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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신학적으로나 문법적으로 맞는 용어를 바르게 사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교회에서는 말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고, 서로 대화하고, 글로 쓰고, 동영상으로 올리는 등 ‘말’을 사용하여 생각을 표현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전합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맞는 말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신앙 서적을 읽거나 설교 말씀을 듣다 보면 신학적으로나 문법적으로 맞는 용어를 바르게 사용하기보다는 잘못 전해 온 관습이나 전통을 따라서 여전히 올바르지 못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만납니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괜찮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큰 차이를 가진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더구나 젊은 자녀 세대를 위해서는 바른 용어를 사용하여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신학교의 예과 과정에서 ‘한국어 문법과 바른말과 바른 글 사용’이라는 과목을 만들고 한 학기라도 공부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가끔 목사님들의 글을 교정하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오늘은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틀리는 몇 가지를 살펴보고, 특히 ‘성전’이라는 말에 대한 글을 나눠 보고자 합니다.
1. 일상생활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말을 바르게 사용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고치시면 좋겠다고 느낀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특히 목사님들은 설교를 작성하시거나 강의안을 작성하시는 일이 많으니까 다음에 인용하는 자료들을 살펴보시고 도움을 받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개역개정 성경책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로 되어 있는데 여전히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로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 어떤 목사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로, 다른 목사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로 하는 것도 봅니다. 한 가지로 통일을 시켜야 교인들, 특히 자녀들이 혼란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뜻을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로 하거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로 해야 맞을 것입니다. ‘뜻이 이루어지다’가 맞고, ‘뜻을 이루다’가 맞기 때문입니다.
나. ‘환난’과 ‘환란’의 사용과 발음
'환난(患難)[환ː난]'은 '근심과 재난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환란(患亂)[활ː란]'은 '근심과 재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환난’이 사용되고 있으니까 [활ː란]이라고 읽는 것이 아니라 [환ː난]이라고 읽어야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나 교인들이 [활ː란]이라고 읽는 것을 보는데 [환ː난]이라고 고쳐 읽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것을 새롭게 알고 나서 살펴보니까 성경에서 그리고 찬송가에서는 ‘환난’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 ‘가르치다’와 ‘가리키다’와 ‘가르키다’
많은 목사님들과 선생님들이 혼동하여 사용하시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가르치다’라고 말해야 할 상황에서 ‘가리키다’ 혹은 ‘가르키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르키다’는 ‘가르치다’의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런데 일상 회화에서 ‘가르키다’를 표준어로 알고 사용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잘못된 말이니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리키다'는 손가락 따위로 어떤 방향이나 대상을 집어 보이거나 알리는 것을, '가르치다'는 지식이나 기능 따위를 깨닫거나 익히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리키는 손가락', '가르치는 선생님'과 같이 다른 단어와 함께 연동하면 기억하기 쉽습니다.
다음은 '가리키다'와 '가르치다'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 가리키다
① 손가락 따위로 어떤 방향이나 대상을 집어서 보이거나 말하거나 알리다.
· 그는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 시곗바늘이 이미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나는 형사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막사 안을 들여다보며 자고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켜 주었다.≪황석영, 어둠의 자식들≫
② (주로 ‘가리켜’ 꼴로 쓰여) 어떤 대상을 특별히 집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내다.
· 모두들 그 아이를 가리켜 신동이 났다고 했다.
· 사람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그를 가리켜 현대판 홍길동이라고 했다.
* 가르치다
① 지식이나 기능, 이치 따위를 깨닫게 하거나 익히게 하다.
· 그는 그녀에게 운전을 가르쳤다.
·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쳐 줌으로 해서 힘을 기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안수길, 북간도≫
· 저는 지금 초등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② (주로 ‘버릇’, ‘버르장머리’와 함께 쓰여) 그릇된 버릇 따위를 고치어 바로잡다.
· 저런 놈에게는 버르장머리를 톡톡히 가르쳐 놓아야 한다.
· 이번 기회에 아이의 버릇을 제대로 가르칠 작정입니다.
③ 교육 기관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다.
· 그는 자식을 가르치느라고 재산을 모으지 못했다.
④ 상대편이 아직 모르는 일을 알도록 일러 주다.
· 제가 당신께 김 사장에 대한 의문점을 한 가지만 더 가르쳐 드리지요.
· 너에게만 비밀을 가르쳐 주마.
· 작가는 독자에게 범인이 누구인지를 끝까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⑤ 사람의 도리나 바른길을 일깨우다.
· 내가 그들에게 바른 도리를 가르쳐 보려 해도 잘되지 않는다.
