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8일 조선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 .
적지 한복판이라고 볼 수 있는
이곳에서 "독립만세"가 이루어집니다.
■2.8독립 선언.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3·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모두 셋이다.
첫째는 1918년 11월
만주·노령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는 「2·8독립선언서」,
셋째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이다.
실행위원으로 최팔용
(崔八鏞, 早稻田大學 와세다 대학 3년)·
서춘(徐椿, 도쿄고등사범학교
東京高等師範學校 3년)·
백관수(白寬洙, 明治大學 메이지 대학 )·
이종근(李琮根, 토요대학東洋大學)·
송계백(宋繼白,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김도연(金度演,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최팔용은 1919년 2월 7일
일문으로 된 「민족대회소집
청원서」를
도쿄 시바구(芝區)
고야마정(小山町)에
있는 이토인쇄소(伊藤印刷所)에서
1,000부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서
부(附)결의문은
국문·일문·영문 등으로 작성
되었기 때문에,
7일 밤 김희술(金熙述) 집에서
국문·일문(600부)을 등사판으로
밀고 영문은 타자를 쳤다.
이튿날 아침 10시 준비된
청원서와 선언서를 먼저
우편으로 도쿄 주재
각국 대사관·공사관과
일본정부의 각 대신,
일본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내고, 오후 2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었다.
600여 회원의 환호 속에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대부분의 도쿄유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독립선언회의에서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하였으나,
관할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장의
강제해산 명령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실행위원 10명이
붙잡혔다.
2월 12일 유학생 100여 명이
다시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
모여 이달(李達)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독립선언서」
를 재차 발표하려 하였으나
이달 등 13명이 붙잡혀
해산되고 말았다.
같은 달 23일 또
변희용(卞熙鎔)·
최재우(崔在宇)·
장인환(張仁煥) 등
5명이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하여 히비야공원에서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 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같은 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유학생들은
조선독립단 동맹휴학촉진부를
결성하여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거나,
고국으로 돌아가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19년 2월 8일부터
5월 15일까지
재일유학생 359명이
귀국하였는데,
그 중 127명이 서울로
돌아왔다고 한다.
MBC에서 연속 방영하는
기억록 .
남자현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이회영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동영상[기억록] 남자현을 기억하여 기록하다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단지해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이라는 혈서를 쓴 '남자현' 의 이야기. 혈서와 단지한 손가락을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전달해 독립을 호소한 남자현을 이순재가 기억하여 기록하다.www.youtube.com
동영상[기억록] 이회영을 기억하여 기록하다항일 전사를 양성하기 위해 현재가치 2조원 정도 되는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조선의 진정한 양반 '이회영' 선생과 가족의 이야기.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회영일가의 희생과 독립의지를 성동일이 기억하여 기록하다.www.youtube.com
△남자현 의사.
△우당 이회영 선생.
첫댓글 잘 봤어요~~^^
잘 보겠습니다
이이제이에서 많이 들어본 이름들이네요^^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