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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는 아담한 초가집에서 살았다. 길옆에 나앉은 남향집인데, 동네에서 걸어서 이십여 분 떨어진 곳이었다. 사방에 담이라곤 없어서 길에서도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집은 부엌과 방 그리고 좁은 대청이 전부였다. 울도 담도 없으니 대청은 지나가는 사람이 걸터앉아 쉬어도 될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너무 깔끔하게 닦여 있어서 함부로 다가가서 걸터앉기가 거북했다.
방문 아래 댓돌 위에는 하얀 여자 코고무신이 놓였고, 방문과 부엌문은 늘 닫혀 있었다. 코고무신과 닫힌 방문은 마치 집의 그 무엇을 합심해서 지켜내기라도 하려는 듯 엄숙했다. 마당에는 누런색의 잡종 개 한 마리가 보였지만,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드는 바람에 코고무신과는 달리 소임을 다 못 하고 있었다.
집안에는 농기구 하나 보이지 않았고, 화단이 마당의 서쪽 모퉁이에 자리 잡았는데, 금방 손이 간 듯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이것이 여기가 사람 사는 집이라는 것을 가까스로 알려주었다. 가을이 되어도 마당에는 볏가리가 솟아있지도 않았고, 타작하느라 분주하지도 않았다. 집안에는 절간처럼 정적만 감돌았다.
집 맞은편에는 정미소가 있었다. 쌀 찧으러 정미소에 들른 사람들은 돌이네 집을 제집 드나들듯이 들어와, 우물에서 목을 축이곤 했다. 우물은 대청 곁에 있었는데, 담도 대문도 없으니 사람들의 드나드는 방향도 갖가지였다. 바로 우물 쪽으로 가도 되지만 방을 거쳐 우물로 오는 사람도 있었다. 우물에서 물을 마시던 중에 돌이가 눈에 띄기라도 하면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었다.
"니 아부지 와 있나!"
이 말을 들으면, 돌이는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다. 큰 방 댓돌 위에 검은 구두가 있는지를 보면 될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짓궂게 돌이를 보며 히죽이 웃곤 하였다. 그리고는 힐끗 방 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돌이는 집 앞에 나 있는 길을 따라 멀리 달아났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때까지.
초등학교 다니는 돌이와 나는 늘 같은 반이었다. 시골 학교는 한 학년에 남녀 각각 한 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돌이가 동네로 내려와서 아이들과 어울려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우르르 돌이네 집으로 올라가는 일은 더욱 없었다. 목소리도 여자아이처럼 카랑카랑해서 아이들이 놀렸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돌이는 늘 혼자였다. 다른 아이가 곁에 다가가면 수줍어했다. 말도 들릴 듯 말 듯 해서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다. 반 아이들은 돌이가 여자로 태어나려다가 남자가 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4학년이 되자, 나는 반에서 돌이의 유일한 동무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온 담임선생님은 새로운 교육 방법을 우리 반에 적용했다. 구구단을 못 외우는 아이들을 가려낸 다음, 공부 잘 하는 아이를 뽑아 일대일로 짝을 지었다. 그리고 구구단 못 외우는 아이를 공부 잘 하는 아이가 가르치게 했다.
돌이는 구구단을 못 외웠는데, 내 짝이 되었다. 돌이와 나는 수업을 마쳐도 집에 갈 수 없었다. 청소도 끝난 교실에 남아 구구단을 외어야 했다. 선생님이 공부한 것을 확인하러 교실에 올 때까지였다. 돌이는 5단까지는 잘 넘어갔는데, 6단에서 매번 더듬거렸다. 7단은 더 엉망이었다.
내가 돌이를 가르치는 방법은 회초리를 드는 것이었다. 틀릴 때마다 선생님이 교탁에 놓고 간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다.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돌이는 맞지 않으려고 손을 빼거나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그럴수록 화를 냈다. 나의 회초리질에 놀라 구구단을 더 못 외울 때도 있었다.
검사받을 때 돌이가 틀리면 나도 선생님으로부터 종아리를 맞았다. 어제도 막혔는데 오늘도 똑같으니 잘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 회초리 맞는 이유였다. 아파서 내 얼굴에 험악한 기운이 번지면, 돌이는 풀이 죽었다.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와 나는 구구단 때문에 원치 않은 한 몸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집으로 돌아간 한적한 신작로를 돌이와 나는 타박타박 걸었다. 돌이는, 내가 때려서 발갛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모른 척했다. 선생님에게서 맞은 내 종아리도 따끔거렸다. 기분이 언짢아 돌이를 노려봤다. 나는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내일 또 선생님으로부터 매 맞게 하면 가만 안 둔다고 겁을 주었다.
돌이는 그러는 나를 겁내지 않았다. 내 팔을 슬며시 잡으며 오히려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내가 좋다고 말했다. 집에서 늘 내 생각을 한다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공부를 못할 뿐만 아니라 게으른 돌이와 어울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구구단이 끝나자, 선생님이 이번에는 국어책을 들고 나왔다. 돌이는 국어책도 잘 읽지 못했다. 수업이 끝난 교실에 남아서 내가 선창을 하면 돌이는 따라 읽었다. 시작하기 전에 나는 꼭 어제 집에서 읽었는지를 확인했다.
"좀 읽어왔나!"
"못 읽었다!"
"와!"
"집에 손님이 왔다카이!"