·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한집안의 화목은 안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가르쳤다.
·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치셨다.
[자료참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출처 : 전국매일신문 - 전국의 생생한 뉴스를 ‘한눈에’(http://www.jeonmae.co.kr)
라. ‘다르다’와 ‘틀리다’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요즘 팀장님 분위기가 조금 틀려지지 않았나요?”,
“나는 남편과 틀려서 자주 싸워요.”
자, 그렇다면 위의 문장에서 틀린 표현을 찾아보세요.
사전을 살펴보면 ‘틀리다’는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를 의미하는 ‘동사’로 ‘답이 틀리다’, ‘계산이 틀리다’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르다’는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를 의미하는 ‘형용사’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와 얼굴이 다르다.’, ‘나는 너와 다르다.’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르다’는 대상을 비교하지만, ‘틀리다’는 객관적으로 옳은 답이 있는 상태에서 대상이 이것에 어긋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요즘 팀장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요?”, “나는 남편과 달라서 자주 싸워요.”가 바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에서 들어보면 마땅히 ‘다르다’를 써야 할 상황에서 ‘틀리다’를 쓰는 일이 아주 많다고 생각됩니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언어가 의식을 반영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다르다’와 ‘틀리다’의 혼용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나와 ’다른 것‘을 불편해하고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틀린 것’으로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곱씹어 볼 일이다. 차이와 다름이 틀림이라는 부정적 언어에 갇히게 되면 모든 것을 옳거나 그른 것의 범주로 규정하려 한다. 이는 편견과 차별, 갈등과 소외의 문제로 이어진다.
출처 : 헤드라인제주(http://www.headlinejeju.co.kr))
2. 우리말 맞춤법 오류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772353#home)
맞춤법 오류의 문제가 SNS나 블로그처럼 비교적 개성이 중시되는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속보 경쟁 속에 인터넷에 올라온 뉴스들에서도 실수가 종종 발견된다. 『어이없이 틀리는 우리말 500』의 저자 여문주씨는 일례로 ‘봄기운 만연’이란 표현을 지적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만연(蔓延)’은 식물의 줄기가 널리 뻗는다는 뜻으로, 전염병이나 나쁜 현상이 널리 퍼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여씨는 “꽃 풍경을 찍어 ‘봄기운 만연’이란 제목을 붙인 사진기사가 많은데, 이 경우엔 ‘봄기운 완연(宛然)’으로 쓰는 게 맞다”고 말했다. ‘묘령(妙齡)’이라는 단어도 비슷한 경우다. ‘묘령’은 ‘스무 살 안팎의 여자 나이’를 뜻한다. 그럼에도 ‘묘령의 남성’이나 ‘묘령의 중년여성’ 같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3. 잘못 사용된 우리말 그리고 바른말 사용을 알아봅시다. 중복되는 것이 보입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ms5051&logNo=120186619260)
* 한문으로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지 않은 것은; 한자로 <1992.8.26. ㅁ텔.뉴스>
한문이란 한자(漢字)로 쓴 글, 즉 문장을 뜻하므로 사람의 이름은 한자로 쓴다고 해야 옳다. 한자와 한문이 잘 구별되지 못하는 예로 이력서 양식의 한자로 쓰도록 된 난에 한문이라고 표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 옛부터 전해 오는 밥상 문화를; 예부터 <1992.9.24. ㅎ텔. 탐방>
오래 전이라는 뜻의 명사는 예이고 옛 사람, 옛 동산과 같이 관형사로 쓰일 때만 옛을 쓴다.
* 사고 많은 곳; 잦은 <1992.4.16. 도로 안내판>
도로 안내 표지로 과거에 사고 다발 지역이라고 써 붙였던 것을 좀 친근한 말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정 기간 동안 사고 횟수가 많은 곳을 가리키므로 사고 잦은 곳이라고 써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 출발 시간은 여덟 시 정각입니다; 시각 <1992.8.23. ㅌ관광 안내 방송>
시각이라는 말을 써야 할 자리에 시간이라는 말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시간은 어느 때로부터 어느 때까지의 사이를 가리키며, 시각은 시간대 위의 한 점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을 가리키므로 시각이라는 말을 써야 옳다.
* 교복이 적어서 못 입는 학생들은; 작아서 <1992.11.19. ㅅ중학교 회의>
작다와 적다, 크다와 많다가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이다.
* 제가 박 미선이야. 우습게 생겼다. 등등으로 말해요; 쟤가 <1992.4.13. ㅇ신문 연예>
저 아이의 줄임은 저 애이고, 이것을 더 줄이면 쟤가 된다.
