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새 / 이은희
함박웃음을 짓게 하는 도깨비다.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난다. 참으로 익살맞다. 그가 내게 농을 걸듯 장난기가 얼굴에 가득하다. 툭 불거진 눈, 굵고 짙은 눈썹과 수염, 헤벌어진 입이 섬뜩하다. 그러나 가지런한 이빨과 웃음 띤 얼굴은 친근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나를 사로잡은 거구의 기왓장인 망새다. 한껏 멋을 살린 날짐승의 꼬리를 닮은 몸체. 한 사람이 들기엔 규모가 크다. 그래선지 코를 경계로 상하 두 쪽으로 분리되어 있다. 옆면의 가장자리가 새의 날개처럼 층이 진 깃털모양이고, 뒷면은 상하 해와 달을 상징하는 둥근 구멍이 나 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스치고 지나버릴 틈새, 그곳에 그의 얼굴이 가려져 있다.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임을 눈치 챘는가 보다. 무언의 미소는 긴장의 연속선상에 서있는 내게 이를 풀라는 암시인가. 망새는 본향을 떠나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줄곤 날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외면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가 나라면 서러워 눈물바람을 일으키고 남았을 일이다.
망새는 단순과 편리를 추구하는 도시에선 찾아볼 수가 없다. 일부러 조선집이나 오래된 절집, 궁궐까지 발품을 팔아야 겨우 볼 수 있다. 궁궐이나 사원의 용마루, 전통 기와집 지붕마루의 양 끝에 우뚝 선 암막새다. 그리고 여백에 도깨비, 귀면(鬼面), 문자, 기호, 양반 모습, 동물로 다양한 이미지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암호 같은 무늬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문득 초로의 목공이 떠오른다. 직장의 건물이 준공을 앞둔 무렵이었다. 미완의 건물 지붕 끝 모서리에 그가 잔뜩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한 곳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 마리 새의 형상과 다름없어 보였다. 아니, 막 비상하려는 불새와도 같아 보였다. 떠오르는 태양 속으로 날아가는 듯한 착시였다.
그가 움찔한 것은 그 찰나였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꽃잎처럼 낙화하는가 싶어 가슴이 출렁였다. 내뿜는 담배연기가 특별해 보였다. 그에게서 남다른 고독이 느껴졌다. 미완의 건물에 대한 아쉬움을 누군가에게 토로하고 싶은 것일까. 공정은 널따란 철판 몇 개를 지붕에 덮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밋밋한 상자 같은 건물에서 예술성과 장인정신을 어찌 기대하랴. 망새가 없는 지붕에 그가 망새처럼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 자태가 오래전 기와를 얹던 아버지의 손길과 겹쳐졌다. 기와집은 내가 자란 곳이고 아버지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수개월에 걸쳐 손수 지으시던 그때의 진지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흙과 주춧돌, 나무, 부자재를 고르는데 무척 신중하셨다. 그래서 마지막 공정인 지붕을 덮을 땐 더욱 더디게 느껴졌다. 기왓장을 한 장, 두 장 서둘지 않고 정성껏 올리는 모습은 아마도 목공의 모습과 비슷했으리라. 그러나 무엇이든 쉽게 얻으려했던 나는 완성된 집을 빨리 보고 싶어 매일 공정을 물어보며 재촉했다.
암․수 기와로 가지런히 골을 내고, 양 끝에 막음한 망새의 고운 선. 여름날 기왓골에서 떨어지던 낙숫물소리며, 대롱대롱 매달려 반짝이던 수정고드름이 계절의 운치를 더했던 행복한 기억이 내게는 있다. 아버지는 평생에 한번 지을 집을 지으신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당신의 인생이 자연과 하나 되어 조형미를 이룬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뚝딱하고 세워진 현대식 양옥과 아파트에서 장인의 숨결을 어찌 기대할 수 있으랴. 고옥(古屋)의 수호신은 망새일 것만 같다. ‘망’(望)이란 ‘바란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래기’, ‘망와’로도 불리는가. 목조건물이 많던 시절이라 잡귀, 화재를 물리친다는 주술적 신앙과 선조들의 염원의 표현. 우리네 선조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과 미래까지 내다본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내가 살고있는 도시는 건축의 멋도, 웅장함도, 해학도 없는 빌딩 숲이다. 자연과 벗 삼은 조화로운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비슷비슷한 건축물들뿐이다. 한 평의 정원은커녕 숨 쉴 곳조차 없는 대지 위에 거대한 빌딩과 아파트가 빼곡하다. 용적률을 빼먹느라 공간의 여유마저 앗아간 것은 아닐까. 마당 넓은 집을 꿈꾸면서 지금도 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파트의 지붕에는 기와가 없으니 망새도 있을 리 없다. 망새의 대역은 누구일까. 혹여 꼭대기 옥상에 설치된 가느다란 피뢰침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여유를 갖고 삶을 향유할 줄 아는 우리들의 모습일 것 같다. 흔들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웃에게 망새처럼 고아한 정신의 수호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도깨비는 신선한 충격이며 감동이었다. 기와는 지붕을 덮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게 고작이었다. 한낱 지붕덮개에 무슨 심오한 진리가 있겠나 싶었다. 별개로 절집과 고궁의 용머리에 서 있던 동물의 형상만이 내 기억 안에 존재했었다. 망새는 부속물처럼 여겨져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여유를 갖고 다시금 관람하면서 기와에 대한 내 기존의 관념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직지의 본향 흥덕사지에서 출토된 거대한 망새와 맞닥뜨린 것이었다. 틈새에 새겨진 도깨비를 발견하고야 선인의 지혜와 장인정신을 느꼈으니 과시 내 안목은 ‘수박 겉핥기’식이 아니었던가. 상념에서 깨어보니 그가 없다. 지붕을 둘레둘레 살펴보아도 흔적도 없다. 불새가 되어 태양 속으로 뛰어든 것일까. 새가 되어 날고 싶은 건 그가 아니었다. 찌든 일상을 벗어나 현실의 도피처로 삼고 싶었던 내 꿈의 허상일 뿐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망새가 되기 위해 소중한 일터로 돌아갔을 것이다.
도깨비를 보고 또 본다. 그가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잊고 지냈던 사랑의 수호신을 찾아준 장본인이다. 평생을 그 무엇도 요구할 줄 모르고 망새의 삶을 살다 가신 어머니다. 갚을 수 없는 빚에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옛사람의 고아한 정취를 풍기는 망새가 시들해져 있던 내 일상과 스치는 물상을 새롭게 한다.
드디어 그가 농을 건다. “인생, 별거야!” 전염된 듯 나의 웃음보가 터진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