를 이 땅에다가 이렇게 각 시간차를 넘어, 시간차를 두어 이 땅에 두신 건 바로 그런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보는 자들, 그들이 진짜 세상 속에 존재한다, 라는 걸 세상과 지금 구별해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천국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전혀 왜곡됨과 더러움과 그리고 거기에 섞여진 죄나 이런 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누릴 거예요. 제가 요즘 최영미라는 사람의 어느 화가의 위험한 시선이라는 책을 보는데요 반 그림이에요. 그림을 얼마나 세밀하게 사진으로 찍어놨는지 그냥 직접 제가 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시인의 평을 달았는데요. 어떻게 인간이 이런 그림을 그리나? 저는 너무 신기해요. 그 그림들이 너무 아름다운데 그것들이요 인간의 욕심이나 그리고 자기 자랑이나 인기를 위해 사용될 때 그 아름다움이 추악하게 되는 거예요. 음악도 마찬가지에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냥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좋은 음악 들으면 너무너무 기쁘잖아요. 그리고 예전의 나의 그 아름답던 추억을 음악이 징검다리가 되어 금방 (?)돼요.
그러니까 그런 아름다움들이 다 우리의 욕심이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숭배, 자기 가치 챙기기, 자기 착함 챙기기 이런 거에 쓰이니까 이게 자꾸 남을 두들겨 패고 아니면 자기를 부수곤 하는 이런 엉뚱한 도구로 쓰여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나쁜 게 하나도 없다, 라는 게 그런 말인 거예요.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게 되면 그걸 나의 인기나 자랑을 위해, 그리고 나의 쾌락과 나의 만족으로 가는 길에 사용하는 걸 지양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럼 그게 진짜 내 것, 아름다움이 되는 거예요. 선하고 착한 것이 되는 거예요. 깨끗한 것이 되는 거예요, 그때에. 근데 그런 것들을 전부 누리고 사는 그러한 천구, 거기에서 영원을 살아요. 근데 그 영원을 사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져요. 근데 하나님의 생명이 뭐냐면, 우리가 완전히 비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성품, 이런 것들이 부어지는 거예요. 그때에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이 갖고 계신 게 우리 안에 부어지고 우리에게서 발휘될 때 하나님이 누리는 안식 행복 기쁨 평안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갖게 되는 거니까. 그게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성도라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고 가야할 일이 뭐겠어요? 비우기. 그리고 이 더러움과 썩어짐에 의해 종노릇 하고 있는 세상을, 여기에 치를 떨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야, 하나님, 하나님 아니면 나라는 존재로부터 시작해갖고 이 세상은 그냥 좀비들의 세상에 불과한 거구나! 왜냐하면 죄와 허물로 죽은 거거든요.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건 세상 자체가 지금 죽은 흙들의 세상이란 뜻이에요. 그리고 그나마 거기에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부어져서 이나마 유지되고 있는 건 당신의 백성들이 이 땅에 몇 명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기 때문에. 소담과 고모라가 의인 한 명만 있어도 멸망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그 엄청난 도시에 의한 다섯 명이 없었어요. 아니, 많이 잡아 열 명도 없었다니까요. 하나님은 그들만을 보는 거예요. 나중에 그들을 거기에서 확 빼내는 날 거기가 다 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다 타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뭘 하고 있어야 돼요?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삶을 살아야 돼요. 그 말은 자기에 대해서 자꾸 실망해야 돼요. 왜? 육신을 입었으니까, 나는. 나에 대해서 자꾸 실망을 하고 세상에 대해서 자꾸 정이 떨어져야 돼요. 여러분이 여러분이 원하는 이 세상 것들을 자꾸 얻어내고 또 여러분 것들을 여러분이 성취하고 싶은 것들을 성취해내면서 세상에 대해서 자꾸 야, 이거 참 살만한 세상이다, 너무너무 행복하다, 나는. 그런 걸 얻어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잘못 오셨어요. 그런 건 이슬람이나 뭐 여호와의 증인이나 불교나 그런 데서 주는 거거든요. 자기 가치 챙기기. 아니,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가 자랑이 되는 사람을 사셔야 돼요. 그러기 위해선 자꾸 세상이 살맛이 안 나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의 삶 속에 야, 내 삶에 요거만, 요 정도만, 요거만 제자리에 있어 줬으면 나는 참 행복했을 텐데 아 왜 하필 조게 고장 났지? 내 인생에서? 왜 내 인생에서 요거, 요게 부족하지? 요거만 있으면 내가 참 괜찮은 삶을 살았을 텐데. (?)하는 삶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거 있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혭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눈을 팔지 않을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걸 나에게 허락하셨을까? 거기에 울분을 토하시면 안 돼요. 그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그 선물을 받고 자꾸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러한 부족한 거, 이러한 더러운 거 이런 게 싹 사라져버린 진짜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그 부활의 몸, 전혀 이제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슬픔과 눈물이 없는 부활의 몸을 나에게 허락하셨다는 그걸 믿음으로 붙들면서 이 세상에서 하늘의 행복을,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여러분이 느끼는 감정으로는 그게 불행한 것일 수도 있고 고통스러울 수 있어요. 그걸 없애주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요. 그 속에서 그 고통과 기쁨 속에서 마치 변태처럼 그걸 뚫고 들어오는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행복이 있어요, 그게 소망이라는 거예요. 신앙생활은 그거 하는 거예요.