나는 집에서 몇 번 읽어 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돌이는 번번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님이 왔다는 말도 거짓말이었다. 돌이 집에는 돌이 아버지가 가끔 드나들 뿐이었다. 화가 난 나는 돌이 옆구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돌이는 교실 문 쪽으로 달아났고, 나는 도망가는 돌이 뒤를 따라갔다.
돌이 아버지가 오는 날이면, 돌이는 책 한 번 펴지 않고 놀았다. 어쩌다 내가 돌이의 집에 가보면, 그는 마당에서 한 번도 짖어본 적이 없을 듯한 개와 놀거나, 어딘가를 집요하게 노려보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나를 보면 놀라 작은방으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내가 공부 하나 안 하나를 감시하러 온 줄을 얼른 알아차렸다. 내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서 돌아가지 않을 낌새를 보이면, 할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와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돌이를 감시하러 왔다가 돌이와 같이 놀 때가 있었다. 돌이 어머니의 시선이 어느새 내 등 뒤에 와 있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 시선에는 왠지 냉기가 흘렀다. 돌이 어머니가 돌이를 부르면, 우리는 가지고 놀던 구슬이나 딱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일어서곤 했다. 돌이 어머니는 집에 누가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성격이 까칠해 보였고, 장이라도 보러 가는 것처럼 머리와 옷이 늘 단정했다. 얼굴은 희고 맑았으며 미인이라고 소문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돌이 어머니를 '오끼'라고 불렀다. 일본강점기 때 바뀐 이름이라고 했는데, 어른이나 아이 모두 그렇게 불렀다. 본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향이 어딘지도 몰랐다.
돌이를 낳기 전, 돌이 어머니는 동네 주막에서 술을 팔았다. 주막은 차들이 오가는 신작로 옆에 있었는데, 부엌과 방이 각각 하나인 오두막집이었다. 주막을 키 낮은 토담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주막 안의 내밀한 사정을 다 가리기에는 모자랐다. 주막보다 국도가 더 높아서, 사실 토담은 무용지물이었다. 주막은 마치 속살이 내비치는 단정치 못한 여인네를 연상케 했고, 사람들은 그런 주막을 힐끔거리면서 다녔다. 장골 허리에 찰까 말까 한 주막의 사립문은 늘 열려 있어서, 누구라도 반길 것처럼 보였다.
사립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놓인 살평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오끼는 찾아오는 손님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 살평상을 요긴하게 활용했다. 길 가다가 들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는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살평상으로 술상을 날랐다. 가난하거나 술주정하는 패거리도 마찬가지로 살평상에서 술을 마셔야 했다. 동네에서 평판이 좋거나, 면 출입이라도 하는 사람이라야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살평상과 방 손님을 까탈스럽게 가리는 오끼였다.
살평상 출입밖에 못 하는 사람들이 동네나 들에서 한담을 나눌 때면, 꼭 주막에서 있었던 일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오끼의 방에 들어가서 술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그 소원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허풍떨기에 바빴다. 밤새도록 오끼와 대작했다거나, 심지어는 오끼와 동침까지 했다고 떠벌렸다.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듣는 쪽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럴 리 없는 말을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때아닌 시비가 붙기도 했다. 말씨름이 열기를 더했지만, 애초부터 자초지종을 가리기는 글렀다.
한겨울에는 주막에서 놀음판이 벌어졌다. 동네뿐만 아니라 인근의 노름꾼들이 모여들었다. 머슴들도 새경으로 받은 나락을 팔아 밑천이 빵빵해서, 놀음판은 제법 달아올랐다. 오끼는 노름판에 한껏 불을 지폈다. 술 팔며 시중드는 것보다는 놀음판에서 뒷돈 쓸어 담는 것이 몇 배나 이득이었다.
달콤한 재미를 보는 오끼의 처지와 달리 놀음판에서는 평지풍파가 일었다. 그야말로 건곤일척 겨루다가 며칠이 못가서 알거지가 되어 나앉는 경우가 생겼다. 다 털린 노름꾼은 온 동네에 소문이 나서 옳게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한밑천 잡은 노름꾼은 그 돈으로 국회의원 출마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읍내 사진관 여자와 바람이 나서 딴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출마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말았다.
주막을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화근인 주막을 아예 없애버리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돈만 탕진했지 당최 도움 되는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는 것이 여론의 핵심이었다. 노름이 아니더라도 주막은 사건 사고의 온상이었다. 자고 나면 쌈박질로 머리가 터지고 이마가 깨져 뻔한 안면에 서로 틀어졌다. 면 지서 순경이 신고를 받고 주막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풍기 단속을 빌미로 주막의 존재 자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주막 폐지 여론에 가세했다. 오끼를 보고 몰래 밤마실 나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것을 곱게 보지 못하는 아주머니들의 불만이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굴러 들어온 불여우가 온 동네 사내를 후린다며 아주머니들은 눈에 불을 켰다.
주막 때문에 동네에 망조가 들었다는 여론이 대세로 굳어지는 듯했으나, 주막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동네도 별 탈 없이 조용했다. 낮에는 주막을 향해 삿대질하던 사람들이 밤에는 시나브로 주막으로 몰려들어, 언제 그랬냐는 듯 오끼에게 수작을 걸었다. 그러나 그 짓도 오끼가 돌이를 낳기 이전의 일이었다.
