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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 뉴기니(Papua new guinea)에서 이틀 전에야 귀국했습니다.
아드님 결혼식에 달려가야 할 그 시간, 나는 그곳 원주민들과 정글 칼로 열대수림에 길을 내며 일행 한 명을 찾아 다녔습니다.
P회장이 출국을 하루 앞둔 아침, 숙소에서 안개처럼 증발을 했기 때문입니다.
식당 중앙의 노지(爐址)에 아침이면 곧잘 장작불을 앞서 피우던 P회장이 안 보였지만 산책 중인가 싶어 우리는 식사부터 했습니다. 그런데 떠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P회장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두막에 다녀온 원주민 종업원 마리엔느가 고개를 가로로 젓는 걸 보고야 우리는 P회장 숙소로 달려갔습니다. 정돈된 방안에는 소지품이 들었던 가방 역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행했던 일행 10명 중 나이 든 부부가 세 쌍이어서, 남자 4명 중에 P회장이 끼워 있었습니다. 노부부들은 아프리카, 남미, 남국, 북극까지 다녀온 여행 마니아들이었고, 아마추어 사진작가라던 두 남자는 친구사이로 늘 함께여서 P회장과 나만 외톨이 여행객이었던 셈입니다.
P회장은 형님과 동년배로 보였습니다.
여행사 사장 이야기로는 P회장이 지난 해 과로로 쓰러진 뒤, 청력에 이상이 생겨 작은 소리를 잘 듣지 못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P회장이 청록색 물감을 이겨놓은 듯한 그 열대 밀림 속으로 종적을 감춘 후 나는 엉뚱하게 형님 생각을 했습니다.
외모도, 성격도 전혀 다른데 이상하지요. 정글도(刀)로 풀과 나뭇가지를 쳐 내야 전진이 가능한 그 젖은 초록색 속으로 사라져버린 P회장에게서 갑자기 형님을 떠올리다니요.
수 십 미터로 자란 야생 바나나 나무, 소시지 나무, 내 키보다 훨씬 큰 고사리과 식물들로 뒤덮인 그 축축한 공간 어디로 그 P회장은 스며들 듯 그렇게 사라졌을까요? 우리를 안내해준 앤드류(Andrew)나 그곳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그곳에 머물러 살라고 한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을 텐데요.
노부부들은 저녁식사만 끝나면 숙소로 들어가 버리고, 두 친구는 디지털 카메라 사진을 노트북에 정리하느라 바쁜 모양이어서 오막 집 모닥불 앞에는 P회장과 나만 남아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전날 밤에는 내가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기전 머리칼이 젖은 P회장이 홀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매일 밤, 비가 오고, 빗소리에 섞여서 새들이 우는데요.”
마리엔느가 P회장에게도 커피를 따라 주었습니다.
“밤새 저렇게 새 울음소리가 들려요. 무슨 새인지....”
귀가 잘 안 들린다던 P회장은 빗속에서 밤에 우는 새소리는 잘 들리는 모양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마사이 마라에서 밤에 울부짖는 사자소리를 들었는데.....밤에 소리를 내는 게 한국에서는 소쩍새인가요? 봄 철 늦은 밤, 소쩍, 소오쩍...우는 새.....”
마리엔느에게 저 새가 무슨 새냐고 물었지만 웃기만 했습니다. 혹시 당신 나라 국조인 극락조(Paradise bird)인가 물었지만 극락조는 깊은 정글에 들어가야 만날 있고 밤에는 울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맥주를 시켜 주방에 있던 베티까지 불러내어 같이 마셨습니다. 너무 고요해서인지, 귀가 나았는지 새소리나 물소리, 벌레소리도 들린다고 P회장은 농담도 하고 했습니다.
P회장이 우리 두 남자가 뉴기니에 남아서 살 생각이라고 하자, 여자들은 환영이라며 깔깔거리고 손뼉을 쳤습니다.
“그러다 우리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두 여자는 ‘노우’,‘노우’를 연발, 사람고기를 먹는 것은 자기네들 먼 먼 할아버지 때 이야기이고, 특히 ‘쿠카쿠카’ 족 사람들이 그렇다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몇 곳 마을 오두막 입구에서 둥그런 아치를 세워 잡아먹은 짐승 머리뼈와 사람 두개골들을 자랑스럽게 매달아 놓은 것을 여러 번 보았거든요.
인육을 먹는 종족과 먹지 않는 종족이 우리에게는 구별되지 않았지만 그네들은 많이 억울하다고 고개를 저어대었습니다.