뭐 번드르르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고 뭐 나의 소유를 털어 불쌍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이러면서 자기 가치 챙기기 하는 거 그런 게, 그런 게 성도의 삶 아니라니까요. 있으면 잘 누리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좋은 데 많이 애들하고 놀러 다니세요. 그런 거 갖고. 아니 그런 게 기독교 신앙의 목적지라면 법정이나 성철 같은 사람이 최고죠? 짚신 한 짝, 고무신 한 짝, 장삼 하나밖에 안 가지고 살았어요, 평생. 그리고 자기가 만든 책 인세 이런 거 다 남들 갖다 주고 다 그렇게 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천국 갔겠어요? 예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행하는 모든 착한 일은 다 자기 가치 챙기기에요. 자기 착함 챙기기에요. 그걸 성경이 자기 의라고 한다니까요. 괜찮아요. 그렇게 살아보니까 좀 손해를 보는 것 같은데 남들이 다 칭찬해주니까 괜찮아요. 살 수 있어요, 그 정도는요. 아무나. 노래하는 제 김 장훈이라는 동생이 있는데 걔는 수십억을 뭐 수십억을 기부를 했는데. 그리고 사람들이 김장훈을 대통령으로! 뭐 예전에 걔가 우리 집에서 한 이년 살았거든요. 걔는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 원래. 사람들이 칭찬해주니까요. 그게 자기가 그 돈을 모으고 쌓고 해서 자기가 세상 것을 누리면서 오는 행복보다 더 커요. 그래서 거기에 중독이 됐어요. 그렇게 기부하면서 뭐 월세 산다고? 아니에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으로 다 하고 남아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은 그러한 가치 챙기기와 자기 착함 챙기기, 자기 영광 챙기기로 얼마든지 자기가 하나님 자리 올라갈 수 있어요. 세상은 그걸 착하도, 선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은 그걸 악함이라고 이야기해요.
여러분은 세상에서 그런 일을 많이 하다가 가는 게 아닙니다. 물론 성령이 내 안에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사는지 한번 보여줘라, 하고 특별한 임무를 맡긴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삶을 우리가 바래야죠, 추구해야죠. 그렇게 살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왜? 내 안에 성령이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을 부리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거니까. 다 열심을 부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많이 실패한단 말입니다. 진짜 진정으로 내가 이런 일을 내 진심으로 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거 아니라는 거 폭로시켜버려요.
제가 대학 때 그 청춘을 불사르며 진짜 놀러, 하루도 놀러 가지 못하고 신림동에 가서 야학을 했어요. 그것도 정신지체아들을 가르쳤는데 그것도 우리 돈 대갖고. 나중에 진짜 하나님이 그거 확 까발리시는데 니가 정말 얘들을 사랑하니? 물어보시더라고요. 근데 저는 팔년 동안요 그것 때문에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이 세상에 참 보기 드문 청년이 나왔다고 그러고요. 저랑 같이 그 교회 친구들. 그 후배들이 거기 그 야학을 했던 후배들이 다 그런 칭찬을 받았어요. 니네들은 어떻게 저 대학시절에 산꼭대기 야학을 하면서 다 보내냐고. 근데요 여러분 우리가 그 시간이 나가서 뭐 미팅을 하고 이런 것 보다요 오늘 쾌감이 더 커요. 그리고 마치 내가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있는 존재가 된 것 같이 착각이 들더라니 까요. 그러니까요 갑자기 여기에서 더 한 발짝 가서 데모도 하게 되고요 감옥에도 가게 되고. 갔더니 거기에서도 제가 굉장히 의로운 일을 하다가 온 사람처럼 제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칭찬을 해주고 있더라고요. 감옥 안에서. 여러분 그게 마귑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은 흙이 아니라 내가 뭔가 이렇게 열심히 해내서 그래도 다른 이들 보다는, 난 저 세리와 같지 않아서 참 감사합니다, 이러고.