돌이를 낳자 오끼는 주막 일을 청산했다. 그리고 지금의 외딴집으로 이사했다. 돌이 어머니가 주막을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은 동네 면의원이 뒤를 봐줬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해방 후 면의원을 지낸 적이 있는 과수원집 주인을 동네 사람들은 '면의원'이라 불렀다.
면의원은 일본강점기 때 일본인 소유의 과수원에서 머슴을 살았다. 해방되자 일본인이 급하게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때 면의원은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다. 일본인 주인이 자기에게 과수원을 잠깐만 맡아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달아나기 급급한 판에 언제 그런 말을 남겼을까 싶지마는 부인할 수도 없었다. 머슴이었던 면의원은 슬그머니 과수원의 주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면의원의 배 속에 능구렁이가 들었다고 수군댔다. 그것도 다 팔자소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과수원 덕분에 면의원은 곧바로 동네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이제는 머슴살이하던 신분이 아니었다. 면의원은 동네에서 화전놀이를 하거나, 동네일이 생기면 돈을 후하게 내놓으면서,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얻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면의원까지 되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면의원 제도가 없어졌지만, 여전히 '면의원'이라 불렸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 때쯤이었다. 면의원은 머슴에게 새경을 넉넉히 쳐준 후, 동네에 있는 본가(本家)에서 오끼의 주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특별한 볼 일이 따로 없으면 주막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사정이 이러니 돌이네 뒤를 봐줬다는 소문이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오끼가 주막을 그만두자, 면의원도 더는 주막 출입을 하지 않았다. 돌이가 면의원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돌이는 면의원 호적에 번듯이 올라 있었지만, 사람들은 짚이는 데라도 있는 듯이 의심을 풀지 않았다. 보리쌀이나 찧으려고 정미소에 들렀던 사람들은 마치 내기하듯 서로에게 시비를 걸었다.
"저 아는 도대체 누구의 씨앗이여!"
"아 면상을 보고도 몰라? 동도골 의원이라고 쓰여 있잖아!"
"면의원 아냐? 저 턱주가리 좀 보라꼬!"
동도골이란 동네 뒷산에 있는 골짜기를 말했다. 동도골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집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곳에 가족도 하나 없이 사는 50대 초반의 한의원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동도골의원'이라고 불렀다. 도시 한약방에서 약재를 썰기만 했다는 이력이 전부인 그가 이 골짜기로 흘러들어 와서는 어엿한 의원이 되었다.
동도골의원은 아이 못 낳는 부인에게 용하다는 소문이 났다. 농한기에 접어들면 인근뿐만 아니라 도시의 중년 부인들도 찾아왔다. 버스에서 내리는 낯선 여인의 전부가 동도골의원을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사람들은 낯선 여인이 길을 묻기 바쁘게 뒷산 골짜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녁때가 되면 여인들은 무슨 약을 한 보따리씩 지어서 버스를 타러 신작로로 내려왔다.
환자가 뜸한 여름이면, 동도골의원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오끼의 주막에 들렀다. 물론 살평상이 아니라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동도골의원은 사람들이 들에서 한창 일하는 대낮에도 주막의 안방을 차지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밤이 이슥해지면, 주막에서 떨어진 가게에서 이틀 치의 신문을 찾아들고 골짜기로 올라가거나, 주막에서 밤을 지새운 이튿날 새벽에 갈 때도 있었다.
면의원은 동도골의원과는 반대로 주로 농한기인 겨울철에 주막을 출입했다. 여름철에는 과수원에 일하느라 여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두 사람이 주막에서 겹치는 때가 있었지만, 댓 살 아래인 동도골의원이 슬그머니 방을 내주었다. 면 의원과 동도골의원의 이런 희한한 릴레이식 주막 출입은 돌이가 누구 소생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돌이가 누구의 소생인지에 대한 소문을 오끼만 못 들었을 리 없다. 그러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돌이를 집 밖으로 업고 나가지도 않았다. 오끼에게서는 늘 찬바람이 일었다.
사람들은 오끼를 '돌이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전히 '오끼'라고 불렀다. 주모에서 어엿한 동민의 한 사람으로 신분이 상승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동안 오끼는 동네 남자들의 연인이었다. 비록 손목 한번 잡아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러면서 흉허물없이 지냈던 사이가 아닌가. 그랬던 오끼가 돌이를 앞세워 동민의 한 사람으로 들어앉는다면, 이전에 했던 짓도 못 하게 생겼다. 어느 남자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겠는가.
오끼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돌이의 이목구비는 사람들을 뭉텅한 의문에 빠뜨렸다. 동도골의원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둥글었는데, 면의원은 대추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그런데 돌이는 커갈수록 이도 저도 아닌 그저 평범한 얼굴이었다. 사람들은 돌이가 외탁을 해서 그럴 것이라고도 했고, 아직 골격이 덜 드러나서 모를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돌이의 생부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은 끝이 없었다.
동네 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저 어른들에게서 들은 귀동냥이 전부였지만, 아이들도 편이 갈라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어린 돌이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물어보거나, 그런 일로 돌이를 놀려먹는 짓은 하지 않았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끼가 그만둔 주막에는 다른 주모가 들어왔다. 면의원은 더는 주막 출입은 하지 않았지만, 동도골의원은 여전히 주막을 찾았다. 새로 온 주모는 외상술만 먹는 동도골의원을 영 달가워하지 않았다. 면 소재지에 있는 기생집에는 돈을 물 쓰듯 하면서도, 정작 주막에 와서는 외상술을 먹는다는 것이 주모의 푸념이었다. 주모에게 술보다 더 많은 욕을 얻어먹고, 쫓겨나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심심찮게 띄었다.