열대의 정글, 밤 새워 내리는 빗소리, 마른 장작이 타면서 내는 냄새 속에 우리는 서로 교감되지도 이야기들을 떠들어댄 것 같아요. 어울리지도 않게 나는 영화판 욕을 했고, P회장은 다른 여행지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두 여자도 자기네 언어로 많이 주절대었고요. P회장의 한 마디는 기억이 됩니다. 덤으로 받은 인생, 전혀 다르게 살고 싶다고.
우리는 자정이 되어서야 헤어졌습니다.
비가 계속되고 우리가 꽤 취해 있어서 베티는 P회장을, 마리엔느는 내게 우산을 씌워 숙소에 바래다주었습니다.
파푸아 뉴기니에서도 우리가 머문 중부 고원지대의 마운트 하겐(MT. Hagen)밀림은 길 조차 제대로 없는 밀림입니다. 저녁에 내린 스콜로 숲의 공기는 낮에도 축축하게 젖어 있고, 하늘을 가린 넓은 잎에 맺혔던 물방울이 계속 떨어져 내렸습니다.
회사에서 쓰러진 것으로 자기인생은 끝이 난거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하던 세월들이 아득하게 느껴지더라는 이야기를 P회장은 며칠 전에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퇴원하면서 공장을 자동차로 한 바퀴 돌아본 뒤 아들에게 서류뭉치를 밀어주고는 그 후 사무실에 한 번도 안 나갔다는 말도 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신발도 옷도 없지만 이 사람들이 정말 부자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곳 원주민들은 지니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한결같이 ‘부아이’라는 도토리를 닮은 나무열매를 습관처럼 씹어대어 피같이 벌건 침을 뱉어내어 불결해보였지만 그들은 늘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몇 곳 마을에 가서는 그곳 아이들이 하듯 사탕수수 껍질을 이빨로 벗겨내면서 P회장은 어린애같이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글 쓰는 사람은 인생을 간접적이나마 여러 번 살 수 있겠다고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바나나 잎으로 싼 돼지고기와 고구마, 옥수수, 바나나, 닭고기들을 불에 달구어 둔 돌멩이들과 섞어 흙을 덮어 익히는 ‘무무’를 먹으면서 형님네 결혼식 잔치를 잠깐 상상 하기도 했습니다.
흙속에서 꺼낸 기름기 빠진 고기를 원주민들과 둘러 앉아 손으로 뜯으면서 형님 댁 우아한 은제 포크와 나이프, 붉은 포도주와 고급 위스키 생각도 했구요.
하지만 흙에 묻어 익힌 요리에 포크나 젓가락이 어울리겠어요?
가슴을 다 들어낸 채 풀로 만든 치마만 두른 아낙네들과 ‘코데카’라고 부르는 긴 표주박으로 만든 성기가리개만 허리에 묶은 맨 발의 그곳 남자들 사이에 끼워 앉아 울창하게 뻗어 올라간 야생 바나나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과 높은 새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그곳에 머무는 동안은 일상을 잠시 다 잊고 있었습니다,
형님.
늦었지만 며느님 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한 번도 낭비라는 것을 해보지 않으신 형님이니까 사돈댁 역시 형님네와 걸 맞는 집안일 것이라는 짐작을 합니다.
형님 연세로 며느님을 보신 것만도 대단한 일이지요. 50을 이제 넘기셨는데, 주변 친구들은 기껏 중고등학생 자녀들일 테니 말입니다. 자식 키울 계획을 20대에 하신 형님이니까 계산이 잘 맞은 셈이지요. 언제 그런 말씀 하셨지요. 살면서 계산 없이 해본 일은 없다고. 누구와 차 한 잔도 뜻 없이 마신 일이 없다고.... 형님 기억력만 해도 놀란 적이 한두 번 아닙니다. 소주 집에서 잠깐 본 내 친구들의 소상한 신상 까지 기억하고 계셨으니까요. 영화로 찍지도 못한 친구의 시나리오 내용에, 그 아버지 병력까지 안 잊고 계시는 걸 보고 형님의 사회적, 경제적 성공의 원인들을 짐작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형수님을 20대 나이에 맞게 했겠지요. 그것도 3살 연상의 준 재벌급 외동따님을 ... 치밀한 기획과 작전, 단 1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은 근면성과 지구력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맞지요? 그 말씀도 기억이 나네요. 신문에서 고위공직자 골프 이야기가 시끄러웠을 때, 기사 문맥 이니셜에서 형님을 연상하게 된 일이 있어 내가 물었지요? 사업하는 친구들과 골프하시면 편하실 텐데요? 하고.
