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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빈 감독이 만들고 있는 이순신장군의 전쟁 시리즈 3부작 중에서 (명량)을 보고 왔다.
사실 (명량)은 시리즈의 중간편인데 먼저 만들어져 개봉이 되었다. 다음 나올 (한산)은 시간을 5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 초기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6년을 되돌아 나온 시점의 (노량)에서 시리즈를 마감할 계획이라 알고있다.
한산(閑山)대첩은 임진왜란(1592-96년)의 초기에 있었던 전쟁이고, 명량(鳴梁)대첩과 노량(露梁)해전은 정유재란(1597-98년) 초기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한 전쟁이었다. 이렇게 시공을 넘나들며 스토리를 전개하고자 한 감독의 뜻은 시리즈가 모두 마무리 된 후에야 알게 되겠지만. 세세한 영화 스토리는 가급적 자제하기로 하고..........
- 나름. 감동도 있었고 재미있게 보았다. 썩 괜찮은 영화였다. -- 피안재.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몫이고, 영화를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거기에 관객의 시선은 지극히 이기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 평소 나의 영화에 대한 지론이었다. 영화 (명량)은 지금 당장 장안의 화제이다. 흥행돌풍의 신기록을 세워나가고 있다.
그러나 영화 관계자(영화판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의 시선은 매우 비판적이다. 너무 냉혹하다거나 심하다 싶을 정도이다. 나는 그들의 관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싶다.
흥행돌풍에 관해서 우리나라 최대 영화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는 거대자본이 ‘거대투자금의 만회를 위해 힘쓴 결과이다’라고 하는 폄하에 대해서 수긍하는 편도 아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한참 지나간 구시대의 유물 같은 (애국심 마케팅의 일환)으로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 한다)는 식의 논리에 대해서도 썩 내키지가 않는다.
그런데도 주위에선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명량)을 이야기 하면서 (애국심)과 (불록버스터) 이야기가 꼭 따라 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영화다.
그냥 나의 시선과 가슴으로 보고 감동을 받으면 그만이다. 나름의 이기적인 시각으로 말이다.(여기서의 이기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기를 말한다.)
영화 (명량)을 보고나서 갑자기 불타오르는 애국심을 참을 길이 없어서 (한국인이라면 이 영화는 꼭 봐야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겐 꼭 권하고 싶은 영화가 한편 있다. 애국심의 고취에 대해서라면 (명량)은 쨉도 안된다는게 나의 이기적 판단이다. 같은 이순신이 주인공이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거의 신화에 가깝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끼는 영웅이자 위인으로 만들다시피 한 사람이 있었다. 지나간 시절의 통치자였다. 그가 그저 평범한 위인의 이순신을 오천년 역사에 가장 빛나는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대다수 사람들은 부인하지 못한다. 아산 현충사를 만들고 새마을 사업과 더불어 한반도를 지켜낸 영웅으로 이순신 만들기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치고 이순신 동상이 서 있지 않은 학교가 몇 개나 있었겠는가. 이순신을 재평가 하고 수많은 책자를 펴내고....... 물론 당시에는 그 통치자의 통치에 이순신 같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영웅이 필요했다고 한다. 일종의 정신 심화교육상 이순신이 필요했는지, 정말 너무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 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통치자의 (이순신 추앙) 사업은 마침내 영화판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마침내 영화가 만들어졌다. 통치자와 온 대한민국의 절대적 지지 속에 비로소 위대한 이순신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김진규 감독이 주연을 겸하며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는 (성웅 이순신)이었다.
장엄하고 통쾌하며 감동적 이기에는 (명량)은 (성웅 이순신)만 못하다.
대한민국의 영화관이 있는 소재지마다 필수로 장기상영이 거행되었으며, 그 뒤로는 시골을 돌면서 임시 상설관에서 상영되었으며, 각 학교를 순회하면서 교실에서 강당에서 상영이 되었다. 그야말로 온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가 필히 봐야만 할 명화였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 나의 모교 충주교현초등학교 강당에서 (성웅 이순신)을 만났다. 인근의 강당이 없는 학교 학생들이 우리학교 강당으로 길게 줄을 서서 (민족의 구원자 이순신)을 만나는 것을 여러 날 지켜보았다.
