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푸가, 그 거대한 악보 앞에서
앰프의 전원을 켜자 ‘퍽’하는 파열음과 함께 낡은 램프에 붉은빛이 돌았다. 케이블을 기타에 꽂는 순간의 서늘한 금속성. 그리고 게인 노브*를 오른쪽으로 끝까지 돌릴 때 손끝에 전해지는 저항감. 이윽고 ‘지이이-’하고 먼지 쌓인 합주실의 공기를 잠식하는 노이즈. 그 백색소음 위로 터져 나오는 고막을 찢을 듯한 디스토션* 사운드야말로, 가사 한 줄 없이 울리는 내 청춘의 자화상이었다.
내가 만드는 음악에는 언제나 보컬이 없었다.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때로는 너무 명확해서 상상력을 가두고 일방적인 정답을 강요하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화려한 언어와 감정적인 목소리를 거부했다. 묵직하게 심장을 때리는 베이스라인과 날카롭게 신경을 할퀴는 기타 리프로 말했다. 듣는 사람마다 다른 감정을, 다른 기억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었다. 그것은 정해진 답을 향해 질주하는 의학 공부에 대한 나의 소심한 저항이자, 유일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먼저 되자.’라는 말은, 한때 내 청춘의 신념이었다. 우리는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모였다고, 더 나은 의료를 꿈꾼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봄, 그 신념은 세상의 거대한 벽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정의를 위한 외침은 이기주의라는 낙인이 되어 돌아왔고, 나는 하루아침에 악마가 되어 있었다. 텔레비전과 신문, 익명의 댓글들은 쉴 새 없이 나를 향해 돌을 던졌다. 내가 연주하던 디스토션 사운드는 차라리 순진한 투정이었다. 세상이 들려주는 거대한 비난의 노이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무력감, 그리고 미움이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들끓었다. 그 감정의 용암으로부터 도망치듯 나는 도서관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나를 가뒀다. 더는 세상의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침묵과 글자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나는 생존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기계처럼 지식을 밀어 넣었다. 수백 페이지짜리 교과서는 무겁고 차가운 벽돌 같았고, 수많은 라틴어 이름들은 저마다의 낯선 발음으로 나를 조롱하는 듯하였다. 미로처럼 얽힌 도표들 사이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고, 밤샘 공부는 잿빛 피로만 남겼다.
그러던 어느 새벽,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며칠째 씨름하던 《해리슨 내과학》 신장 파트, 사구체의 복잡한 단면도를 무심코 들여다보던 순간이었다. 현미경 아래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모세혈관 그림이 어느새 꼬이고 꼬인 음표들로 보이는 것이었다. 혈관과 세뇨관들은 저마다의 음표가 되어, 흑백의 삽화를 오선지 삼아 형형색색의 선율을 피워내기 시작하였다. 수백만 개의 네프론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도 결국 ‘항상성’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정교한 대위법, 이것은 음악이었다.
그 순간 책 속의 활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장엄한 연주를 시작했다. 교회의 탄압을 피해 메스를 들었을 베살리우스의 떨리는 숨결, 수만 번의 실패 끝에 기적의 분자식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을 어느 과학자의 목소리, 그들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한 것이 아니었다.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며 인류의 한계를 넓혔고, 수많은 희생과 죄절 앞에서 쌓였을 고뇌가 활자를 넘어 내 가슴을 울렸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서 시작된 독립적 선율들이 서로를 부르고 답하며 겹겹이 쌓여 ‘생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변주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장엄한 푸가(Fuga), 그 위대한 지금 내 몸속에서, 그리고 이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거대한 푸가 앞에서 나의 분노와 미움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독백인가. 나의 자아를 좀먹던 날 선 감정들은 이 위대한 지식의 교향곡 앞에서 한순간의 노이즈에 불과했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고, 역설적으로 나의 세계는 무한히 확장되었다.
이따금 다시 기타를 잡는다. 더 이상 게인 노브를 끝까지 돌리지 않는다. 대신 맑고 투명한 클린 톤*에 리버브를 살짝 섞는다. 으르렁대던 디스토션의 자리에 이제는 하나의 근음(根音) 위에 5도, 그리고 7도 화음이 차곡차곡 쌓여 올리는 화음이 수많은 발견이 겹겹이 쌓여 완성된 지식의 세계와 닮았음을 깨닫는다.
여전히 보컬은 넣지 않는다. 예전에는 목소리가 내 음악의 자유를 해친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내 앝은 목소리보다 위대한 진실의 울림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안다. 나의 침묵은 이제 반항이 아니라 경외의 다른 이름이다. 수많은 선배가 온몸 바쳐 완성해 온 이 생명의 푸가에 내 목소리를 섣불리 얹는 것은 오만한 행위일 것이다.
나는 이제 이 거대한 악보를 겸허히 익히고 배운다. 언젠가 흰 가운을 입고 아픔을 마주했을 때,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화음으로 응답할 수 있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다. 이제야 깨닫는다. 내 청춘의 시끄럽던 디스토션마저도, 이 거대한 생명의 푸가를 만나기 위한 필연적인 전주(前奏)였음을.
-제15회 한국의학도수필공모전 대상 수상작
*게인 노브(Gain Knob): 일렉투릭 기타 앰프에서 소리의 디스토션 정도와 음색을 조 절하는 장치
*디스토션(Distortion): 일렉트릭 기타의 소리를 의도적으로 강하게 왜곡시켜 거칠고 힘 있는 소리를 내는 음향 효과
*클린 톤(Clean Tone): 일렉트릭 기타에서 디스토션 같은 효과를 적용하지 않은 악기 본연의 깨끗하고 순수한 음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