* 맞는다고 생각하시면 동그라미, 틀리다고 생각하시면 가위표로; 가새표로 <1992.9.7. ㅎ텔. 공개 방송>
×표는 가위 모양이기 때문에 가위표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 표준말은 가새표이다. 가위는 표준말이지만, ×표는 가위표라 하지 않고 가새표를 표준말로 정하였다. 그러나 가새표를 표준말로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 저의(희) 학교는 운동장이 좁아서; 우리 <1992.4.16. ㄱ중학교 회의>
회사, 학교는 공공 집합체이므로 저의 회사, 저의 학교라는 말은 회사나 학교가 개인 소유물일 경우, 말하는 이가 손위의 듣는 이 앞에서 쓸 수 있다.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 회사, 우리 학교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 사전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당황스러웠을 거예요; 당황했을 <1992.4.16. ㅎ텔. 극>
명사 당황에 -스럽다를 붙여 형용사를 파생시켰는데 허용되지 않는 형태이다.
* 어둠 속을 날으는 일 역시 그만두게 되어; 나는 <소설: 갈매기의 꿈>
* 그가 서 있는 곳은 낯설은 해변이었다.; 낯선 <1992.9.30. 취급 설명서>
* 손잡이를 앞 방향으로 밀은 상태에서; 민 <1992.9.30. 취급 설명서>
날다, 낯설다, 밀다와 같은 단어는 학교 문법에서 불규칙 용언으로 다루지는 않으나 -는/-은과 같은 어미 앞에서 ㄹ 음운이 규칙적으로 탈락한다. 따라서 날다, 날고, 날아, 나는, 날면,…; 낯설다, 낯설고, 낯설어, 낯선, 낯설면,…; 밀다, 밀고, 밀어, 민, 미는, 밀면,… 과 같이 활용한다.
* 재현이네 들려 부모님을 만나 보았다; 들러 <1992.9.28. 상담 사례집>
* 농축된 가스를 들여마셨을 때; 들이마셨을 <1992.9.25. ㅅ중학교 유인물>
기본형은 들리다, 들여마시다가 아니라 들르다, 들이마시다이므로 들러, 들이마셨을과 같이 활용한다.
* 군것질을 삼가하고 불량 식품을 사 먹지 않는다; 삼가고 <1992.4.16. ㅅ중학교 유인물>
삼가다라는 동사의 형태를 삼가하다로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많다. 삼가다는 삼가고, 삼가는, 삼가라, 삼가지,… 등으로 활용한다.
* 또 일거리 가지고 갈려고?; 가려고 <소설: 바람꽃은…>
*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할려고 해도; 공부하려고 <1992.9.28. 상담 사례집> 가다, 공부하다는 가려고, 공부하려고로 활용한다.
* 푸짐한 음식을 운동장 주변에 벌려 놓고; 벌여
벌이다와 벌리다를 혼동한 사례이다. 벌이다는 물건을 늘어놓다의 뜻이고, 벌리다는 두 사이를 넓게 하다의 뜻으로 팔을 벌리다처럼 쓰이므로 벌이다의 활용형인 벌여를 써야 한다.
* 롯데 아몬드 통채로 먹겠습니다; 통째, 통짜로 <1992.8.26. ㅁ텔. 광고>
나누지 않고 덩어리 물건으로라는 뜻의 부사로는 통째, 통짜로라는 말이 표준이다. 산 채로처럼 의존 명사 채가 쓰이는 경우와 구별된다.
* 출석 회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과반수의 <1992.4.16. ㅇ친목회 규약>
과반수란 말에 이미 반이 넘는다는 뜻이 있으므로 뒤에 이상이란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 성원이 충족되었으므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되었으므로 <1992.4.15. ㅅ텔. 코미디>
성원(成員)이라는 말이 회의를 성립시키는 데 필요한 인원이 모였다는 뜻이므로 뒤에 충족되다라는 말을 덧붙이면 겹치기 말이 되어 어색하다.
* 참석한 연사들이 한 연사의 연설에 박수를 치고 있다; 하고 <1992.9.10. ㅈ신문 사진 설명>
* 문학 작품을 읽게 되면 감동을 느끼게 되고; 하게 되고 <1992. 중학 국어 2-1>
* 그렇게도 모진 결심을 먹고 삼년 동안이나; 결심을 하고 <소설: 김삿갓>
* 이혼 땐 부인에 재산 반 줘라; 부인에게 <1992.6.24. ㅈ신문 표제>
부사격 조사 -에는 모두 -에게로 고쳐야 한다. 앞에 붙은 체언이 [+사람]일 경우는 -에게를 써야 하고, [-사람]일 경우는 -에를 쓴다(엄밀히 말하면 [+동물]임). 그리고 -에는 -에게의 줄임으로 쓸 수 없다. 올바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람] 등록금을 은행원에게 냈다.[-사람] 등록금을 은행에 냈다.
