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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되는 글이어서 받은 글을 수정 않고 그대로 올려봅니다.
-영화 ‘건국전쟁’ 을 보고-
나는 79학번 인하대 졸업생입니다.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용산역 인근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였는데 보통 다큐 영화는 역사현장을 취재하는 사람과 편집자의 의도가 들어간 기록물이기 때문에 무덤덤한 느낌으로 보게 되는데
이번에 내가 본 ‘건국전쟁’ 은 다른 역사물 다큐멘터리 와 달리 군데 군데 눈물을 훔치며 보게 되었다.
나만 그런가 하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변 관객들을 보니
그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난 것을 알게 되었고 마지막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부분에서는 많은 관람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 박수를 치며 영화의 주인공에게 그리고 영화를 만든 감독과 제작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다.
왜 이 글의 제목을 ‘나는 79학번 인하대 졸업생입니다.’ 로 정했을까?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9년과 그 이듬해 1980년에는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휴강하고 학생들이 데모에 참가하거나 아예 휴교 조치로 학교에 가지 않았던 적이 많은 시절이었다.
79년 대학 입학했던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장에게 시해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10.26 사건 이후 전국의 많은 대학들은 극심한 소요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총학생회 간부들이 데모를 이끌었던 시기였고 정상 수업을 하기 보다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데모를 하다가 학교 밖으로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행진하려고 하면 전경들은 교문 밖에서 최루탄을 쏘고 데모를 진압하는 일이 반복되었던 시절이었다.
80년 봄학기에는 시위하던 학생들이 내가 다니던 인하대학교 설립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밧줄로 넘어뜨리고 학교 연못에 빠트렸던 장면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다.
인하대학교는 설립당시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을 가지고 만들어졌는데
그 성금을 모금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 주신 분이 일제시대 하와이에서 생활하셨던 이승만 박사이셨고 그래서 학교 이름이 인천의 인 자와 하와이의 하 자로 교명을 인하대학교로 정한 학교이다.
그래도 학교를 세워주신 설립자인데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그 시절에는 학교 관계자나 교수님 중 누구 하나 학생들의 행동을 나무라거나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공대 야간대학생이라 낮에는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 까지 공장에서 생산직 사원으로 기계를 가공하는 일을 했고 밤에 공부하러 학교에 갔는데 학생들 시위로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최루탄 연기를 마시고 강의실에 들어가면 칠판에 휴강 이라고 써 있어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온 적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소의 생각은 자유당 말기 사사오입개헌으로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정권욕심이 많은 대통령이고 3.15 부정선거로 학생들 시위가 확대 되면서 많은 학생들의 희생을 야기시킨 4.19 의거가 발생하였고
결국 본인 스스로 하야를 선언하고 하와이로 망명간 대통령인 데다가 6.25 전쟁 중에는 한강다리를 폭파케 하면서 자기는 대전으로 도망간 참 나쁜 대통령이다.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학교에서 사회 선생님들에게 배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인식의 전부였다.
그리고 나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관심을 갖기 보다는 현실에 부닥치는 여러가지 일과 경제활동을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이제까지 살아왔다.
이번에 ‘건국전쟁’ 영화를 보면서 내가 눈물을 흘렸던 첫번째 이유는 그동안 내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에 흘린 눈물이었고 두번째 이유는 8.15 광복으로 일제가 물러나고 대한민국을 세울 당시에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백성들이 많은 시기였는데 백성들을 잘 설득해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나라를 세워 주신 것과 6.25 전쟁으로 나라가 자칫 공산화될 수 있었던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미국에 긴급 도움을 요청해 나라를 구한 것에 대한 감사함의 눈물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이 한 사람의 의식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 실은 3년 전부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서적과 인터넷 그리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공부할 수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이야기와 내가 공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1. 이승만은 독재자인가 ?
4.19 부상자들을 위문하는 자리에 ‘불의를 보고 참지 않고 나서는 젊은이들이 있는 이 나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라면서 4.19 의거 일주일 만에 스스로 하야를 선언하고 대통령 직을 물러났다.
독재자였다면 하야를 선택하기 보다더 강경하게 반대파 숙청작업을 했던 다른 독재국가 독재자들과 비교하면 된다.
2. 이승만은 6.25 때 서울을 팽개치고 도망간 비겁자인가 ?
북한이 서울을 침투하면 2시간 이내 한강철교를 폭파하는 군 작전 지침이 매뉴얼로 있었고 전쟁 중 군통수권자가 적에게 잡혀 항복을 하거나 전사를 하면 거기서 전쟁은 끝나게 된다.
후방으로 이동해 군통수권을 행사하면서 우방국 참전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해야 나중에 다시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다.
대통령이 서울에 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방송은 사실이 아니고 미국 참전이 결정되었다는 정보를 얻고 지금은 북한의 남침으로 위급한 상황이지만 우방국 도움으로 전쟁을 다시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한 격려의 메시지였다.
오히려 북한 김일성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북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을 탈출해 만주까지 도망갔었다.
3. 이승만의 장기 집권은 본인의 정권욕인가 ?
정권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역사를 다시 돌릴 수는 없겠지만 만일 이승만이 아닌 다른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 6.25 동란을 맞았다고 생각할 때 당시 어느 누구가 미국 대통령과 집적 전화하고 태평양사령관 맥아더 장군과 통역 없이 바로 긴급전화로 미군 참전을 이끌어 낼만한 지도자가 있었을까 ? 하는 생각을 해 본다.