그때 그러셨습니다. 누구는 시간 버리고, 돈 버리는 일 좋아서 하는 줄 아나? 그날 그 말씀을 덧 붙이셨어요. 계획은 치밀하고 꼼꼼하게. 작성한 설계도는 하늘 무너지는 일 없이는 변경하면 안 되고.
형님 인생에서 단 하나 예외가 나와의 관계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가정도 꾸리지 못한 3류 시나리오 작가와의 교유가 형님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구요.
그것은 내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학교 때나, 충무로 영화판에서도 누구에게 형님이라는 호칭을 써보지 않았거든요. 아무 영향도 서로 끼치지 않는 사이, 그런 이해관계가 맞았을까요?
파푸아 뉴기니는 여러 해전부터 가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통편 자체부터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나는 어디로든 떠나야 할 긴박한 심리상태였습니다.
진행되던 시나리오가 또 제동이 걸리는 순간. 모든 것이 싫어지고 자살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반쯤 동거하던 여자 역시 사라져서 황막해진 정신 상태였구요.
반쯤 동거라는 말이 형님에게는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가 ‘젖는다’라는 희한한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린다고 술자리에서 한번 말씀 드렸지요.
남녀관계도 서로 너무 ‘젖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싹트면 더 이상 젖어들기 전에 헤어져야 한다구요.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를 했습니다. 내가 차분한 가정생활을 꾸릴 수 없는 놈이라는 것은 형님도 알고 계시니까요.
그러나 여자가 내가 잠들어 있는 시간 막상 새벽안개처럼 빠져나가 버리자 그 동안 내가 그 여자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자 표현대로라면 내가 젖어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여자, 대리운전 기사였습니다. 반쯤의 동거, 글쎄요. 그런 말이 가능할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사 직원들과 술이 떡이 되게 마신 일이 있었습니다. 애를 많이 먹인 시나리오 한편이 오랜만에 제작자 눈에 들었다는 신호가 와서 감정이 오버했습니다. 늦은 밤 대리운전을 불렀어요. 내 오피스텔에 도착해서야 내 차를 운전한 기사가 여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몸을 못 가누고 비틀거리자 여자는 투덜거리며 나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부축했고, 결국 내 방까지 따라와 구두도 못 벗고 침대에 엎어지는 나를 내려다보았나 봅니다.
혼자 사는 남자의 방 꼬락서니라는 게 뻔하지 않았겠어요? 연민, 동정심, 호기심, 그런 것들이 뒤섞였겠지요.
그날 밤, 그 여자는 자기 집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간신히 뜬 뒤에야 입은 채 쓰러졌던 내 양복이 옷걸이에 걸려 있고, 베란다 빨래 줄에 신었던 양말이 만국기처럼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방 가스레인지 위에 황태를 잘게 찢어 넣은 콩나물국이 있었고 전기밥솥에 완두콩을 넣은 밥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이틀 후 그 여자는 찬거리를 사다가 저녁상을 풍성하게 차렸고 내 침대에서 잤습니다.
젖었어, 창피하게 속옷이...여자가 목을 움츠리며 내게 그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우렁각시’와 반쯤의 동거가 유난히 추웠던 금년겨울을 그런대로 나게 해준 셈이었습니다.
추위가 물러갈 무렵 여자가 내 품 속에서 새벽녘 고개를 저으면서 이야기했습니다.
몸이 젖을 수는 있지만 가슴까지 젖는 일은 겁나는 일이라고.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 눈물이 내 가슴 위로 두어 방울 떨어져 내렸습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아침 햇빛이 들어온 탁자 위에 여분의 방 열쇄와 내가 사준 스웨터, 가끔 입었던 딸기 수놓인 앞치마가 놓여 있었습니다.
시나리오 때문에 영화사에서 한판 벌리고 말았습니다. 더러워서 그만두겠다고. 어디로 이민이라도 가 버리겠다고.
요사이 영화나 드라마는 일본을 겨냥해서 그들이 선호하는 여배우를 캐스팅하고 그 여배우에게 초점을 맞추어 각본을 개작해야한다고.
책상을 엎어버리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 무렵 여행사 사장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호주 한 여행사와 연결되어 파푸아 뉴기니 여행 일정이 결정되었다고요. P회장 실종 이야기를 드린다는 것이 엉뚱하게 말이 길어졌습니다.