*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있으시겠습니다. <1992.9.28. ㅅ중학교 조회>
위에서 계시겠습니다는 주어 말씀이에 대한 서술어이므로 높임의 호응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서술어 있다를 택하면 상대에게 존대하는 말로 있겠습니다가 되고, 이것을 다시 주체인 교장 선생님에 대해 간접 존대를 해 주면 있으시겠습니다로 쓰게 된다.
* 시험지 네 장만 더 주세요; 넉 <1992.9.16. ㅅ중학교 교실>
* 곗돈이 세 달치나 밀렸어요; 석 <1992.10.8. ㅁ아파트>
뒤따르는 단위 명사에 따라 앞에 쓰이는 수관형사의 형태가 달라지는 경우인데, 자주 틀리는 예로 너 말, 서 돈; 넉 되, 석 자 와 같은 것들이 있다.
* 의사, 약사에게 상의하십시오; 와 <1992.9.16. ㅎ텔. 광고 자막>
서술어 상의하다는 서로 의논한다는 뜻이므로 앞 체언에 붙은 부사격 조사는 -와를 써야 어울린다. 만일 조사 -에게를 쓴다면 뒤에 오는 서술어로는 문의하다와 같은 동사를 써야 어울릴 것이다.
* 좋은 식단은 이렇게 실시합니다; 식단제는 <1992.9.29. 홍보 유인물>
주어 식단은과 서술어 실시합니다의 호응 관계가 어색하다. 주어를 식단제는으로 고치든지, 주어 식단은을 살린다면 서술어로는 차립니다와 같은 동사를 취해야 자연스럽다.
* 이 종 때문에 귀가 멀었어요; 먹었어요 <1992.9.29. 영화: 노틀담의 꼽추>
귀먹다로 써야 할 말을 눈멀다의 -멀다로 잘못 쓴 경우이다.
* 학생들에게 벌을 세우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벌씌우는, 벌주는 <1992.5.15. ㅅ중학교 회의>
벌을 당하다라는 뜻의 동사는 벌쓰다이고, 이 말의 사동사는 벌씌우다이다.
* 맛있게 만들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바랍니다. <1992.10.3. ㅅ텔. 요리>
바라겠습니다는 텔레비전,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즐겨 쓰는 단골 말투이다. 바라겠습니다에서 -겠-이라는 형태소는 미래, 추측, 희망 등의 의미를 지닌 선어말 어미이다. 바라겠습니다는 바라다라는 낱말에 같은 의미를 지닌 -겠-을 겹쳐 썼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원하다라는 말에 -겠-을 붙여 원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와 같다.
* 다음 주 교통 지도 학급은 2학년 7반이 되겠습니다; 7반입니다. <1992.6.18. ㅅ중학교 회의>
되다라는 동사를 필요 없이 말꼬리에 덧붙이는 사례가 흔하다. 심지어는 1500원입니다. 하면 될 것을 1500원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 참석하지 못한 회원께도 년회비를 갹출하기로 하였습니다; 연회비 <1992.10.21. ㅇ친목회 안내문>
* 님 그림자; 임 <1992.8.12. ㅁ텔. 가요 제목 자막>
<한글 맞춤법> 제5절의 규정을 보면, 한자음 녀,뇨,뉴,니가 단어 첫머리에 올 적에는 여,요,유,이로 적고(제10항), 랴,려,례,료,류,리는 야,여,예,요,유,이로(제11항), 그리고 라,래,로,뢰,루,르는 나,내,노,뇌,누,느로(제12항) 적도록 되어 있다. 님은 15세기 중세 국어에서는 님으로 적었으나 현대 국어에서는 임으로 적는다. 사람 이름 류 석우처럼 버들 유 자 유(柳)씨들이 류로 적고 있는데 이것도 제11항에 따라 유로 적어야 할 것이다.
* 신입생 환영회 야유회 때, 동구능으로 갔었던가?; 동구릉 <소설: 바람꽃은…>
신 순여, 동구능은 두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으므로 본음대로 신 순녀, 동구릉으로 적어야 한다.