예수님이 바로 이 독사새끼야! 그랬잖아요? 여러분 그게 독사에요, 그게 마귀란 말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 게 뭐 있어요? 저는 불의 토색 간음 안 했고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요 그걸로 전부 구제했고요 십일조 꼬박꼬박 냈습니다. 그랬어요, 그 사람이. 이게 지금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거 아닙니까? 불의를 행하지 말자. 간음하지 말자. 토색하지 말자, 이거 욕심 부리지 말자, 에요. 어떻게 욕심을 안 부려요. ㅎㅎ. 지는 그걸 했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네? 그리고 나는 열심히 기도했고 열심히 금식했고 열심히 구제했습니다. 열심히 십일조 했습니다. 이거 다 건강하고 건전한 교회, 건전한 목사들이 추구하는 거 아닙니까? 이거? 근데 왜 예수님이 걔한테 독사새끼라고 그러느냐고요? 그걸로 자기 자랑 챙긴 거예요. 왜? 저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그가 한 모든 행위가 독사의 행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종교행위 열심히 하고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십일조 많이 하고 그걸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참 종교행위를 잘하고 있어, 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독삽니다. 그거 잘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을 괜찮은 사람으로 지금 점수를 주고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교인들한테도 너무 열심 부리지 말라는 거예요. 말씀 앞에 진지해지되 은혜를 근거로 하지 않은 열심,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습관 되어버리면 여러분 나중에는 진짜 마약중독자 보다 더 지저분하고 더러운 중독자 되는 거예요. 종교행위 중독자.
제가 우리 집 아이들하고 매주 두 번씩 가정 예배 드렸어요. 그리고 여기서 설교하는 것처럼 똑같이 설교했습니다, 애들한테. 죽죠, 애들이. 한 오 분 지나면 막 비비꼬이면서 막 벽에다 머리 박고. ㅎㅎ. 언제 끝나나,,. 엉? 나중에 보니까 가만 있어보자. 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진짜 아는 건가? 그리고 얘들이 (?) 다면 이러지 않을 텐데. 모르는 거예요. 근데 그 상태에서 종교인은, 건강한 종교인은 이런 삶을 살아야 돼, 라는 걸 계속 주입을 시키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가정예배를 통해서 뭘 가르치겠다고 하여튼. 알아듣지도 못하는 걸 그냥 한국말로 ㅎㅎ. (?) 이런 거 말하는데 애들이 그게 뭐냐고 하는데 대답을 해줄 수도 없고. 여러분 보세요. 제가 말씀드렸듯이 이 땅에서 성도가 하고 가는 일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드는 자로 만들어져 가는 거예요. 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일주일에 아빠한테 두 번씩 앉아서 두 시간씩 드리는 가정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마음에도 없는 기도하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아버지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여 공부를 하여 늘 A만 받아와요.