이 나라 관문인 ‘포트 모르스비’(Port moresby)는 적도 우림지역답게 몹시 더웠습니다. 섬의 반대쪽 해안에 있는 마당(Madang)쪽 기온도 만만치 않아 건물 밖으로는 후덥지근한 열기가 스콜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3천 미터 고지인 중부 마운트 하겐(MT. Hagen)까지 12인승 경비행기로 옮겨온 후로는 25도에서 27,8도, 공기는 청량하고 햇빛은 맑게 비쳐 내렸습니다.
묵고 있던 숙소 이야기를 안 드렸군요.
경비행기로 옮겨온 다운타운에서 유리창이 다 깨진 낡은 지프차로 한 시간, 비포장 길을 덜컹대며 밀림으로 들어와 마을 오막 집에서 묵었습니다.
코코넛 잎 지붕에 대나무를 쪼개 만든 거친 삿자리로 벽과 바닥을 깐 원주민 집과 비슷한 오막 집이 숲속에 10채가 엎디어 있었습니다.
30년 전, 영국 남자 한 사람이 들어왔다가 눌러앉아 원주민 여자에게서 딸 둘을 낳았고, 그 큰 딸이 그 로우지의 주인이었습니다.
오두막집들 중간에 공동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조금 큰 집이 작은 냇물을 곁에 두고 있습니다.
맨발에 벌거벗은 마을 남자들 몇이 바깥일을 거들고, 여인네 셋은 주인여자와 음식을 만들고, 세탁도 해주었습니다. 홀 한쪽이 주방, 입구 쪽에 식탁을 배치하고 홀 가운데는 아침부터 장작불을 피울 수 있는 노지(爐址)를 만들어 불을 가운데 두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P회장과 한국에서 가져간 소주를 홀짝였습니다.
한국 최고의 술이라는 자랑에 흰 피부를 가진 주인 여자와 여자종업원들도 한 잔씩을 얻어 마시고 낄낄거렸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옛날 아프리카의 ‘기니’에서 건너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외모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원주민들은 다 작은 키의 흑인입니다.
키가 작고 곱슬머리가 머리 피부에 달라붙어 큰 체구의 갈색 피부인 사모아나, 피지, 혹은 마오리 족들과는 전혀 닮지 않은 걸 보면 아프리카에서 건너간 종족의 후손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쪽으로 연결된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쪽 작은 체구의 갈색인종과도 전혀 다르고요. 하기야 그들이 쓰는 언어가 800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언어학적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울창한 정글과 계곡이 마을사이를 오랜 세월 갈라놓아 마을마다 언어를 달라지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언어소통이 안되니까 정글 속에서 서로 부딪치면 적대감으로 적을 죽여 식용으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은 19개의 종족 대표가 근대적 국가를 만들었지만 관습은 마을별로, 종족별로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숙소의 방문 자물통 키(key)는 손전등에 매달려 있습니다.
자가 발전의 전기로 겨우 오두막집들 실내를 밝히는데 쓰여 밤이 되면 오두막 주변과 밀림은 그대로 완전한 어둠이었습니다.
그날 저녁도 잠이 오지 않아 비가 흩뿌리는 오솔길 발밑을 살피면서 식당이 있는 오두막집으로 내려갔습니다.
홀 가운데 노지(爐址)에 장작불이 잘 타고 있었습니다.
마른나무 조각을 불 위에 던지고 있던 마리엔느가 화들짝 일어나 불 가까운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마리엔느가 들고 있던 수건으로 내 젖은 머리를 몇 번 털어주더니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따라 왔습니다.
“고마워.”
며칠간 식사 시중이며 방 청소를 해주다 보니 꽤 친해진 셈이었지요.
아, 형님에게 언어 소통 이야기를 빼 놓았군요. 정부 확인으로도 언어가 800개나 되어 국가에서 ‘피진어’라는 공용어로 만들었지만 악센트 강한 영국식 영어가 더 많이 쓰이는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생활이 단순하니까 사용되는 단어가 적고, 나같이 토막 영어, 단어 몇 개가 재산인 사람에게는 의사소통이 차라리 편한 곳이었습니다.
아, 마리엔느 이야기를 더해야겠습니다.
숙소에는 여주인 말고 여자가 셋 더 있었습니다. 그중 나이 많아 보이는 한 여자는 주방의 요리 담당인 셈이었고, 마리엔느와 베티라는 여자가 웨이트리스 겸 청소 담당이었습니다.