이순신(김진규 분)이 까마득히 먼 바다를 향해 화살을 날리면 이내 바다 저편의 왜선에서 적장이 가슴에 화살을 맞고 바다로 떨어졌다.
강당 안이 이내 떠나갈 듯 한 함성과 함께 박수가 이어졌다. 그 고사리 손들이 치는 박수소리로 강당이 울릴 정도였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모르겠다. 얼마나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질러댔는지.........
(명량)에서 이순신이 활을 연달아 발사해 왜구들이 쓰러져가도, 장군선을 폭파하려던 왜군의 화약선이 폭발을 해도........ 어디에서도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국심에서 이순신을 찾고자 하면 (명량)이 아니라 (성웅 이순신)을 찾아라.’
국경일의 의미조차 다 알지 못하면서 유명배우가 나오는 역사드라마나 역사영화를 찾는 청소년들이 많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깊은 내면의 중후한 연기가 일품인 최민식이 이순신장군이 되어서 바다 건너온 쪽바리들을 싸그리 바다에 수장시켜버린 끝내주는 영화’ 쯤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닌지........
그릇된 역사만큼이나 오인된 역사의식이 커다란 문제긴 문제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임진왜란은 무엇이고 정유재란은 무엇인가?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
‘임진(壬辰)년에 왜(倭.왜구)가 바다건너 쳐들어와서 란(亂)을 일으켜 난동을 부렸다’ 해서 임진왜란이다. 또한 ‘정유(丁酉)년에 재(再.)차 또 다시 쳐들어 와서 란(亂)을 일으키고 난동을 부렸다’ 해서 정유재란이다.
여기에서 왜(倭)란 왜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을 폄하하는 해적의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위의 두 난은 왜구가 침입한 해적질이 아니라 일본국의 정규군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하여 임진왜란은 ‘조일(朝日) 1차 전쟁’, 정유재란은 ‘조일(朝日) 2차 전쟁’으로 명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난동 수준이 아닌 국가 간의 정식 전쟁이었던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1진 1만8000명이 나타났고 이어서 부산성에서 정발 장군을 죽이고 동래성에서 동래부사 송상현을 죽이면서 북쪽으로 한양점령과 선조의 체포를 목적으로 진격한다. 흔히들 말하는 임진왜란이다.
이들은 ‘명나라를 칠 터이니 조선은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열어 달라’ 명분을 앞세워 조선 점령을 노렸다. 20일 만에 한양 도성을 점령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떠날 때까지는 왜군의 승승장구였다. 왜군의 2진과 3진 들이 부산포와 김해에 거듭 상륙을 하고....... 그런데 한양으로 해로를 이용해 군수물자와 군량을 수송하려던 왜군선단이 그만 남해바다에서 이순신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버린 것이다. 한산대첩을 포함해 이순신은 연전연승으로 일본국해군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왜군에 있어서 이순신은 저승사자였다. 죽음의 공포였다.
한양에서 보급을 기다리던 왜군은 기다리다 못해 우선 의주로 도망친 선조를 잡게되면 조선군이 항복을 할것이라 판단하여 북진을 하고, 명에서 파견된 구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은 평양에서 처절하고도 참혹하게 전쟁을 치룬다. 이때에 의병으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승군도 참여를 하게된다. 평양성 탈환은 여러날에 걸친 처절하고도 참혹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점차 보급이 떨어지면서 전투력을 상실하기시작한 왜군은 끝내 철수를 감행하여 남쪽으로 한양에 이르는데, 전쟁을 너무 서둔 조명연합군이 그만 벽제관에서 왜군에게 대패하면서 이때부터 전쟁은 지루한 장기전으로 돌입하게된다. 이때부터 휴전상태로 지루하고도 기나긴 강화교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강화교섭을 하면서도 남쪽으로 철수한 왜군은 부산을 근거지로 경상도 일대를 차지하고 앉아서 강화회담을 지루한 말꼬리 잡기식으로 시간만 흘러가게 만드는데, 그 지루한 교섭기간이 장장 3년 이상을 넘기게 되니 종국엔 1596년 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백성들만이 둘러리처럼 고향에도 어느 한곳에도 안주할 수 없는 가혹한 시련의 기나긴 휴전상태라 하겠다. 여기까지가 임진왜란이다.