그리고 그 반대의 그림을 한번 그려보죠. 집에 가면 애들이 그냥 게임이나 하고 있고 겨우 하는 건 숙제. 그리고 지 방도 치우지도 않고 그냥 화장실에 가보면 이건 도대체 이게 화장실인지 공중 화장실인지 가정 화장실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그게 지금 저희 집의 현실이에요. ㅎㅎ. 그 전엔 안 그랬었는데, 전자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확 풀어버렸어요. 왜냐하면, 저희 집엔 TV가 없고 인터넷도 없었어요. 제가 대학시절 그렇게 살았거든요. 신문도 안 보고 TV도 안 보고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런데 보세요, 여러분. 제가 어느 날 생각하는데 우리 아이가 집에 갔더니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어요. weekday 에는 게임을 하지 말라고 제가 얘기 했는데 계속 게임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잘 이렇게 비교를 해봤어요. 우리 아이가 지금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는 것과 지금 아빠가 들어왔는데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과 하나님 앞에 어떤 게 선하게 보이실까? 생각해봤어요. 인간의 선악의 기준을 갖고 보면, 가치관, 인간의 가치관, 세계관의 그 세상적 세계관의 그 판단의 기준으로 보면 열심히 아빠 말 듣고 공부하고 있는 애가 착한 거예요, 그죠? 그러나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아빠와 함께 가정 예배드리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열심히 공부도 하고 세상으로부터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아이가 그래, 난 괜찮은 사람이야. 어려서부터 난 일주일에 두 번씩 가정 예배 드렸고 늘 기도를 하였더니 이 정도가 되었어. 아빠 말, 엄마 말 잘 들었더니 진짜 나중에 복이 터졌구나.
근데 하나님은 맨날 게임이나 하고 숙제나 겨우 해가고 학교에 가서도 지지부진하고 그냥 정신이 산만하다고 성적표에 받아온 평가죠. 애가 그냥 산만해갖고 학교 분위기를 다 망친다고. 그렇게 살다가 아,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진짜 내가 행복하고 내가 만족한 삶에 도달할 수 없는 삶이라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진짜 행복해지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런 많은 것들이 왜 이렇게 자꾸 부럽지? 성경에서 내가 배운 거는 저런 거는 부러워할 게 아니라 똥이라고 했는데. 일만 악의 근본이라 그랬거든요. 그리고 배설물이라 그랬어요, 사도바울은. 그 단어가 똥이란 단어에요. 그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이 자리에서 저기 부러울까?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원통해하다가 나중에 예수라는 십자가와 은혜를 발견하고 그걸 꼭 잡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어떠한 삶을 선이라고 평가하실까요?
여러분의 자녀가 꼭 책상 앞에 앉아갖고 열심히 공부하고 여러분 말을 잘 듣고 아이비리그에 들어가서 대단한 인물이 되는 게 하나님 앞에 착한 것입니까? 여러분 착함과 선함이라는 건 인간들이 지금 도덕과 윤리로 규정해놓은 거잖아요? 그거 말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착하게 여기실까? 를 생각해보시란 말에요. 하나님은 살인마 김대두를 착한 자로 받아들이세요. 평생 살인만 하다 갔는데. 도끼로 무고한 사람을 때려죽였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가 인간 세상의 부질없음, 덧없음을 배웠단 말입니다. 그럼 그게 선이에요. 그럼 그에게 맞아죽은 인간은 뭐냐? 그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다면 천국 간 거고 아니라면 죽은 흙이에요.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게 다 인본주의라니까. 이 모든 인간은 다 공평하게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존재라는 인본주의. 이게 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자들은 항상 피해 입은 누구를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죽은 흙이라니까요, 그게 다. 아니 죽은 흙을 똥 덩어리에 갖다가 집어넣든 불속에 넣어 태우든 그게 왜 불공평하냐고요? 그러니까 사회 정화니 사회 개혁이니 하는 이런 인간들이 놓치는 게 바로 그거에요. 모든 인간이 다 평등하고 다 존귀하다고. 어떻게 모든 인간이 다 존귀해요? 하나님이 택한, 창세전에 하나님이 택한 교회만 존귀해요. 그들만 구원할 거고 나머지는 죽은 흙이 어떠한 처지로 떨어질 뻔 했는가를 보여주는 지옥의 불쏘시개, 땔감이란 말입니다, 나머지는 다. 그러면 그들은 뭐냐? 그들이 뭐냐니요? 그냥 죽은 흙이라니까요.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는 반역과 타락을 하지 못하게, 이성과 인격을 가진 상태로 그런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영원한 지옥을 두시고 너희들이 원래 저런 죽은 흙이었어,를 가르치기 위해 영원한 지옥이 존재하는 것. 그걸 천국에서 볼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 내 자식이 들어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 같은 자식이 거기서 타고 있는데 그게 바로 내가 생명으로 여겼던 죽은 흙이었구나! 를 배우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상 속에서도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 관계에서 자꾸 벗어나는 버릇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내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내 생명이어야 돼요. 그래서 그때는 부활의 옷을 입고 우리가 그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다 벗게 되고 그것들이 지옥에서 다 불타고 있을 때 그래 저거 죽은 흙이었는데 내가 거기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구나!