* 이를 실천하고 있아오니 고객 여러분의; 있사오니 <1992.8.27.ㅅ호텔 안내문>
있사오니, 가겠사오니 따위는 있아오니, 가겠아오니라고 적더라도 발음이 같으니까 혼동을 일으키는 모양인데, 있사오니의 사는 낮춤을 나타내는 선어말 어미이므로 앞뒤의 음운 환경에 의해서 형태소가 바뀔 수 없다. 죽사오니를 죽아오니로 표기했을 경우를 보면, 형태소 사의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 집들이, 돐, 백일, 개업식, 회갑 등의 행사를 치르실 수 있습니다; 돌 <1992.10.16. 광고 유인물>
옛날 맞춤법에 주년(週年)을 나타낼 때는 돐이라고 쓰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행 맞춤법에서는 첫돌의 줄임인 돌도 돌, 주년(週年)을 나타내는 돌도 돌이라고 표기한다.
* 일장기 새긴 셔츠, TV 방영이 왠 말; 웬 <1992.8.4. ㅈ신문 표제>
위는 TV 방영이 어찌 된 말이냐는 뜻이므로 웬을 써야 한다. 이것은 왜 그러느냐?의 왜에서 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자국 <1992.10.11. ㅅ텔. 노래 가사 자막>
* 이제부터 치킨도 베스트 후랭크라고 불러 주십시요; 주십시오. <1992.9.22. 버스 안 광고>
출처: 구법회 선생님(인천 산곡중학교)
4. 쉽게 틀리는 여러 가지와 바른 사용법을 알아봅시다.
값을 치루었다(x)→ 값을 치렀다 거칠은(x)→ 거친 곰곰히(x)→ 곰곰이
껍질채 먹었다(x)→ 껍질째 먹었다 끔찍히(x)→ 끔찍이 가던지 오던지(x)→ 가든지 오든지
구비구비(x)→ 굽이굽이 금새 동나다(x)→ 금세 동나다 객적다(x)→ 객쩍다
까탈스럽게(x)→ 까탈지게 꼭둑각시(x)→ 꼭두각시 하는구료(x)→ 하는구려 귓대기(x)→ 귀때기
끄나불(x)→ 끄나풀 낚지볶음(x)→ 낙지볶음 내노라하다(x)→ 내로라하다
넉넉치 않다(x)→ 넉넉지 않다 넓다랗다(x)→ 널따랗다 또아리(x)→ 똬리 딱다구리(x)→ 딱따구리
먹을껄(x)→ 먹을걸 몇일 동안(x)→ 며칠 동안 모자르지(x)→ 모자라지 무릎쓰고(x)→ 무릅쓰고
멀지 않아(x)→ 머지않아 무우(x)→ 무 멋적다(x)→ 멋쩍다 나의 바램(x)→ 나의 바람
불나비(x)→ 부나비 벌을 서다(x)→ 벌쓰다 뻐꾹이(x)→ 뻐꾸기 사죽을 못 쓰고(x)→ 사족을 못 쓰고
삵괭이(x)→ 살쾡이 새앙쥐(x)→ 생쥐 시험을 치루다(x)→ 시험을 치르다 삭월세(x)→ 사글세
삼가하고(x)→ 삼가고 서슴치 않고(x)→ 서슴지 않고 등살에(x)→ 등쌀에 어떻해(x)→ 어떡해
에이는 듯한(x)→ 에는 듯한 옛부터(x)→ 예(로)부터 오랫만에(x)→ 오랜만에 오손도손(x)→ 오순도순
왠일이니(x)→ 웬일이니 우뢰(x)→ 우레 애닯다(x)→ 애달프다 옳바르다(x)→ 올바르다
익숙치 않아(x)→ 익숙지 않아 잔듸밭(x)→ 잔디밭 지리하다(x)→ 지루하다 잠궜다(x)→ 잠갔다
찌푸리쟎니(x)→ 찌푸리잖니 칫과(x)→ 치과 켸켸묵은(x)→ 케케묵은 한갖(x)→ 한갓
햇님(x)→ 해님 할려고(x)→ 하려고 힘겨웁다(x)→ 힘겹다
[참고] 국어 잘못된 표기 (잘못된 표기 / 바른 표기)
(우리의) 바램 / 바람 가던지 오던지 / 가든지 오든지(선택은 '든')
먹든 밥 / 먹던 밥 (과거는 '던') 강남콩 / 강낭콩 (자장면)곱배기 / (자장면)곱빼기
곰곰히 / 곰곰이 껍질채 먹었다 / 껍질째 먹었다 금새 / 금세 괴로와 / 괴로워
끔찍히 / 끔찍이 넉넉치 않다 / 넉넉지 않다 네째 / 넷째 멋장이 / 멋쟁이 뒷편 / 뒤편
머릿말 / 머리말 미쟁이 / 미장이 두째 / 둘째(열두째) 아지랭이 / 아지랑이 어떻해 / 어떡해
실증 / 싫증 아뭏든 / 아무튼 설겆이 / 설거지 우뢰(와 같은 박수) / 우레(와 같은 박수)
웬지 / 왠지 오랫만에 / 오랜만에 으례 / 으레 저희 나라 / 우리 나라 있슴 / 있음
잠궜다 / 잠갔다 햇님 / 해님 한약을 다리다 / 한약을 달이다 치루다 / (값을)치르다
5. 맞춤법을 모두 숙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http://www.korean.go.kr)에선 표준국어대사전 검색이 가능합니다. 온라인 게시판을 이용해 법률 및 규정의 해석이나 시험 문제의 정답 등을 제외한 맞춤법, 어문 규범, 어법 등에 대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전화상담도 가능한데 국어생활종합상담실(가나다전화, 1599-9979)을 이용하면 무료로 국어 전반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고, 국립국어원 트위터를 이용해도 됩니다. 부산대와 나라인포테크가 함께 개발한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나 포털사이트 등에서 제공한 맞춤법검사기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6. 성전이라는 말의 사용
은성아, 히브리서를 공부한다는 것은 굉장히 복된 일이다. 모든 성경이 귀중하고 잘 배워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히브리서를 통하여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큰 차이를 확실히 배우게 된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신약 시대의 신자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가톨릭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교회 생활을 보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힘썼던 것들이 많이 무너지고, 점점 개신교와 가톨릭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교회 생활이 혼란스럽게 되어버린 오늘날 히브리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개인과 교회의 신앙생활을 바르게 고쳐가기를 바라면서 최근에 나에게 보내온 히브리서에 관한 글을 보내주니 잘 읽기를 바란다. 