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인홍(鄭仁弘)이 강우(江右)의 거벽(巨擘)이라는 말을 들은 지가 여러 해인데도 그의 언행(言行)의 실상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였다. 접때 성균관 유생들의 통문(通文)에 후록(後錄)된 것을 통하여 비로소 이른바 사집(師集)의 발문(跋文)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해 보고, 그에 대해 한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비단 퇴계(退溪) 선생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가 스승으로 삼는 남명(南冥) 선생에 대해서도 또한 참되게 알아서 제대로 형용(形容)하지 못하였으며, 비단 의리(義理)의 본질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의 말 한마디에 대해서도 또한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였다. 붓을 댄 곳마다 스승의 잘못을 드러냈고, 마음의 문제점을 나타내지 않음이 없다.
남명(南冥)은 일찍이 구암(龜巖)의 선비(先碑)를 지으면서 극도로 포장(褒奬)하고 허여(許與)하였는데, 선생께서 그 글에서 생소하고 껄끄러운 몇 마디 말을 고쳐서 비석에 새겼으니, 세 분이 도(道)는 비록 같지 않았다 하여도 교분은 일찍이 본디 두텁지 않음이 없었다. 만일 뒷날에 뜻이 맞지 아니하여 서먹해졌다면, 인정을 잘 하지 않는 남명이 사람을 칭송하는 문자를 즐겨 지었겠는가. 구암의 사람됨은 내가 비록 자세히 모르지만 권문(權門)에 붙좇는 행적이 실제로 있었다면, 절교하고 더러워하며 꾸짖어야 하며, 감추어야 할 한 가지 일을 반드시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 반평생을 알고 지내면서 반드시 두터운 믿음으로 사귀었으니, 비문(碑文)을 쓴 뒤에야 오랜 친구와 가볍게 절교했겠는가.
군자는 사귐을 끊어도 나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나니, 사귐은 끊을 수 있을지라도 그 말이 어찌 그리 악한가? 아내를 내쫓아도 시집갈 수 있게 하고, 교제를 끊어도 사귈 수 있게 하는 것은 옛사람의 의(義)인데, 행할 수 없단 말인가?
사람을 알기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구암에 대해 다만 같은 조정에서 벼슬한 까닭에 오가는 교분이 있었지만 집안의 구석진 데서 일어난 일은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남명의 경우는 멀지 않은 곳에 이웃하여 살면서 그의 사람됨을 알아챈 것이 어째서 그리 늦은가? 사람은 각자 생각이 있거늘, 같이 은거하지 않았다는 까닭에 그의 사람됨을 단정할 수 있는가?
괴이한 것은 스승의 말에서 한편으로는 “배움에 열중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순박ㆍ성실한 공부에 몸을 맡긴다.”라고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종〔中廟〕과 인종〔仁考〕 두 대왕(大王)의 복상(服喪)을 한 것은 충효(忠孝)가 진실로 직분(職分) 안의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제자의 말에서는 하나는 “권문(權門)에 붙좇았다.”라고 하고, 하나는 “명리(名利)의 마당에 출몰했다.”라고 하였다. 그 스승이 생각지도 않은 글을 지어 올리자마자, 그 제자는 온전히 한다며 혀를 놀려 모함한다. 스승의 말이 옳다면 제자의 말이 그른 것이고, 제자의 말이 옳다면 스승의 말이 그른 것이니, 두 사람은 여기에서 반드시 하나에 자리해야 한다. 설령 정인홍이 말한 것처럼 절교할 만한 죄가 있다면 남명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퇴계 선생보다 심한 것이니, 그가 퇴계 선생을 공격하는 것이 바로 그 스승을 공격하는 까닭이 된다. 남명이 평소 말하지 않은 것인데도 한번 신뢰를 잃은 까닭에 문도(門徒)가 편을 가르게 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세 분이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뒤에 이르러 바야흐로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억울하게 죄를 더하는 것이 필시 날조하여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니, 군자의 마음씀이 진실로 이같이 음험하고 치우친 것인가?