4. 3.15 부정선거에 이승만은 어떤 책임을 지어야 하나?
당시 대통령 선거에 나왔던 야당 조병옥 박사의 선거기간 갑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은 경쟁자 없는 선거로 이미 확정되었던 선거였고 부통령 자리에 오르려 한 이기붕이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부정선거가 된 것인데 대통령은 부정선거가 저질러 지고 있는 현장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최고 책임자였기 때문에 4.19 가 터지자 바로 책임지고 하야했던 것이다.
5. 이승만은 스위스 비밀은행에 막대한 자금이 있었나 ?
당시 많은 언론에서 이승만 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스위스 비밀계좌에 막대한 자금을 축적했다는 보도를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시절 생활비가 없어 교민들이 걷어 주는 돈으로 궁핍하게 생활했고 말년 요양병원에 낼 돈이 없어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딱한 사정을 알고 무료로 진료를 해 주었다.
6. 이승만은 친일파인가 ?
초대 내각을 구성할 때 일부 각료와 정부 고위 인사 중 친일행적이 있던 인물을 기용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은 훨씬 많은 친일 인사를 내각에 등용시켰고 6.25 당시 중공군이 처들어와 전세가 불리해 지자 미국이 일본군을 중공군을 막아내는 역할로 참전시키려고 할 때 일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 우리가 먼저 일본군을 쏘고 그 다음 중공군과 싸우겠다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7.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인가 ?
미군정의 도움을 받고 나라를 건국한 것은 사실이지만 휴전에 끝까지 반대하며 반공포로 석방으로 자유진영을 놀라게 해서 한때 미국 정가에서는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계획도 있었고 결국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민국은 군사적 안정과 경제번영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8.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했던 이승만에게 분단의 책임이 있나?
이미 북한은 이승만이 남한에 들어오기도 전 소련의 등을 업은 김일성에 의해 공산주의로 물들었고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38선 이북으로 통행금지를 시켜 분단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지 않다.
이승만이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
초대 대통령의 경우 3선을 해도 된다는 국민들의 요청이 있었지만 본인은 2선만 하고 물러났던 미국 건국 대통령 조지워싱턴과 같이 2선 까지만 대통령을 하고 물러났다면 후대에 길이 존경받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로 자칫 공산화 될 뻔했던 남한을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지켜 주신 분인 것은 분명하다.
말년에 올바르고 정직한 각료와 참모들을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작년 테슬러 대표 일론머스크가 자유민주체제와 공산 사회주의 선택의 70년의 결과 환한 불빛으로 밝힌 남한과 컴컴한 북한지역 야간 위성사진을 보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이 중요한가에 대해 시사점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일본의 항복으로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남한은 미군 주도하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고 북한은 소련의 주도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하였다.
75년이 흐른 지금 남한과 북한은 경제규모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30배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어느 체제를 선택해서 나라가 만들어지고 운용되어져야 하는지는 이미 판명되었다.
서구 나라들의 경우 건국에 공을 세운 초대 대통령은 사후에도 기념관을 건립하여 역사와 리더십을 배우고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공과 중 공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과에 해당되는 부분이 더 많이 교과서에 실려 있고 어린 학생들이 그대로 교육을 받고 있다.
이 글의 말미에 이런 말을 적고 싶다.
누군가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나부터 누군가를 존경해야 한다.
내가 선배나 스승을 또 부모나 어른을 존경하지 않으면 나 또한 후배들과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누구의 말이 역사 앞에서 진실한 것인가를 다시 알아보고 그동안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없었는지 혹시 남들에게 잘못 가르쳤던 부분은 없었는지 이제라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작고하신 아버님이 살아계셨을 때 몇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아버님은 북한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와 공산사회를 경험하고 인민군에 입대할 나이 6.25 사변이 일어나자 토굴속에서 숨어 지내다가 어렵게 남한으로 내려오신 실향민이시다. 남한에서 한 때 잘 살았던 때도 있었지만 하던 사업의 실패로 자포자기하며 술로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집안 경제가 무너지고 사 남매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사 남매가 초등학교 중퇴, 초등학교만 졸, 중 고등학교를 공장에서 일하며 검정고시로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우리 남매들이 겪었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자녀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있었는데 나도 커서 자녀를 키우며 그때 어린 나이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공장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얼마가 괴롭고 힘들었을까 생각을 갖게 되었고 나중에 아버님에게 그때 아버님을 원망했던 적이 있었음을 고백하며 아버지께 용서를 빌고 저를 이 땅에 낳아 주신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이미 아버지 역할을 잘 하신 것입니다.
그때 힘들고 고생스러웠지만 그러한 경험도 살아가는데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표현해 드린 적이 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아버님이 그 때 너희들 많이 힘들게 했는데 그 때는 내가 잘못했다 라고 하시며 눈물로 자녀들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바람에 아버지와의 자녀들의 관계가 훨씬 편해지고 그 이후 아버지를 더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사는 사람이 잘 되거나 본인의 자녀에게 존경받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선배세대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그런 의식에서 이제부터는 선배와 어른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앞으로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는다.
이제라도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관이 세워지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상이 세워져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바른 역사관을 길러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인하대학교 79학번 최용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