동도골의원은 어째서 술값 정도도 없는 걸까. 아들을 낳으려는 아주머니들의 발걸음이 여전했는데 말이다. 아무리 기생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해도 주막 술값을 외상할 만큼 돈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동도골의원과 술을 대작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야기는 영 딴판으로 흘렀다. 동도골의원은 오끼 생각이 나서 주막을 바로 지나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습관처럼 들렸다. 마신 술값은 없어서가 아니라 주기 싫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내 집이 없어졌다. 내 집이 없어졌다."
동도골의원은 주막을 나서며 노래처럼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밑도 끝도 없는 말이라며 웃어넘겼다. 조금만 생각이 깊었더라면 오끼를 못 잊는 동도골의원의 심중을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안다 한들 농사에 보탬이 될 일도 없지 않은가. 굴러들어온 동도골의원의 속마음이 사람들에게는 하등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동도골의원은 오끼에게 품은 마음을 유리병 속에 넣어 닫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밖으로 나오면 안 되었다. 그 속에서 그대로 삭아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지에서 오끼와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났다가는 동네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풍기를 흐린다는 명분에 걸리면 맥을 출 수 없었으리라. 동도골의원은 그런 위협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벌어놓은 돈이 좀 있다 한들, 그것이 쫓겨 날 정도의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돈은 앞가림하는 데에나 쓰일까. 보이지 않는 텃세에는 그다지 힘쓰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절박함에 부딪히자, 그것이 술을 더 가까이할 구실을 만들었다. 오끼를 그리워하는 동도골의원의 마음은 야금야금 타들어 갔다. 언젠가는 그 마음도 삭아 내리겠지. 차라리 그렇게 되기를 은근히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한여름 초저녁부터 우리는 마을 앞 벌판을 돌아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의 밤마실이라고 해봐야 마을 앞 벌판에서 목청껏 유행가를 불러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떤 날은 어둠 속에서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그것은 실한 농군이 되기 위한 징표였으니, 지나가는 어른들이 낌새를 알아챘으나, 모르는 체했다. 어쩌다가 야단이라도 맞으면, 줄행랑을 치면 그만이었다.
그날 밤에도 우리는 벌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벌판에는 하얀 돌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 벌판 위로 달빛이 퍼부었다. 마치 목화를 따다 널어놓은 것처럼 벌판이 온통 하얗게 빛났다. 주막은 백열등 불빛으로 한없이 붉었는데, 별 하나가 땅에 떨어져 발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은 하늘로 올라갈 때가 멀었어. 그렇게 상상해도 좋을 꿈의 붉은 주막이었다.
그때 우리 중 누가 팔을 들어 황홀한 주막을 가리켰다. 그곳을 바라보니 주막의 창호지 문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내 우리는 그 장면이 무슨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좋은 일을 꼭 하고야 말리라. 우리는 약간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곧바로 안개비처럼 내리는 달빛을 뚫고 주막으로 내달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방 안에서 투덕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동무 하나가 국도에 깔린 자갈을 한 줌 움켜쥐더니, 손바닥만 한 주막 마당 안으로 던졌다. 우두둑 자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공격 신호 같았다. 너도나도 주막을 향해 돌팔매질했다.
"에라이 비러먹을 놈."
"이 야밤에 뭐 하는 짓이고!"
우리는 어른 흉내를 내며 욕하고 고함질렀다. 아무리 주막이지만 너무 난잡하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막말을 늘어놓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리라는 예측도 행동을 부추겼다. 아이가 어른을 나무라는 꼴이어서 주저했지만, 이내 그런 것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좀 어긋나게 장난을 쳐도 어차피 대상은 주막이 아닌가. 어느 정도의 탈선이 보장되는 주막은 아이들에게조차 시답잖게 보였다.
방 안의 남자는 이미 어른으로서의 체통을 잃어버렸다. 현장을 들켰기 때문에 우리의 노리갯감이 되고 말았다. 방 안의 남자는 일이 크게 확대될수록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의 약점이 우리에게는 기회였다. 우리의 행동은 점점 대담해졌다.
우리는 방문 앞까지 자갈을 던졌다. 모처럼 나를 따라 온 돌이도 왼손에 자갈을 쥐었다. 그러나 욕을 하지도, 자갈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왜 던지지 않지?' 그 순간 나는 장난기가 확 달아났다. 돌이에 대한 해묵은 소문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때 주막집 문이 후다닥 하며 거칠게 열렸다.
"이 철없는 것들이…."
바가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바로 동도골의원이었다. 벗겨진 웃옷과 허리띠가 풀어져 있었다. 흘러내리는 바지를 오른손으로 엉거주춤 잡은 채 용수철처럼 밖으로 튀어나왔다. 볼 일을 못 봐서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며 용쓰는 소리가 바로 곁에서 그러는 것처럼 들렸다. 우리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뒤따라오는 돌이의 얼굴이 창백해지는가 싶더니, 다시는 펴지지 않을 것처럼 굳게 일그러졌다. 환한 달빛이 돌이의 표정을 하나 남김없이 비추었다.