1596년 11월에 일본 본토로 물러갔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정예군을 이끌고 다시 부산포에 상륙하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라 부르는 시발점이었다.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들은 조선이 아닌 명나라와 협상을 하면서, ‘철군할 터이니 조선의 3도(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일본국의 영토로 내 달라’는 마지막 협상카드가 조선국의 강경한 불가 입장으로 무산되자 무력으로 조선을 다시 차지하겠다고 쳐들어온 것이다. 조선의 정규군은 별볼일이 없었으나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왜군을 당당하게 막아 나섰다.
아집과 의심으로 똘똘 뭉친 소인배 선조의 명으로 끝내 원균이 조선 수군을 모두 몰고나가 칠천량 앞바다에서 패배함으로써 조선 수군은 완전해 궤멸되었으니 때가 1597년 7월 이었다.
하여 선조가 어쩔 수 없어서 죽이려 맘먹었던 이순신을 다시 복귀 시키니........ 바로 이 영화 (명량)의 시작이 되는 시점인 것이다.
조선의 수군을 철폐할 수는 없사옵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신의 목숨이 살아있는한 저들이 결단코 조선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겠사옵니다.
(명량)을 보면서 처음에서 끝까지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순신의 양 어깨 위와 앞쪽으로 붙어있는 금빛 용 문장이었다. 차라리 은빛의 호랑이 문장이면 어땠을까?
조선시대엔 임금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이건 여타한 경우이건 용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었다. 용은 곧 임금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입는 옷을 용포(龍袍), 임금이 입는 갑옷을 용갑(龍甲)이라 했다. 그런데 수군통제사의 갑주에 황금빛 용문양이라니........
당시 항간에선 어리버리한 선조보다 이순신이 더 추앙받았으며 ‘차라리 이순신이 왕이었으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진 않았으리라’는 소문이 돌다 마침내 선조의 귀에까지 들어가 ‘이순신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심중을 선조가 굳히게 되었다는 설 까지 있고 보니....... 감독이 은근히 그런 의중을 내비친 것인지........
역사에서 아주 가끔,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수가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진 갑옷을 걸치고 돌아오면 마중하던 임금이 용포를 벗어주거나 용갑을 내려주곤 하는 사례가 더러 있었다. 그렇다고 넙죽 받아서 보부도 당당하게 위세도 부릴 겸 날마다 그 용이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닐 수가 있었을까? 절대 없었다. 감격해서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성은에 감사하며 받은 뒤, 잘 손질해서 집안 가보로 대대손손 물려 내리는 것이지 함부로 입어서도 안 되는 옷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최민식은 마치 임금의 갑옷을 입고 다니더라.......
3부작으로 나뉜 영화 제작의도와 주연배우인 최민식의 캐스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만약에....... 어떤 영화 제작자가 나에게 (3부작 이순신 영화 시리즈) 대본을 가지고 와서 제작 의도를 밝혔다면 나는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너무도 빤한 스토리가 아니겠는가?
한국인 치고 이순신의 영웅담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언제 어느 때 이순신이 등장하게 되고 어떻게 싸워 이기고, 모함을 받아 죽다가 겨우 살아나고, 원균이 조선수군을 몽땅 말아먹고 죽고, 피사리 몇 개 주워들고 싸움판에 다시 뛰어들어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내고, 또 장렬한 죽음으로 대 서사시를 마감하는.........
영화 관계자들 조사에서 영화하기 가장 좋은 소재의 최우선순위로 이순신이 꼽혔다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 소견으로 지금은 아니다 싶었다. 좀 더 시간이 한 5년이나 10년 쯤 지나면 모를까?
이유는 단 한가지다.
수년 전 KBS에서 주말 대하역사드라마로 제작한 (불멸의 이순신)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당시 엄청난 호평과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다.
거의 무명에 가깝던 김명민이 (불멸의 이순신)을 마칠 때쯤에는 농익은 연기자로 변신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기 때문이다.
‘이순신을 연기한 김명민의 연기는 너무도 훌륭했다.’
‘철처하게 고증에 따른 대본도 탄탄했고 제작 자체도 티비 드라마로는 매우 훌륭했다,’
하여 이번 주연인 최민식의 캐스팅에도 (김명민이 연기한 불멸의 이순신)이 적지않게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아마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에 주안점을 준 기준도 (불멸의 이순신이 그 대상)이었을 것이다.