나도 정말 많이 배우고 이전의 생각을 고치면서 서둘러 너에게 보내야 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읽고 나서 혹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다소 어렵고 신비하기까지 한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역사 속의 다른 어떤 영적인 인물들이나 혹은 우주의 그 어떤 영적 존재들보다도 왜, 어떻게, 얼마나 더 우월하신지에 대한 논의로 시작합니다. 이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진정한 제사장으로 오셨는데, 그의 제사장 되심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계열을 뛰어넘어, 마치 율법이 미처 주어지기 전인 아브라함 시대의 멜기세덱과도 같은, 율법 위의 신적인(divine) 계열로 오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며(“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7:19) 오직 예수의 제사장 역할만이 율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8장에서부터 10장까지는 예수의 오심이 구약(옛 언약)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어떻게 하여 예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는 확실한 보증이 되신 것인지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3-10:18을 보면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을 더 좋은 제물(속죄 제물)이라고 강조합니다.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실체가 아니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드리는 똑같은 희생 제사로써는 하나님께로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제사 드리는 사람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제사 드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겠습니까?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5-7; 시편 40:6-8 인용)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이 뜻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오직 한 번 바치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오직 한 번으로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시편 110:1 인용) 그리고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판이 되게 할 때까지”(시편 110:1 인용)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금생의 모든 비참함과 사망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9문).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 바로 제사 제도였고, 그것은 장차 참 제사, 완전한 제사를 드릴 그리스도의 제사를 예표하는 그림자이었습니다(히 9:1-14). 하나님 자신이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인간 세계에 오셨고,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성자께서) 친히 두 번째 아담(인간)이 되셔서 의로운 희생을 치르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제사 제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18에서처럼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가 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 및 속죄제물 되심의 결론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제사는 “오직 한번으로 영원히”(once for all) 완벽한 제사입니다. 율법의 모든 그림자와 모형은 이제 예수님에 의하여 다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하신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 사함을 얻기 위한 땅에서의 모든 종교적인 의식들은 불필요해졌습니다. 우리는 10:10에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거룩함을 입었다”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14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영단번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케”라는 단어는 “완벽하게 하다”(teleioo)라는 동사의 현재완료형입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써, (믿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바울의 용어대로 하면, 의롭다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또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완벽하게” 하셨으며 그 효능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영원한 직분입니다(히 7:24; 히 8:1). 다시 말해서,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의로운 자로서 완벽하게 영원토록 세우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히 4:14-16; 10:19; 엡 3:12).