그날, 나는 돌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왼손으로 문을 밀치는 것으로 보아 동도골의원은 왼손잡이임이 틀림없었다. 돌이도 왼손에 돌을 들고 있었으니 왼손을 썼다. 동도골의원을 향해 자갈을 던지지 못하던 상황과 겹쳤다. 돌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순식간에 풀렸다. 이럴 수가 있을까. 그 엄청난 비밀을 알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태껏 아버지를 가슴에 담고 살아온 돌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여태껏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돌이가 주막을 향해 돌팔매질하지 않았던 사실을 동무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의원이 돌이처럼 왼손을 쓴다는 것조차도. 어른들 누구에게도 물론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만 단속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돌이를 위해서였다.
돌팔매 사건 이후에도 고향 산천은 여전히 맑고 푸르렀다. 낮이면 들녘에 사람들이 들일을 했고, 밤이면 별들이 귀찮을 정도로 반짝였다. 사람들은 돌이의 출생 비밀을 더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예전처럼 누구 자식인지를 놓고 술내기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삶이란 다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람들의 그런 태도를 다행스럽게 여기며, 고향의 산과 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사랑했다.
주막 사건을 계기로 돌이를 새롭게 바라보았다. 그동안 나는 돌이를 부담스러워 했다. 구구단을 못 외우고 국어책을 더듬거리며 읽었을 뿐만 아니라, 따돌림을 당하는 돌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돌이를 위해 나는 스스로 돌이의 보호자가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럴 즈음, 돌이가 뜬금없이 독수리 새끼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자신도 독수리처럼 강해지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멸시를 받고 자란 돌이의 마음이 들여다보였지만, 어디서 독수리 새끼를 구한단 말인가. 독수리 새끼를 키운다고 없던 용기가 솟아날까? 돌이가 또 걱정거리 하나를 내게 던져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수리가 마을 하늘에 뜨면 닭들은 혼비백산하여 구석진 곳을 찾느라 야단이었다. 개들도 꼬리를 내린 채 짓지도 않고 마루 밑에 박혀 나오지 않았다. 독수리가 업고 있는 어린아이를 채갔다는 말이 떠돌던 때였다. 아이들도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먹이를 물색하는 독수리를 보며 그 위용에 겁을 먹었다.
나는 돌이가 재촉할 때마다 독수리 집이 있는 곳에 관해 이야기해주곤 했다. 동네에서 좀 떨어진 산골짜기는 동네 아이들이 소 먹이러 가는 곳이었다. 그 산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사람의 손이 미칠 수 없을 정도로 가팔랐다. 그 절벽 한가운데에 독수리 집이 있었다. 독수리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때 가끔 볼 수 있었는데, 그 늠름한 자태는 과히 맹수다웠다. 그 광경을 이야기해주면 돌이는 눈을 반짝였다.
며칠 후, 돌이와 나는 우리 집 황소를 몰고 산으로 향했다. 독수리 새끼는 내년 봄이 되어야 볼 수 있지만, 집 구경부터 하기로 했다. 골짜기에는 동네 아이들도 나처럼 소나 염소를 몰고 와있었다. 돌이와 나는 소가 풀을 뜯는 동안 못에서 멱을 감았다.
못은 산 아래에 있었는데 언제나 누런 색깔을 띠고 있었다. 산그늘을 찾아가며 놀았지만 무더움은 피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수시로 옷을 벗고 개구리처럼 첨벙첨벙 못에 뛰어들었다. 그 짓도 심드렁하면, 못에서 나와 여치를 잡아 싸움을 붙이거나, 산딸기를 따 먹으러 산을 쏘다녔다.
젖은 몸을 말린 돌이는 독수리 둥지를 살피기에 바빴다. 그러나 독수리 둥지가 산 아래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돌이는 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독수리 둥지까지 가기가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멱을 더 감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돌이와 함께 황토물 못에 다시 뛰어들었다.
못 가장자리 물은 한여름이라 미지근했다. 나는 밖으로 나와 몸을 말렸다. 돌이는 못을 가로질러 헤엄쳐 보이겠다며 물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모처럼 멱감는지 돌이의 표정이 밝았다. 내 앞에서 헤엄치는 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눈치도 보였다. 못은 직선으로 오십 미터 남짓해서 나도 왕복하는 거리였다. 돌이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돌이가 못을 가로지르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이들이 하는 땅따먹기 놀이에 빠져들었다. 던진 돌이 금에 걸렸는지를 놓고 옥신각신하면, 두어 살 많은 내가 감독이 되어 그것을 심판하기로 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렸을 무렵이었다. 한 아이가 돌이가 물에 빠졌다고 고함쳤다. 고개 돌려 못을 바라보았다. 멱 감고 있어야 할 돌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물에 빠져 잠긴 한참 후의 일이었다.
산에서 풀을 베던 어른들이 놀라서 허둥지둥 내려왔으나, 의논만 분분할 뿐이었다. 돌이가 어디에 빠진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소리친 아이는 못 한가운데라고 했다. 동네 청년이 들어가 보았으나, 수심이 깊어 돌이를 찾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었다. 어른들은 내일 시체를 건져야 할 듯하다며 혀를 찼다.