다분히 내 좁은 소견이지만, 그렇다면 이 영화 (명량)의 평가를 (군도)에 비추어 할 것이 아니라........ (김한빈) (최민식) (명량) : (KBS) (김명민) (불멸의 이순신) 이렇게 해야 옳지 않을까?
김명민이 연기한 마르고 병약하지만 심중의 의지 하나로 전란을 극복해 가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힘에 겹고 가여워 보이기까지 한 이순신과, 얼굴주름 가득한 노쇠하고 갑옷마저도 무거워 보이는 피폐해진 모습의 눈빛만은 살아있는 이순신.
완전 상반된 모습의 이순신이다. 아마도 감독은 이를 유념해서 김명민에 가장 대비되는 인물로 최민식을 캐스팅했을 것이다.
역사적 고증에 따른 스토리 구성과 전개는 (불멸의 이순신)이 한 수 위다. 대하드라마의 장점처럼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면 그 설명을 스토리에 삽입해 드라마를 늘리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김한빈 감독은 (불멸의 이순신)에 나오는 세세하게 잘 그려진 스토리 중에서 핵심적이 몇 몇 곳의 포인트를 끄집어내서 이를 집중 조명하듯이 극대화하기도 하고 절제하기도 하면서 (대하드라마)가 아닌 (단막극)식의 에피소드로 제작의도를 택한 것 같다.
(명량)은 딱 중간을 잘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어쩌면 감독의 애초부터 의도였는지 몰라도 이 두 부분은 여러모로 대립대고 여러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평론가들의 평가도 이런 부분을 잘 드러내고 있다.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은 구루지마는 꽤나 대단한 듯 등장하지만, 실제 이순신과 끝까지 싸우게 되는 와키자카에 비해 오히려 그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으며, 때문에 그를 연기한 류승룡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싸늘한 어투는 그냥 해프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용돌이를 이용한 명량해전의 전개는 좀 엉성해 보였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좁을 을돌목으로 몰아쳐 오는 적을 맞아, 고된 훈련으로 극복한 노잡이들의 공으로 세찬 물살을 버티어내다가 마침내 물길이 바뀌자 바뀐 유속 흐름에 편승해 단숨에 적진으로 뛰어들어 통쾌하게 승리한다고 그려져 있다.
(명량)은 천운이었고, (불명의 이순신)은 전략이었다.
총사령관이 직접 칼을 들고 백병전에 뛰어드는 전쟁이 정말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곧 종말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상황을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한다?
군대를 알고 전쟁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좀 억지스러운 상황 설정이다. 무리한 설정이지 싶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이라는 설명이 없었더라면 이순신이 죽음을 불사하고 백병전에 직접 뛰어드는 이 영화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영화였으리라. 무척이나 비중을 높게 둔 그 대사가 어느 정도의 억지를 합리화 시켜주는지도.......
이순신은 전투부대의 소대장이 아니었다. 전략가였다. 실제 임진왜란 당시의 무수한 싸움에서는 항상 유리한 처지나 입장을 만들어서 치고 빠지는 작전의 명수였다. 기습작전의 대가였다. 한데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된 후 복귀한 뒤의 싸움에서는 단 한 차례도 자신이 우위에 있거나 유리한 싸움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이순신은 비록 자신의 목숨이 이번 싸움에서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혈혈단신으로 무모한 백병전을 불사할 무책임한 전략가는 결코 아니었다. 자신은 죽을 수 있어도 조선 수군은 살아 남겨야만 하고, 조선 수군은 이겨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전쟁에서 보초는 중요하다. 헌데 보초보다 중요한 것이 보급이다.
그리고 실전에선 보급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건 정보이다.
(명량)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를 모두 잘 그려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왜군첩보원 준사(로타니 료헤이 분)의 역할은 조선측 첩보원 임준영(진구 분) 보다 매력적이었다. 다만 그가 왜국에서 스스로 귀화한 일본인 첩보원이었는지, 아님 한국말도 좀 하면서 일찍 잠입시킨 것인지가 아쉬웠다.
권율장군의 등장 의미와 어리버리 선조임금의 이해를 다분히 관객의 몫으로 넘겨 버린것도 좀 아쉬웠다. 그 정도 런닝타임 이라면 간접적인 이해라도 가능했을 터인데.
또 하나의 놀라운 작전으로 충파라는 전술이 들장한다.