구암이 약속을 등진 잘못은 절교에 이를 것이 아니다. 절교할 죄는 반드시 대고(大故)에 관계된 것이다. 벗 사이에 대고로 절교할 만한 죄는 없거늘 옹졸하게 작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서 반평생 사귄 벗과 절교하니, 저 상사에 노래 부른 것은 그 죄가 도리어 신뢰를 잃은 것보다 가벼워서 군자는 절교하지 않았는가? 남녀가 야합하는 일은 진실로 《시(詩)》ㆍ《춘추(春秋)》에 드러나 있지만 성인은 그 일로 인하여 경(經)에 기록해서 세상에 전하여 징계를 보이는 것에 불과하였다. 위 선공(衛宣公)은 천하의 큰 악인이나 동래 여씨(東萊呂氏)는 오히려 잘못을 고칠 가능성이 있다고 했으니, 군자가 마음 쓰고 남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이 엄격하지만 너그러웠다. 그들이 과연 사소한 것을 마음속에 쌓아, 갑(甲)에게 성난 것을 옮겨 오랜 친교를 끊어 버리고도 변할 줄 모르는 것을 남명처럼 종신의 대업으로 여겼는가.
경연(經筵)에서 강설(講說)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송나라 때 집요했던 사람들의 죄이다. 그들이 마땅히 강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권장하려는 까닭이 아니라 경계하려는 것이었다. 군자는 경사(經史)에서 이러한 일을 만나면 척연(惕然)히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장차 마치 자기까지 더럽힐까 걱정하기에 겨를이 없다. 그러나 정인홍은 그런 일을 맛보고 받아들여서 그를 일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말재주를 부려 잘못을 번드레하게 꾸미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으니, 심술(心術)의 잘못이 멀리 천 리(里)의 거리에 그칠 뿐이 아니다. 세상을 피해 살며 근심함이 없고, 떳떳한 덕을 지키고 굽히지 않는 것은 비록 중용(中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 입각(立脚)한 곳을 생각해 보면 정정(亭亭)하고 교교(皎皎)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치 천사 만종(千駟萬鍾)을 돌아보지 않고 밭두렁에서 요순(堯舜)을 즐기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이 혹여 이 말을 더하고, 자제(子弟)된 사람이 그것을 듣는 다면 반드시 지언(知言)이라고 생각하지 정인홍처럼 발끈 성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옛사람 중에 단장취의(斷章取義)했던 일이 많이 있었는데, 치규(穉圭)가 언륜(彦倫)에게 쓰면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고, 군자가 벗들에게 쓰면 공평하고 실제에 맞는 것이니, 마치 ‘부유하게 되려면 인(仁)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양호(陽虎)가 말하면 인을 해치게 되는 것이고, 맹자가 인용하면 인을 권장하게 되는 것과 같다. 하물며 이 몇 마디 말이 실로 남명에게 영광이 있음에랴. 남명은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아니했다는 명성이 있고, 구암은 벼슬하여 높이 출세했다는 명성이 있으니, 나아감과 물러남에 대해 이름한 것을 어찌 달리 보겠는가. 반드시 숨은 사람을 명류(名流)로 삼고자 하고, 벼슬한 사람은 명류가 되지 못한다면 고요(皐陶)ㆍ기(虁)ㆍ이윤(伊尹)ㆍ여상(呂尙)은 명류가 되지 못하고, 노자(老子)ㆍ장자(莊子)ㆍ석씨(釋氏)는 이제 명류가 될 것이다. 맹자가 비록 제후를 만나보지 않았지만 제후가 예(禮)로써 앞세우면, 또한 일찍이 응답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 언제 담을 넘고 문을 잠그는 지나친 행동이 있었던가.
장광(莊光)의 도리에 관해서는 비록 선유(先儒)가 운운한 것이 있지만 사실 한(漢)나라 말엽에 그 사람을 귀히 여겼을 뿐이지, 실제로는 덕업(德業)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간주할 수 없다. 이제 곧장 그 스승을 장광의 반열에 두고, 한 가지 절개라는 이름을 면하려고 하지만 유(類)를 알지 못하는 것이 심하다. 남명의 일생에 걸쳐 애쓴 공부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부끄럽지 않은 것인데, 마침내 그 제자의 말로써 헤아려 보면, 사물(事物)에 연루되어, 깨끗이 씻어내지 못하였으니, 한 가지도 옛사람의 자취에 합당함이 없다. 남명이 성인(聖人)의 지위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속으로 생각건대 그가 응하지 못함이 이렇게나 심했는지 걱정스럽다.