소를 몰고 돌아올 때였다. 장려하게 지는 노을의 자태는 간 곳이 없었고, 화가 났는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나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험악한 모습이었다. 동네에 들어서자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돌이가 죽었단다.'라는 말이 은밀하게 오가는 듯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였다. 골목에서 마주친 사람들 아무도 나에게 사건의 전말을 묻지 않았다. 나는 동네에서 제외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 식사 때였다. 식구들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들은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 않았다. 시인도 부정도 아닌 침묵만 밥상머리를 감돌았다. 두렵고 답답했다. 누가 내 뺨이라도 때려주었으면 싶었다.
돌이가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물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두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구구단을 가르친 아이라 얕본 것인가. 돌이가 나를 이기려고 은근히 힘을 과시하는 것을 아니꼽게 본 것은 아닌지. 아니야, 억지로 자책할 필요는 없어. 아닌 것은 아닌 거지. 나는 돌이가 나에게 강해 보이려고 일부러 무리하게 수영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버려두었다. 그것이 진실이고 전부였다. 그것으로 판단하면 내 죄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 테지.
독수리 집을 보러 가자고 돌이를 재촉한 것은 나였다. 독수리 새끼를 가지고 싶어 하는 돌이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들어주기 위해 그냥 해본 소리였다. 사실 나는 독수리가 무서워 독수리 집 근처에도 못 갔다. 그렇다면 돌이의 죽음은 나의 거짓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돌이와 나 사이의 은밀한 독수리 이야기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안다면 나는 면 지서에 갇혀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독수리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다.
며칠이 지나자, 면의원이 본가가 있는 우리 동네에 내려왔다.
"○○ 아(아들)가 우리 돌이를 못에 밀어 넣었다! ○○ 아가 우리 돌이를 못에 밀어 넣었다!"
면의원이 그렇게 외치며 골목을 돌아다녔다.
○○은 아버지의 이름이다. 동네 사람들이 들으랍시고 아버지 이름을 더 크게 불렀다. 아버지는 그때 마당에서 사과 궤짝을 만들고 있었는데, 면의원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었다. 궤짝 못질에 화풀이하는지 망치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헛간에서 면의원이 외치는 소리를 숨죽여 들었다. 면의원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돌이는 소 먹이러 다니지 않았다. 집에는 기르는 소도 없었거니와 소먹이는 곳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다. 그런 돌이를 꼬드겨 데리고 간 것이 나라고 생각했다면 면의원의 의심은 그럴 듯했다. 그렇다고 돌이가 독수리 새끼를 키우는 게 소원이라며 나를 졸라댄 내막을 들려줄 수는 없었다. 앞뒤 분간을 못 할 정도로 흥분해 있는 면의원 앞에서 아무리 사실을 말한다 해도 먹혀들 것 같지 않았다. 돌이가 없으니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내가 돌이를 죽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날 티끌만 한 다른 일이 발생했다면 멱을 감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이가 하필이면 그날 나를 따라 소먹이는 데 왔을까. 돌이가 멱 감는 것을 내가 말리기만 했어도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한줄기 소낙비라도 왔더라면 서둘러 하산했을 것이 아닌가.
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오끼가 보였고, 동도골의원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몸이 굳었다. 그 와중에 내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돌이를 저세상으로 보낸 것이 나였다는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오끼가 웃으며 말했다.
"돌이는 죽지 않았어."
꿈에서 깨어나니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나는 오끼가 했던 말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돌이의 원혼을 못에서 건져내는 날이었다. 무당이 못둑에 올라왔다. 북과 꽹과리 소리가 잦아들자, 망인을 천도하기 위해 무명 필로 진 매듭을 춤을 추며 풀어갔다. 매듭은 망인의 가슴에 맺힌 한이다. 고풀이가 끝나자 씻김굿이 시작되었다. 돌이의 옷가지로 몸통을 만들고 주발에 혼백을 담아 머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빗자루에 향을 묻혀 머리와 몸통을 씻겼다.
내가 현장에 갔을 때는 이미 길닦음을 하고 있었다. 긴 무명 위에 씻김 한 원혼이 놓여 있었고, 그것을 밀어가며 무당이 춤을 추었다. 나는 무당이 돌이의 원혼을 불러낼까 봐 겁이 났다.
"다 너 때문이야!"
돌이의 원혼이 그렇게 말한다면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인가. 생각 없이 굿하는 현장으로 달려온 것이 후회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대구에서 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 여름 방학 때였다. 주막이 보이는 들판에서 친구들과 함께 시원한 밤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나를 주시하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어둠 속인 데도 그 시선은 강렬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체 하천 둑에 앉아있는 사람. 그는 동도골의원이었는데, 조그만 라디오에서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에 대한 방송을 듣고 있었다. 70년대 초 중국에서 일어난 정치권력간의 세력다툼이었다. 친구들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하자, 동도골의원이 입을 열었다.
"중국에서 일어난 운동인데 말이지. 양반문화가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거야."
"중국은 독재국가인데 누가 가로막아요?"
"양반에 속하는 유림과 공자의 추종세력이지."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중국에 남아 있나요?"
"남아있고말고. 그러니까 그들을 몰아내자며 비림비공 구호를 외치잖아."
"비림비공이요?"
"그렇지. 앞 글자 비림의 림林자는 유림儒林을 뜻하고, 뒷글자 비공의 공孔자는 공자孔子를 뜻하는 거야."
