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세와 분배의 원칙 (우석훈, 한겨레훅)
이상 한파가 모든 것을 얼려놓은 듯한 요즘, 난데없이 재벌 3세 논의가 완전 뜨겁다. 시청률 35%로 마감한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현빈 때문인가? 매너 좋고 잘생긴 완전 소중한 남자, ‘완소남’에서 차가운 도시 남자, ‘차도남’으로 남성 코드가 변하는 중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싸가지’ 없어도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자, 카, 그게 현빈이다. 우파들이 공개적으로 싸가지 없다고 가장 욕 많이 한 사람이 진중권 아니던가? 그럼 진중권의 시대가 한번쯤 열리려나? 물론 그는 재벌 3세가 아니라서 좀 곤란하다.
‘삼성 손자’는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이 꺼낸 말이고, 결국 재벌 3세에게 무상급식을 주는 건 사치라는 것이다. 이래저래 요즘은 재벌 3세가 유행이다. 예를 들면, 현빈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느냐, 요런 얘기 아닌가? 잠깐 생각해보면, 우린 지금 쓸데없는 논쟁 중인지도 모른다. 재벌 3세들이 한국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설령 한국에 있다고 하더라도 급식비가 등록금에 포함되는 비싼 사립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어쩌면 ‘사회 지도층의 의무’를 생각하는 현빈처럼 평준화된 일반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들에게 급식을 무상으로 줘야 하네 마네, 이런 쓸데없는 논쟁 중 아닌지 모르겠다. 재벌 3세들이 정말로 초등학교에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과 같이 다니고 있다면, 그때는 그런 훌륭한 지도층을 위해서 무상급식 정도는 포상으로 줘도 되는 거 아닌가 싶다. 진짜 그렇다면 정말 훌륭하신 분들 아닌가!
지난번 날치기로 이제는 국립대도 아닌 그냥 법인이 되어버린 서울대 등 국립대의 등록금은 사립대보다 좀 싸다. 여기에도 정부 보조금이 들어가는데, “학생은 재벌 3세니까 국가 보조분만큼은 더 내셔야겠네요?”, 이럴 건 아니지 않은가? 삼성의 이재용은 자랑스럽게도 이 학교 나온 걸로 알고 있다. 스위스의 대학이 연간 등록금 50만원 정도인 걸로 아는데, 네슬레 회장 손자가 대학에 간다고 해서 더 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 재벌 손자에게 무료점심을 주는 문제에 대한 경제적 원칙이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이 19세기 런던에서 소녀 노동자에게 성인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임금을 주는 것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경제에는 생산의 원칙과 분배의 원칙이라는 게 있는데, 성인 노동자와 노동 성과가 거의 비슷한 소녀들에게 절반의 임금만 주는 것은 바로 분배의 원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말로 풀어보면, “소녀들을 착취하는 나쁜 놈들”이라는 얘기를 밀이 한 거다. 경제에는 기술적 원칙도 있지만 사회적 원칙도 있다는 게 밀의 주장이다. 재벌 3세의 무상급식 문제가 그렇다. 그들에게 급식을 줄 거냐, 말 거냐에는 사실 우리가 합의해야 하는 진짜 논의가 숨겨져 있다. 효율성 문제가 아니다. 효율성으로만 따지면 재벌 3세가 일반인들보다는 몇 백배 혹은 몇 천배 세금을 더 많이 내니까, 그들이 부자라도 상관없다. 진짜 문제는 재산 탈루로 전혀 세금을 내지 않는 부자의 경우이다. 이들은 어차피 서류상으로는 가난한 집안이니까, 어떻게 해도 공짜점심을 먹게 된다.
무상급식 논의의 진짜 얘기는 세원 마련, 즉 증세와 관련되어 있다. 애꿎은 재벌 3세를 끌어와서 절대로 증세는 안 된다는 부자들과 혹시라도 자신의 세금이 늘까 봐 걱정하는 중산층, 이런 논의들이 숨어 있는 거 아닌가? 보편적 복지와 부유세, 이런 논의가 결국 우리가 부딪히게 될 궁극의 논의이다. 재벌들이 세금 더 내기 싫다고 자기 손자 무상급식 안 줘도 된다고 하면, 너무 쫀쫀한 거다.
급식으로 사람 구분. 그게 최선이야? 확실해?