급류에 편승해 적선을 향해 돌진해 그대로 들이 받아버리는 무자비하고 무모한 돌격을 말한다. 그런 싸움이 있었던 것은 알았지만 (충파)라 한다는 것은 이번에 알았다.
조선의 판옥선은 왜군의 주력 전투함이었던 이타케 선보다는 훨씬 크고 단단했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의 대장선들은 오히려 조선의 판옥선보다도 높고 컸지만, 일본의 배들은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전함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용골에 있었다.
용골(龍骨)이란 큰 배의 밑바닥 한가운데를 이물에서 고물까지 관통하여 선체를 바치고 있는 길고 큰 등뼈 역할의 목재를 뜻한다. 집으로 치면 대들보로 보면 되겠다. 헌데 일본의 배들은 당시 이 용골이 없었다. 모든 전함이 다 같았다. 그러니 그냥 널빤지를 이어서 쇠못을 박은 빈 사과상자 같은 형태라 하겠다. 주력 전투선인 이타케선의 경우 길이 33미터, 너비 13미터, 노 80자루를 갖춘 당시로서는 거대한 전투선이었지만 치명적인 용골이 없었다. 반명 조선의 판옥선인 경우는 용골 외에도 이를 보완해주는 뼈대가 튼튼하게 만들어진 배였다. 쇠못이 아닌 나무를 깎아 쐐기를 박아 충격이나 물을 먹어도 그 강도와 견고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용골이 없는 배는 충돌하거나 포격에 맞으면 그대로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충파작전을 과감하게 감행해 나갔던 것이다.
고려와 조선의 수군을 강하게 만든 것은 바로 왜구였다. 숱하게 왜구와 싸우다 보니 수전에 대한 전략과 화포도 개발하였던 것이고,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서 배를 개조하다 보니 조선의 판옥선이 탄생한 것이다.
반명 일본의 왜구들은 작은 배로 쏜살 같이 달려들어 밧줄을 던져 적함에 올라 백병전을 펼치며 노략하는 것만을 일삼다 보니 해군력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 본토 내에서 벌어진 전국시대 1백여 년의 영주들간의 내란 중에도 무수히 많은 싸움이 일본이라는 영토 내에서만 벌어지다보니 수군을 이용한 해전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지 않았던 것이다. 배는 그냥 널빤지를 이어 붙여 말이나 군사들을 강을 건네주고, 이동하는 부대를 강줄기를 따라 오르내리면서 보급이나 실어다 주면 되는 보급선이 필요했을 뿐, 배를 이용한 전투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여 그 결과로서 조선침략당시까지 일본의 전함들은 전투선이라기보다는 보급선의 일부분을 급하게 개조했다고 해야겠다.
하여 군사와 전투선의 숫자는 비록 적었으나 일본수군에 비해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훨씬 막강한 위용을 자랑했던 것이다. 오랜세월 왜구에 시달리면서 대비한 조선의 해군력이 종국에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국의 해군력을 능멸을 하였으니, 참으로 역사의 한 아리러니라 아니 할 수가 없겠다.
영화의 대미에 ‘(명량)에서의 승리는 천행이었으며, 싸워 이길 수밖에 없었던 충심은 임금이 아닌 백성에 대한 충성 이었다’라는 명대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게 이 영화에 대한 아쉬움과 오해를 모두 불식시키고 다음 나올 영화 (한산대첩)을 기다리게끔 한다.
누가 뭐라 해도 난 이번 이순신 시리즈 (명량) (한산) (노량)을 모두 볼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오늘 기록한 이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해서 총체적인 감상후기를 다시 써 볼 생각이다.
(노량해전)으로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모두 끝나고도 조선8도 에서는 (이순신) 이라는 이름을 감히 함부로 꺼낼 수가 없었다. 서슬이 시퍼런 임금의 분노가 아직 채 사그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도 그 같은 상황에서 벌어진 이순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옹졸한 임금은 땅에 떨어진 자신의 위신을 추켜세우려, 그 화풀이를 전란의 실제적 공신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고경명이 불려가 고문 끝에 추살되었고 대다수 의병장들에게 반역의 주문이 걸리고 있었다. 그런 임금이었기에 이순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고, 죽은 이순신이라도 이름까지도 완벽하게 땅속에 영원히 파묻어버리고 싶었었고, 실제 암암리에 그렇게 자행되었다. 선조의 밀명으로.