비림비공 운동의 목적은 당시 모택동의 정적이었던 임표林彪와 그를 지지하는 무리를 반혁명집단으로 몰아 제거하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비림批林은 당연히 임표를 비판한다는 뜻이지 유림을 비판한다는 해석은 틀린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대화 중간에 끼어들고 말았다.
"그게 아니고요. 비림비공이란 임표도 공자와 다를 바 없는 사회주의 반동세력이라는 뜻이지요."
"같잖은 소리 하네. 자네가 뭐 안다고 까불어! 다들 볼일이나 보러 가!"
동도골의원은 의외로 격분하며, 왼손을 파리 떼 내쫓듯 휘저었다.
나하고는 말하기조차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동도골의원의 눈에 파란 불이 일었던 것을 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죽은 돌이에 대한 원한이 나에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그것이었구나! 면의원의 악에 받쳐 냈던 소문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듯했다. '○○아가 우리 아 물에 밀어 넣었다!' 나는 그 지긋지긋한 소리를 떠올리며 전율했다. 동도골의원이 돌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그때 또다시 확인했지만, 몸이 저릴 정도로 섬뜩했고 슬펐다.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잊을 수 없으리라. 나를 보면 더욱 기가 막혔을 것이다. 돌이를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한 아픔이 가슴을 쳤겠지. 이름조차 떳떳하게 불러보지 못한 그 돌이가 죽고 말았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사죄라도 할까? 어떻게 하면 되는데?
동도골의원은 비록 뜨내기로 살았지만, 그런대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눈앞에 오가는 돌이를 숨죽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면 어떤가. 그래도 엄연한 자식이 아닌가. 술김에 '돌이는 내 씨앗이다.' 라는 말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말실수하면 어떻게 될까. 동네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그만큼 동도골의원은 동네에서의 기반이 약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돌이의 생긴 모양이 클수록 접시처럼 둥글어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빼다박은 듯이 닮은 것이 아닌가. 동도골의원의 할 일은 그저 취중 실수만 조심하면 될 일이었다. 돌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도 어느 시점에서 돌이를 놓고 면의원과 한바탕 싸우지 않았을까. 비록 동네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어도.
세월이 흘렀다.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을 떠났으나, 고향 소식은 대충 듣는 편이었다. 그중에는 동도골의원이 동네 어귀의 하천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소문도 들어 있었다. 술이 만취되어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 낭떠러지는 밤만 되면 소름 끼치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납닥바리(새끼 호랑이)가 지나가는 사람의 뺨을 때린다거나, 빗자루 귀신이 나타나 혼을 빼놓는다는 곳이었다. 동도골의원이 죽은 것도 납닥바리의 소행이라고 했다. 처녀 귀신이 나타났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동도골의원의 죽음보다 더 큰 사건은 그의 장례절차에 관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동도골의원의 집에 들어갔을 때였다. 장롱 속에서 집 한 채 살만한 큰돈 다발이 발견되었다. 동도골의원의 시체를 대충 동산에 묻어버릴 작정이었으나, 발견된 돈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 돈으로 장례나 잘 치러주자고 의견을 모았다. 당장 가마솥이 내걸리고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소문이 나자 다른 동네 사람들도 들여다보러 왔다. 상주 없는 장례식에 객꾼만 들끓었다. 돼지고기가 모자라 큰 염소 한 마리를 더 잡아야 했다. 아주머니들은 통 크게 장을 보아, 갖가지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했다. 치알이 두 개나 쳐지고 술판이 벌어졌다. 그 소란 속에 주막의 주모가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나타났다. 장부도 없는 외상값은 주모의 입에서 결정되었다.
동도골의원의 장례를 주관한 사람은 면의원이었다. 동네에서 그래도 바깥출입 하는 사람은 면의원밖에 없었다. 면 행사에 꽃을 꽂고 내빈석에 앉는 사람이었다. 장례를 주례한다고 해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꼭 그래야 할 사람인 듯 장례 일도 입간데 없이 처리했다. 누구 하나 어디에 얼마를 썼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그럴 권리도,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술이 좋았다. 동도골의원의 장례 행사는 3일 동안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치러졌다.
동도골의원은 동네 공동묘지에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돈이 없었더라면 음습한 골짜기 어디에 적당히 묻었을 터였다. 돈의 위력이 동도골의원을 아담한 묘지로 안내한 셈이었다. 동도골의원을 떠올리며 인생무상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도 이내 시들하고 말았다.
장례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끼 집에는 없던 담이 새로 참하게 꾸며졌다. 토담 위에 푸른 솔가지를 얹는 것이 아니라 기와로 마감한 와담이었다. 초가집에 와담을 둘러놓으니 갓 쓴 양반에게 양복 입혀놓은 꼴이었다. 그러나 허허벌판의 찬바람이 그대로 문풍지를 때리던 오끼 집이 아니었다. 비로소 집다운 집이 되었다.
이제는 아무도 오끼의 집 앞을 지나가며 돌계단에 면의원의 구두가 있나 없나를 살필 수 없게 되었다. 어른 아이 구별 없이 드나들던 우물 주변은 한순간에 구중궁궐처럼 깊어졌다. 앞가림을 제대로 한 집이 되었지만 와담 때문에 구설에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동도골의원 장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오끼 집 와담을 올렸다는 소문이 났다. 모든 비밀은 면의원 손바닥 안에 있어서,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단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허 참. 동도골의원이 오끼 치마 하나 입혀주고 갔네."