이제 이런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서 오늘에 적용해야 할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설교자들 중에는 가정 제단, 새벽 제단을 쌓으라고 하거나 우리가 제단이 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배당 청소를 ‘성전 미화’라고 하고, 강단 꽃꽂이를 하면서 ‘성전 꽃꽂이’라고 말합니다. 예배당을 가리켜 ‘대성전’ ‘소성전’ ‘제1성전’ ‘제2성전’ ‘지하성전’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제단이란 용어는 구약 시대에 성전 뜰에서 희생 짐승을 제물로 드리던 곳입니다. 소나 양을 잡아서 불사르는 제단인 번제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대속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히 10:10, 12) 예수님 이후의 2천 년 동안 교회는 더 이상 이런 구약 시대의 희생 제물이나 제단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은 ‘제단’이라는 말 대신에 ‘강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제단을 쌓는다’는 말을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개신교회에서 목사님을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라는 말 대신에 ‘예배당’ 또는 ‘교회당’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는 제단이 아니라 ‘강단’이 있고, ‘성찬상’과 ‘세례대 혹은 세례반’이 있을 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소제를 제외하고는 짐승을 제물로 하여 제단에서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등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신자들이 제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러 가면서 성전에 간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예배당(교회당)에 간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은 예배드리는 곳, 즉 장소로서의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성령께서 내주(內住)해 계시는 성도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3:16; 6: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단번에(히 10:10)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심으로 더 이상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는 성전 제도가 필요 없게 되었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요 4:24).
한국 교회의 예배를 지배하고 있는 제사적 용어와 상징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목회자를 제사장으로 보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축제적 응답’으로서의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는 한,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 혹은 물질적인 복을 구하기 위해 제사 드리는 심정으로 예배에 임하게 됩니다. 이미 주어진 은혜와 복에 눈뜨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으려면 무엇인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바치며 그 대가(?)를 바랍니다. 삶의 예배를 소홀히 하고 건물인 예배당에 모이는 공적 예배에 집착하며, 공적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잘못에 빠집니다. 따라서 예배를 제사로 오해하게 할 만한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데 예배 시간에 자주 듣게 되는 ‘제물’, ‘제사’, ‘제단’ ‘성전’ 등의 용어들을 가능한 한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 교회와 종교개혁시대의 전통이고, 특히 장로교회의 전통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건물 속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단에서 미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성전이란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오늘날 대성전(大聖殿)은 교황에 의해 특전이 부여되어 있으며, 역사, 예술, 신앙적인 면에서 중요성이 인정되는 성당인데, 이중에 상급 대성전은 교황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대와 성년에만 열리는 성문이 있으니 예를 들어 라테라노 대성전, 베드로 대성전, 성 바오로 대성전, 성모 마리아 대성전(四大 Basilica)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급 대성전은 휘장, 종, 성가대 특별 복장의 사용 등이 특전으로 부여되어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성전은 예루살렘의 성십자가 대성전, 카타콤바의 성 세바스티아노 대성전, 트란스테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 12사도 대성전, 빈콜리 성 베드로 대성전,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건물 내외를 아름답고 장엄하게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제단에서 촛대를 봉헌하고 십자가를 모신 후 제대 앞에 꽃을 봉헌하는 순서도 있습니다. 성체성사요 성찬례인 '미사(Missa)'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친 것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제사이며, 가톨릭 교회 생활 전체의 원천이자 정점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모든 직무나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톨릭의 예전이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분별없이 개혁교회가 건물을 웅장하게 짓고자 하고, 내부 장식을 화려하게 하며, 특히 강대상 주변에 꽃꽂이를 많이 하여서 예배의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개혁교회에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성도들의 모임이요 교제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인 교회당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당은 성도들이 모여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건물 때문에 찾기보다는 그곳에 복음이 있고 성도의 교제가 있기 때문에 찾게 될 때 그 교회는 참된 개혁주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히브리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모든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 곳은 율법을 주던 시내 산이 아니라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는 말씀에서 이제는 제사를 드리는 땅의 생활을 다 끝낸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온 산에 이른 자들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이며,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며,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의 뿌린 피로 인해 거룩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가게 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불러냄을 받고 거룩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시온 산에 이른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다만 자신을 시온 산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택하심과 불러내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만 자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국에 이른 자의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들이 이른 시온 산과 예루살렘은 이 지상의 장소가 아니라 하늘 성전을 가리킵니다. 