우리 퇴계 선생은 이와는 다르다. 마음 씀씀이는 겸손하셨고, 사람을 대함에는 충심(忠心)이셨으니, 조 징군(曺徵君)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도(道)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성현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후학을 가르치는 데 엄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언어(言語)와 서찰〔書尺〕은 반드시 추호(秋毫)라도 분석하여 지극히 정당한 도리로 귀결되기를 구하였고, 벼슬하고 그만두고 숨고 나타남에 반드시 의(義)에 부합하여 내 마음이 안정되도록 힘썼다. 그 언행(言行)의 기상(氣象)과 나가서 시행하고 물러나 간직함은 저절로 남명과 같지 않으니, 후세(後世)의 사람들이 비록 억지로 같게 하고자 해도 어찌 그리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사람을 충심으로 대하셨기에 성현(聖賢)의 도리로써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구암이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의 여하에 달린 것이지, 또한 선생께 무슨 손상됨이 있겠는가. 붕우(朋友)의 관계 또한 그 도리를 다했을 뿐이다. 한 가지 일에 잘못한 것을 가지고 곧바로 가볍게 절교할 수 없는데, 그리한 것이 내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아, 정인홍이 남명에 대해서 알지 못함이 이처럼 심한데, 하물며 선생에 대해서랴. 정인홍을 아는 사람들은 단지 그가 조정(朝廷)의 득실(得失)과 인물의 장단(長短)과 수령의 선악〔臧否〕을 논의하기를 좋아하는 것만 보았는데도, 모두들 악행을 미워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여길 따름이다. 이제 그의 기상을 속으로 살펴보니 모두 분노에서 나온 것이며, 의리(義理)에 대해서는 거의 식견이 없다. 이 때문에 성정(性情)이 올바름을 얻지 못하고, 드러내어 논하는 것이 이처럼 잘못되고 어긋난다. 만약 남명으로 하여금 알게 한다면, 마땅히 저승에서 북을 울리면서 그를 공박하여 사문(師門)에 누가 되지 않게 해야 하며, 그로 하여금 문인의 반열에 제멋대로 의탁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 사람의 병폐는 자기 밭을 버려두고 남의 밭을 김매는 것이니, 이러한 망령된 행위가 있지 않은 사람이 드물어서 식견이 있는 이들에게 비루함을 끼치는 것이다. 하물며 그는 지금 당하(堂下)에 있으면서 당상(堂上)에 있는 분의 곡직(曲直)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힘써 다스려야 할 부분이니, 거듭 길게 이야기하여 한가하게 더불어 다투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스승과 제자 사이에 멋대로 서로 높이는 것이 마침 사문(師門)에 누가 되기에 충분한데도 스스로 알지 못하기에 애오라지 본 것을 집어내어 동지들과 생각하여 확정할 뿐이다.
鄭仁弘南冥集跋語辨