(임형찬 한겨레훅)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옆에 있는 여학교 소식을 들은 일이 있었다. 소변 검사를 통해 임신을 한 여학생 몇 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미혼모라는 사실이 퇴학 사유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필자가 그 일에 대해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학생들에 대한 교육적인 이유 또는 학교의 명예 차원에서 그 일에 대해 당연하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 상당수는 여성이었다. 물론 최근에 들어서 미혼모에 대한 보호와 그들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에게서 미혼모는 좋지 않은 이미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임산부 또는 미혼모인 여학생들의 퇴학 처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동정심’으로 복지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그녀들이 본질적으로 학생으로서 받아야 할 ‘교육 받을 권리’에 대한 논의는 항상 부차적으로 밀려났었던 것 같다.
요즘 무상급식 논란에서 받는 느낌도 사실 위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학생에게 왜 ‘부자 급식’을 해야 하느냐며 반대를 한다. 이러한 논쟁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학생들의 신분에도 피아(彼我)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부잣집 도령과 가난한 집 도령을 구분하는 관념 말이다. 모든 것을 부모의 경제력과 연관시켜서 개념화한 것 같다. 우리나라는 현재 초등학교까지 무상교육(2012년 중학교로 확대)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무상교육에 피아를 구분하지는 않았다. 부잣집 자녀이건 가난한 집 자녀이건 모두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만약 ‘동정심’이라는 것을 통한 복지였다면 전면 무상교육은 가능했을까? 전면 무상교육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그들이 보호 받아야 할 아동이자 청소년이라는 본질적인 신분에 있다. 무상 급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최근 무상 급식에 대한 반대 논리를 보면 바로 ‘가난한 집 자녀의 배고픔’을 해소해줘야 한다는 ‘동정심’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쁘진 않다. 적어도 동정심이라는 연민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에 대한 나눔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굳이 ‘가난한’이라는 딱지를 붙일 필요 없는 대상에게도 그런 구분이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언제 아동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인식이 부에 따라 정해졌던가? 그들은 아동이기 때문에 그리고 청소년이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대상이었다. 부잣집 자녀라고 해서 그들이 가난한 집 자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의 지위와 관련시키면 아이들 그 자체로서의 권리보다는 부에 따른 구분만 보이기 마련이다. 전면 무상 급식의 진짜 가치는 바로 아이들에 대한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보살핌이라는 차원으로서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무상 교육도 바로 그러한 관념에서 탄생되었다고 본다.
아동 성범죄가 발생하거나 청소년에 대한 부당한 일들이 벌어질 때, 우리 사회는 그들의 부모가 누군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바로 그들이 성인이 아닌 약자이기 때문이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분노하고 공동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않던가? 사실 전면 무상급식은 교육적인 문제에 있어도 큰 의미가 있다. 차별 급식과 같은 논리로 교육을 한다면 부자의 자녀들은 평생에 걸쳐 사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엄연히 사회는 개인의 성공에 도움을 주거나 개인의 실패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무상급식과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적으로도 합당하다. 학부모들도 자신의 재력 여부와 상관없이 내 아이 뿐만이 아니라 아동은 그 자체만으로 존중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전면 무상급식을 통해 아이들 사이에서 너와 나가 다르지 않다는 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면 비용 이상의 교육적 편익을 누릴 것으로 본다.
사실 필자는 무상급식이라는 의제와 크게 상관이 없다. 의무교육을 받을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학 아동이 있는 학부모도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주 오래 전에 속도에 대한 선진 기술(?)을 가지고 먼저 가정을 꾸린 고등학교 동기만큼은 관련이 적다. 하지만 공동체적 연대의식은 필자가 학부모가 아니더라도 무상급식 의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된다. 아프리카의 코끼리는 자신의 새끼가 아니더라도 공동체를 위해 같이 새끼 코끼리를 보살핀다. 우리 사회에서 아동과 청소년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아이들에게 꼭 ‘너와 나는 다른 존재’라는 의식을 심어줘야 할까? 또한 일선 학교에서 체력 검사를 하고 발달 사항을 점검하는 것은 단지 교육이 지식을 전달하는 것 뿐 아니라 성장 과정을 공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교라는 공간에서 성장 발육과 가장 관련성이 큰 급식은 교육의 일부분으로 해석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볼 때 아이들의 권리를 꼭 구분해야만 할까? 드라마의 최신 유행어가 생각난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