를 내가 인정하는 거예요. 근데 왜 거기에는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느냐고요. 돈이나 명예 이런 거는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지옥에 들어가서 타도된다고 내거인 내 자식은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거인 내 부모는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죠. 왜? 내거니까. 그게 나거든요. 여러분 그게 마귑니다. 그걸 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그러니까 기독교인이 때로는 이 세상에서 굉장히 차갑고 냉철하며 검을 든 자처럼 보이는 거예요. 검을 든 자처럼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나중에 천국 갔는데 진짜 여러분이 생명처럼 여겼던 여러분 가족이 지옥에서 불타고 있으면 어떡하실 거예요? 그러면 그게 무슨 천국입니까? 초상집이지. 근데 내가 예수 믿었다고 우리 가족이 다 예수 믿어요? 예? 아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지금 뭐 하고 오라는 거예요? 내가 왜 너희 가족 관계에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랑해야지. 객관적으로 보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죽도록 사랑해줘야 돼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내거로써가 아니라. 그 삶이 쉬워요?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난인 거예요. 선풍기 아줌마 얼굴 속으로 들어가서 살이 되고 피가 되어버린 콩기름 공업용유지. 그 더러운 것이 하나님의 메스에 의해서 잘려져 나가는 게 신앙생활이며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폭로되어 하나님 정말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의 근원인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쉽지 않아요. 그냥 여러분이 원하는 거 얻어내고 소원이나 이루고 이런 거는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거 아닙니까? 그냥 잘 배우세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잘 배우세요.
지난주에 우리 ㅇㅇ가 와가지고 애가 이제 두 달 됐다고. 아, 이뻐 죽겠다고 데리고 왔는데 밤에 자는 건 괜찮냐? 그랬더니 아, 진짜 시도 때도 없이 울어갖고 아주 미칠 거 같대요. 좋아 죽겠다 매? 아, 울 때는 아주 그냥 미칠 거 같대요. 여러분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당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몰라요. 왜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한 것인지 그런 상황 속에서 배우는 거예요. 배워, 잘 배워. 오죽하면 애기 보기가 Baby sitting 이겠냐? 깔고 앉고 싶은 마음을 그냥 꾹 참으면서 보는 거야. 그리고 이 타락한 인간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은 더럽고 추악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 보라고. 이뻐, 이뻐만 하지 말고 거기서 신앙인들이 해야 될 걸 하라고. 응? 베이비시터가 돼라. 너는 애기를 깔고 앉는 이로 폭로당하는 거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짐승이라는 걸 폭로당하는 거지 그리고 그걸 덮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배우는 거지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내 계획 세우고 내 소원을 이루고 내가 원하는 모든 환경을 다 갖추며 하나님을 그냥 조력자로 부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신앙생활 하는 거 아닙니다. 괜히 뭐 사회 정화니 개혁이니 이 지옥 세상을 더욱 더 살기 좋게 만들어서 좀비들을 더욱 더 행복하게 살게 해주겠다, 이런 거 하지 마시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세상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잘 배우세요. 그럼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세요. 그게 기독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도대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
우리가 무슨 영향력을 미쳐, 무슨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밝힙니까?
어떻게 세상에게 짠맛을 우리들이 줍니까?
하나님,
빛과 소금이신 그리고 그 언약의 주체로 오신 예수가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삶이며
바로 우리 안에서 정말 우리가 개, 돼지의 습성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폭로당하는 그런 삶이 바로 개, 돼지의 비유였거늘.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자꾸 나는 개, 돼지가 아니라 그들보다 훨씬 나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고
정말 나만이라도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밝히리라, 라는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마귀의 세상에 그들에게 밥 한 숟가락 더 퍼준다고 그게 어찌 하나님에게 선이 되겠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의 악함을, 이 세상의 추악함과 연약함을 하나님께서 알리시고 허락하신 그 환경을 내가 도와주어
인간의 도움으로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구나, 라는 것을 그들이 인식하게 하는 게 어찌 선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의 선, 하나님 나라의 참 된 것,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그것을 챙길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