시온 산과 예루살렘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것이 천상의 실제에 대한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도들이 예배할 때 이르게 되는 곳은 이 지상의 어떤 곳이 아닌 하늘입니다. 그 하늘은 우리가 만질 수 없는 곳이 아닙니까? 이런 대조를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성도들이 이른 곳은 만질 수 있는 곳이었다고 먼저 말했습니다. 신약 성도들이 예배할 때는 신자들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늘에까지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예배하는 곳에는 하늘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제사는 구약 시대나 가톨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 13:15-16)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의 제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선행의 제사”입니다.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는 제사를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뿐만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도록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엡 2:10; 딛 2:14).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성전’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고 주의하자는 것입니다. 첫째로 교회의 직분자들이나 먼저 믿은 분들이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교인들이나 나중에 믿게 된 분들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특히 설교를 하거나 대표기도를 하면서 예배당 건물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다른 교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아마 예배당을 새로 건축을 했을 때 이런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 건축’보다는 ‘성전 건축’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입니다. 장로교 교단의 중요한 지도자라고 인정받는 목사님들도 ‘성전 건축’이라는 말을 자주 쓰시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예배당 건축’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경건하지 못하고 신앙심도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둘째로 구약성경을 공부할 때에 성전을 사모하고 사랑한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교인들의 마음에 성전이라는 것을 교회나 예배당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전을 사모하거나 성전에 올라가는 시편을 공부하면서(시 27:4; 84편; 비교 왕상 8:44-45) 우리도 이렇게 교회에 모이기를 사모하고 힘써야 한다는 강조를 하면 교인들의 마음에는 예배당 건물이 교회라고 하는 생각이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공부할 때에 성전과 교회의 시대적 차이나 구속사적 의미에 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시켜야 합니다. ‘교회에 모인다’는 말보다는 ‘교회로 모인다’는 말이 더 안전할 것입니다. 더구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성전에 가서 가르치시는 것이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교인들이 성전에 모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성전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나 바울 사도가 성전에 가서 한 것은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전도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의 경우엔 따로 교인들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게 되며,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물론 필요한 경우에, 그리고 핍박이 강하지 않고 집회의 자유가 허락될 때까지는 성전에 모이는 것이 계속되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전에 갈 수 있는 거리 안에서는 어렵지 않았겠지만 점점 이방인들의 교회가 서게 되었을 때에는 성전에 가기보다는 교인들의 집에서 모이게 되었고, 혹시 회당처럼 건물을 준비하여 모이는 곳으로 사용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신서를 보면 로마 교회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였으며(롬 16:5), 고린도 교회는 아마도 바울과 온 교회의 식주인이었던 가이오의 집에서 모인 것으로 생각되고(고전 16:23; cf. 고전 1:14),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였으며(몬 2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자의 집에서 모였고(골 4:15), 또 에베소 교회도 처음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습니다(고전 16:19). 이처럼 초대 교회는 성도의 집(가정)에서 모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의 ‘가정’이란 장소로서의 가정을 말합니다. 즉, 교회당 건물이나 빌딩이 아니라 성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참고로 AD 70년에 유대를 공격한 로마 장군 티투스는 성전을 차지하여 로마 황제와 로마 신들에게 헌정된 신전으로 변모시키고 싶어했으나 성전은 70년 8월인 티샤 베아브 9/10일에 점령되어 파괴되었고, 불길은 예루살렘의 거주 지구로 퍼졌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는 예수님의 예언(마 24:2)대로 성전은 무너졌으므로 유대인들이 거기에 가서 통곡의 벽에서 울면서 기도할 수는 있지만 이전처럼 제사를 드리는 시대는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제사 중심이었던 예배가 이제는 회당을 중심한 토라 연구와 기도 중심의 예배로 변화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성전을 생각하며 성전과 관련한 건물을 만들고, 제사와 관련한 용어를 즐겨 사용하려는 것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는 잘못된 자세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는 이름을 사랑하며 자랑스러워하며,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새 시대의 예배와 교제를 즐거워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셋째로 찬송가의 가사 때문에 잘못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주 영광 이 성전에 가득히 넘치네(찬송가 17장)”라는 찬송이나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찬송가 208장)”라는 찬송을 부르다 보면 무의식 중에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찬송가는 사람들이 작사를 하기 때문에 가끔 오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348장의 “마귀들과 싸울지라”라는 가사입니다. ‘마귀’는 단수인데, ‘마귀들’이라고 함은 신학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은성아, 좀 복잡한 것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대단히 중요한 점을 지적해 주고 있지 않니? 이제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나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고 우리를 온전히 의롭다 하심을 기뻐하며, 어떤 핍박이나 어려움도 믿음으로 이기며, 찬송의 제사와 선행의 제사를 드리면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히 13:20-21)라는 말씀에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물’, ‘제사’, ‘제단’ ‘성전’ 등의 용어들을 쓰지 말고, ‘예배’와 ‘강단’과 ‘예배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자랑스러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로 모이기를 힘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