검정 스커트와 흰 블라우스가 유니폼이었나 봅니다. 줄곧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요. 마을에 돌아가서는 보통여자들처럼 풀로 만든 치마로 갈아입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전날 아침 마리엔느가 청소를 하러 왔다가 내가 있는 것을 알고 나가려는 것을 내가 괜찮다고 하자 그대로 청소를 했습니다.
숲길에서 미끄러져 흙투성이가 된 내 바지를 집어 들더니 세탁비 요금이 2기니라고 했습니다, 1달러 못되는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나간 뒤에 보니까 한쪽에 밀어둔 속옷들도 몽땅 들고 나갔어요. 낡았다 싶은 속옷들을 하루씩 입고 버리는 게 오래된 내 여행 습관이거든요. 땀이 밴 속옷들은 버리라고 알려주려 했지만 밖에 나왔을 때는 마리엔느가 어디로 갔는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꽤 늦은 시간 마리엔느가 깨끗이 손질한 바지와 속옷들을 가지고 내 숙소에 왔습니다. 버리려던 속옷이었다고 했더니 계곡물에서 비누로 빨아 집에 가져가서 다려 왔다고 고개를 돌리며 웃어요. 손에 5기니를 주었더니 ‘땡큐’를 연발하면서 귓불을 붉혔습니다.
속옷빨래 때문에 대리기사였던 여자를 잠시 떠올렸습니다.
로우지의 주인 아버지도 옛날 자기 속옷을 냇물에 가져가 세탁해준 이곳 원주민 여자와 인연이 되었을까, 엉뚱한 상상을 했습니다.
P회장과 그날 밤 헤어져서 숙소로 돌아가던 좁은 오솔길은 미끄러웠고 길 양쪽, 잎이 큰 열대식물들은 잔뜩 젖어 있다가 팔이며 다리를 적셨습니다.
마리엔느에게서 독특한 체취가 풍겼습니다. 들짐승 냄새와 닮은 그녀 체취가 서늘한 빗속에서 후각을 자극해 왔습니다.
“2일 뒤에는 당신 나라로 돌아가나요?.... 당신 부인은 몇인가요? 부인들이 다 젊고 예뻐요? ....P회장은 베티를 아주 예뻐하는데요.”
숙소 자물쇠에 키를 꽂으며 마리엔느가 빠르게 여러 가지 말을 했습니다.
“베티는 P회장이 이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출입구가 열리며 방안의 불빛이 그녀 곱슬곱슬한 앞 머리칼을 적신 물방울들을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방울들처럼 반짝이게 했습니다. 맥주 탓이었는지 그때 흰자위 많은 검은 눈이 일렁거려 보였습니다.
“와이프가 몇이냐고? 하, 그래, 몇일까....셋, 넷, 열....그래, ....속옷도 빨아주고, 우산도 씌워주었는데.....나도 마리엔느 곁에 남아서 이곳에서 살까?”
“저 울음소리.... 극락조가 맞아요.”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그네는 극락조 소리를 못 들어요.”
꾀꼬리나 밀화부리가 내는 소리 중 고음으로 내는 그런 새 울음소리가 그 열대정글의 한 밤중 빗소리 속에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형님.
그리고 이튿날 아침 P회장의 실종 때문에 일행은 출국을 늦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숲 속에서 길을 잃었을지도 몰라 원주민들과 우리는 이틀간 주변 숲을 여러 곳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숲에 들어가면 몇 미터 앞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왜 전혀 닮지 않은 P회장의 모습에 형님 얼굴이 얼마동안 겹쳐 떠올라 왔을까요?
더 이상한 것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고 필리핀을 거쳐 귀국하는 비행기에 오르고 부터입니다.
밀림에 남은 사람이 P회장이 아니고 나라는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서로 겉모습이 바뀌어 귀국하는 비행기에 P회장이 앉아 있고,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 나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입니다.
혼사 축하를 드릴겸 형님께 들러야겠다고 생각해놓고 어수선한 편지를 드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귀국한 것은 겉만 내 모습일 뿐, 진짜 나는 ‘부아이’를 씹는 원주민들 사이를 극락조 소리를 쫓아 마리엔느와 숲 속으로 계속 움직여 가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 때문입니다.
첫댓글 오랜만에 오지에서 돌아오신 손님, 반갑습니다. 간접체험만해도 얼마나 뿌듯한 즐거움인지요.....^^
형님,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시죠? 늘 여행과 함께 하시는 형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