그렇게 내버려진 이순신은 45년이 지난 인조반정 이후에야 비로소 충무공(忠武公)으로 추서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지극히 미미한 명예회복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실질적으로 이순신을 복원시킨 사람은 바로 정조였다. 정조는 자신의 불완전한 처지 속에서 이순신을 바로 보았다. 정조가 즉위하여 가장먼저 시행한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위이었으며, 다음으로 이순신의 복원이었다.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존하였으며 직접 이순신에 대한 서책을 편찬하기도 하였고, 이순신의 업적을 연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 정조가 의문을 죽음을 당하고 세상이 바뀌면서....... 또 다시 이순신은 땅속으로 묻혔다. 너무도 길고 오랜 시간동안을........
이 땅의 현대사에 많은 업적과 굴곡을 남긴 한 통치자가 찾아서 끄집어 낼 때까지..........
이제는 아마도 한국인의 가슴에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영원히 남으리라.
세세무궁토록.........
그리고.
(명량.)
그만하면 썩 괜찮았어.
------- 태풍 나크리가 소멸되던 날에. 피안재.
첫댓글 흐아 ~~~ 숙연하도록. 잘 읽었는데. 지금 음악에 취해서. 나중에 음악작업 끝나면 재삼 번복해서 읽을만큼 수고가 크신 글.
대감동이네요. 야련님? 때문에 얼마나 궁리가 많았는지 모르실걸 ? 옛 . 그리운 야련님 맞나.. 아니면 죄송. 기억이 부실해서 야련이 안떠올라. 몇분께 막 묻고 난리. 등등. 암튼 이 영화리뷰는 기치로운 글이네요. 덤으로 더 깊은 영화 감상 하는 기분 중에. 어린날 강당에서 보던 피안제님의 리얼감동이 그대로 전해져요.... 아.쫌 유감이다. 지금 작업중인 희열이 겹쳐서... 횡설수설 이 기분 전하고 일단 물러갑니다. 반드시 다시와서 정독. 반복. 박사학위 따렵니다. ㅎㅎㅎ
모모누님. 저 야련이 맞아요. 항상 우체국 창가 생각나지요. 항동 걷던 일이랑. 무위도 같던 기억이랑...... 언제고 다시 뵙기를...... 기윤성이 한번 불러주신다 했는데....... 사장님 되시더니 짬이 안나시나봐요. ㅋㅋㅋ 늘 건강하세요.
딩동댕 ~ 감개무량하네요. 번개한번 주선한다 한다 하면서 용기가 안나요 ^^ 약속은 구속 ! 이라... 하도 자유지향주의로 살다보니..ㅎㅎㅎ 창가땐 그래도 자주 봤죠. 야련님도 오셨으니 번개 욕구가 더욱 가중되네요. 입추도 되었으니 어떻게든 항동 번개 저질러야겠네요. 옛날에 막내 야련님이 궂은일 도맡아 시중드셔서 번개 재밌게 했는데... 추억이 새롭고요. ~~ 구속 스스로 . 9 월이 오면 ?? ㅎㅎㅎ 항동번개 원하는 몇분을 늦기전에 ㅠㅠ
야련님. 당번서 계시길... ㅎㅎㅎ
만화적 구성이었습니다. 마지막 대사 - 무엇이 천행이라 생각하느냐. 소용돌이겠느냐, 백성이겠느냐..
서애 유성룡도 <징비록>에서 몇번이나 '천행'을 언급했지요.
망하지 않은 게 이상할 만큼 형편없는 조선이 망하지 않고 버틴 건 오직 천행이었다.. 라고 기억합니다.
이 만화적 스토리에 마지막 그 대사가 작은 눈썹처럼 (백미) 영화의 가벼움을 구제한다고 느꼈습니다.
시종 너무 무게가 너무 지나치다 싶은 전개 속에서 이 눈썹은 정말 작게 느껴졌지만.. 그 하나가 큰 몫을 한 듯합니다.
사나운 울둘목 소용돌이 위에 갈매도 맹골수로가 겹쳐 보인 건 저뿐이었을까요.
이런 전쟁을 겪고도 무사한.... 아니 오히려 큰 소리 치는 선조.... 세월호 참사 뒤에 사라진 박근혜와 오버렙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