"아무렴. 그게 바로 마지막 정이라는 거야, 이 사람아!"
이듬해, 면의원도 농약 중독으로 죽었다. 과수원에 농약을 살포하다가 갑자기 거품을 내뿜었다. 하도 급해 리어카에 면의원을 실었다. 면 공의(공중보건의사)에게 갔을 때 나이 많은 공의는 빨리 읍내 큰 병원으로 가라며 다급하게 말했다. 면의원을 실은 리어카는 부리나케 읍내 병원으로 달렸지만, 도착도 하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몇 년 만에 고향으로 향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고향은 무연고지처럼 되었다. 내가 살던 집도 텅 비어, 도둑고양이나 박쥐들이 대신 살고 있었다. 그래도 보고 와야 마음이 편할 때가 많았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키보다 더 자란 풀이 마당을 꽉 매웠었다. 마당에는 여전히 옛 추억이 엎드려 있었다. 나는 추억을 되새김하며 허기진 그리움을 달래곤 했었다.
고향 신작로는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아스팔트 길을 바라보니, 구름처럼 몰려다니던 그 많던 사람들과 달구지 행렬이 환영처럼 느껴졌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아무도 걷지 않는 그 길에 웬 할머니가 갓길을 걸어갔다. 걷는다기보다 무척추동물이 꾸물대는 것같이 느리게 나아갔다. 손에는 허름한 보자기가 들려져 있었다. 오끼였다.
수 십 년 사이에 오끼는 더욱 왜소해졌다. 허리가 굽었고 머리는 온통 하얀 백발이었다. 단정했던 기품은 흔적처럼 남아 있었지만, 늙어서 그런지 옛날처럼 매몰차게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오끼 곁에서 차를 세우고, 내려서 인사를 했다. 나를 기억할지 궁금했다. 못해도 상관없다. 아니 모르는 게 훨씬 편했다. 내 마음속에 잠자던 두려움이 벌떡 일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두려움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태연한 척했다.
"할머니, 집까지 모셔드릴 테니 차에 타세요."
"이게 누꼬, 호수 아잉교!"
오끼가 반색했다. 이렇게 반겨줄 줄이야. 나는 순간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그사이 모든 과거를 잊어버린 것일까. 나를 누구로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야, 내 아명을 부르고 있잖아. 저세상으로 간 돌이가 생각나서, 나를 잡고 목 놓아 울지 어떻게 알아. 그 짧은 순간에 스쳐 가는 상상이 부지기수였다.
"호수 맞지예?"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 돌이와 놀면 그토록 쌀쌀맞은 눈총을 주던 오끼가 아닌가. 한 번도 내 아명을 불러준 적이 없었다. 갑자기 몸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끼의 입에서 '돌이'라는 말이 나오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
"건강하시죠?"
영혼 없는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무성의한 말로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모른 척하고 지나칠 것을. 어째서 스스로 화근을 불러들인단 말인가. 후회가 밀려왔다.
"아이는 남매를 두었제?"
"큰 애는 유치원 다닙니다."
"그래. 아이들이 똑똑하니 잘 키워요."
남매를 둔 것은 어찌 알았을까. 똑똑하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내가 어릴 적 오끼는 우리 동네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오끼는 돌이가 살아 있는 것으로 상상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나를 통해서였다. 그래서 내 삶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알았을 것이다.
나 역시 돌이가 죽지 않았다고 믿었다. 내가 살아 있는 순간까지는. 멀리 오끼 집 기와 담장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당선소감>
최상근 씨
논픽션이지만 문자 그대로의 논픽션은 아님을 고백한다.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소설적 기교를 부려보았지만, 너무 어설픈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나의 한계일 것이다.
장르 구분보다 더 중요한 할 말이 있다. 세상을 향해 고백하고 싶었던 것. 내 마음 속에 들어앉아서 무의식적으로 나를 휘몰아갔을 충동의 근원 같은 것. 어디다 꺼내놓고 말할 수 없어서 지우기를 수만 번도 더했다.
그 어릴 적 일들은 무시로 떠올랐다. 유쾌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부끄러운 내 이면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그 결과 늘 주변에서 맴돌고 말았다. 그래서 주저주저하며 살았고, 다행으로 여기며 속을 쓸어내렸다. 객체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뿐이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나는 객체다.
객체는 피동이다. 피동에는 의식이 없다. 앞에서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 바람이 부는 쪽으로 누울 뿐이다. 때가 되면 사라지거나 나타날 뿐인 존재. 피동은 굴러다니는 돌처럼 흔하다. 돌이는 바로 피동이었고, 다시 나 자신이었다.
'나'를 그려보기로 했다. 객체이거나 피동인 주제에 뭘 쓴다고? 문학적인 글과는 거리가 멀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써 내려가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그것은 별 게 아니었다. 노래를 잘 부르려고 애쓰는 것과 같았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금방 공간으로 휙 날아가고 말 나의 노래. 그래도 멋지게 불러야지. 나 자신을 위해서.
이 글을 쓰면서 느꼈다. 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써야 한다는 사실. 독자의 심금을 울려야 하는데 변죽만 울리면 하찮은 글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하찮은 글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다. 시니어에게 이런 기회를 부여해준 배경에는 잘 써보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 같다. 너무 감사드린다. 뽑아주신 심사 위원님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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