余聞鄭仁弘爲江右巨擘者有年。未知其言行之實如何。頃因館儒通文後錄。始乃反覆其所謂師集跋語者。而得其一二。非惟不知退溪先生。於其所師南冥先生。亦不能眞知而善形容。非惟不知義理之眞。於人之言語一節。亦不能盡其意。筆頭到處。無非彰師失而呈心疵耳。南冥嘗撰龜巖先碑。極其褒許。先生改動其僻澁數語而書諸石。則三老道雖不同。交未嘗不素厚也。苟如後來之齟齬。南冥之少許可。肯撰出揄揚人文字耶。龜巖爲人。愚雖未詳。趨附權門。實有其跡。則絶交醜罵。不必待黶然一事。而相知半世。必待交孚之厚。撰碑之后而輕絶久要耶。君子交絶。惡言不出於口。其交可絶。而其言何太惡耶。出妻令可嫁。絶交令可交。古人之義。不可行耶。知人固未易。然先生之於龜巖。只以同朝之故。有往來之分。其屋漏之事。誠非隃億。若南冥隣居不遠。而覺其爲人何太晚耶。人各有意。其可以不同隱之故而斷定其爲人耶。所可怪者。師之言。一則曰篤學不倦。一則曰己於朴實頭做工。一則曰服 中廟仁考兩大王喪。忠孝固職分內事也。弟之言。一則曰趨附權門。一則曰名利場中。頭出頭沒。纔登厥師不虞之筆。旋陷厥弟求全之舌。師之言是則弟之言非。弟之言是則師之言非。二者必居一於此。設有可絶之罪如鄭之所云。則南冥之不知人。甚於先生。其所以攻先生。乃所以攻其師也。若南冥之素所不言。而一失信之故。致有門徒之分朋。至於三老旣歿之久。方做出人所不爲之事。枉加之罪。必出於捏構陷人之擧。君子之用心。固若是其險陂乎。龜巖負約之過。不至於絶交。絶交之罪。必涉於大故。朋友之間。無大故可絶之罪。而乃以不守硜硜之小信。輕絶半生之舊要。彼當喪之歌。其罪反輕於失信而君子不絶耶。淫奔之事。固著於詩春秋。然聖人不過因其事而筆之於經。以垂世示懲耳。夫衞宣公。天下之大惡也。東萊呂氏猶有改過之望。君子之處心待人也。嚴而恕如此矣。其果屑屑蓄之心胸之間。移甲怒絶故交而不知變。以爲終身一大業如南冥乎。經筵不講。固宋時執拗者之罪。其曰當講者。非所以勸之。將以戒之也。凡君子於經史。苟遇此等事。當惕然戒懼。若將浼焉之不暇。抑鄭其將玩味甘心。而從事於彼耶。不然。文過飾非。莫甚於斯。心術之差。不啻止於千里之遠也。遯世无憫。經德不回者。雖曰中庸。顧其立脚之地。不可不謂之亭亭皎皎。如不顧千駟萬鍾。而樂堯舜於畎畝者。人或加之以此言。爲子弟者聞之。必以爲知言。不勃然發怒如鄭也。古人多有斷章取義者。以穉圭而用諸彦倫則爲嘲侮。以君子而用之朋流則爲平實。如爲富不仁之談。陽虎口之則爲賊仁。孟子引之則爲勸仁。況此數語。實有光於南冥者乎。南冥有隱德不仕之名。龜巖有仕宦顯榮之名。名之於出與處也。何殊觀耶。必欲以隱者爲名流。而仕宦者不得爲名流。則皐,虁,伊,呂不爲名流。而老,莊,釋氏方爲名流也。孟子雖不見諸侯。諸侯有禮以先之。亦未嘗不答。何嘗有踰垣閉門過甚之擧。至如莊光之倫。雖有先儒之云云。實以漢季之有此人爲貴耳。非以爲實有德業無愧於伊,呂也。今乃徑處厥師於莊光之列。而欲免一節之名。不知類甚矣。夫以南冥一生辛苦工夫。不愧於爲己之學。終揆以厥弟之言。其爲事物所累。不能灑然無一事是當合於古人之跡。南冥不至於聖人地位。然竊恐其不應若是之甚也。若吾退溪先生則異於是。其處心也謙。其待人也忠。其與曺徵君一書。足以備見之矣。至於論道則繼往開來。不可不嚴。故言語書尺。必柝秋毫。以求至當之歸。仕止隱見。必務合義。以求吾心之安。其言行氣象。出處行藏。自與南冥不同。後之人。雖欲强以同之。安可得耶。顧其待人也忠。故不得不以聖賢責之。此在龜巖爲不爲如何。亦何傷於先生耶。朋友之間。亦盡其道而已。不可以一事之差失。便輕絶之。使之不容於我也。嗚虖。鄭之於南冥。尙不能深知有若此。況如先生耶。人之知鄭者。徒見其好議論朝廷得失。人物長短。守令臧否。皆以爲疾惡太甚而已。今也竊覸其氣象。都出於忿懥。其於義理。略無見識。是以。性情不得其正。而發爲言論。如此謬戾。如使南冥有知。當於冥冥中鳴鼓以攻之。使不累師門。不當使之妄託門人之列也。噫。凡人之患。舍己田而耘人田。鮮不有此等妄作。以貽有識者之嗤鄙。況渠方在堂下。而能辨堂上人曲直耶。此乃吾輩猛省克治處。不可更作剩話。與之鬧爭閒氣也。第其師弟之間。妄相推重者。適足以累師門而不自知。故聊拈出所見。與同志商確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