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식목일이자 한식일이다. 요즘도 식목일 행사를 따로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 어릴 때는 꽤나 요란했던 거 같다. 아마도 70년대 저녁뉴스나 80년대 '땡전뉴스' 시대의 첫 꼭지는 항상 박정희나 전두환의 기념식수 장면이 아니었던가 싶다. 또한 공휴일이고 대개는 한식일과 겹치기에 산소를 손보고 성묘를 하러 가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따져 보면 한식일에 대한 것보다는 식목일 행사만 오래된 내 기억세포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한식(寒食)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설, 추석, 단오와 더불어 4대 명절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요즘은 잊혀진 명절이 된 지 오래다. 음력이 아니라 양력으로 따지기에 날짜가 고정되어 있다.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인데, 4월 5일 아니면 4일이다. 여느 보통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식은 '냉절(冷節)', '금연일(禁煙日)'이라 불렸던 고대 중국의 풍습에서 유래하기에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어야 하는 날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그런데 작년부터 사마천의 <사기> 완역본을 읽으면서 한식일에 배어 있는 춘추시대의 슬프고도 어이없는, 인간의 쓸데없는 자존심과 옹고집의 충돌이 빚어내는 애잔한 에피소드, 그렇지만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개자추(介子推)의 포목소사(抱木燒死)'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동주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771년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일컫는다. 기원전 771년이면 지금으로부터 거의 2,800년 전이다. 이 시대의 역사가 년월일을 따질 만큼 세세하게 기록된 문자로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데 대부분은 <사기>를 쓴 사마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주나라 창건의 일등 공신 강태공이 시조인, 춘추오패의 하나인 제(齊)나라. 이 강태공의 후손인 제환공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관포지교'의 고사를 남기는 등 춘추전국시대의 숱한 영웅호걸 역사의 시초를 장식하는 인물이다.
제환공의 딸 제강이 이웃나라인 진(晉)나라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왕이 죽자 그 아들 진 헌공이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왕비도 물려받는다. 쉽게 말하면 새 어머니를 마누라로 삼았다는 말이다. 우습게도 제강은 진 헌공의 아들까지 낳아 태자로 봉해진다. 새 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정도로 여색을 밝혔으니 이런저런 여자를 맞아 여러 아들이 생겼을 터. 진나라는 오늘날로 치면 스촨성 인근에 있던 나라였으니 서북지방의 변방나라들과 국경을 마주한 탓에 변방의 부족국가를 멸하고 여자를 뺏어오는 일이 잦았다. 그 가운데 융족을 멸하고 데려온 여희라는 여자가 나라 잃은 한맺힌 복수를 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제강이 낳은 태자는 역모에 휘말려 죽게 되고 다른 아들 중에 훗날 진 문공이 되는 중이(重耳)도 여희의 책략에 말려들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자 아버지의 칼날을 피해 타국으로 도망치게 된다. 이때 중이 나이 43세. 이것이 19년 동안 타국을 떠돌게 되는 방랑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 했을 터인데, 이 중이의 방랑길을 함께하는 여러 충신들 중에 '개자추'라는 인물이 있다. 한식은 바로 이 중이와 개자추에 얽힌 슬픈 에피소드와 연결된다고 알려져 있다.
▲ 중국 면산에 세워져 있는 개자추 모자상
숱한 고생 끝에 62세의 나이에 제나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 중이는 그동안 자기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논공행상을 하면서 그만 개자추를 빠뜨리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더 좋은 논공행상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자기의 공이 크다고 아우성치는 꼬락서니가 못마땅했던 개자추는 그 길로 노모를 모시고 면산(綿山)이라는 곳에 은둔하게 된다. 뒤늦게 이를 알아챈 문공이 사람들을 풀어 개자추를 찾았건만 개자추는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버린다. 할 수 없이 문공이 직접 면산에 찾아와 개자추를 불렀건만, 개자추 입장에서는 이제 더더욱 나갈 수가 없게 된다. 이제사 나가면 지금까지의 자기 행동이 논공행상을 받기 위한 몽니밖에 안 되는 것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문공은 면산에 불을 지르게 한다. 불을 피해 개자추가 나올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개자추는 문공 일행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나무를 끌어안고 불에 타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이른바 '개자추의 포목소사'란 고사다. 그래서 개자추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이 날은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었으니, 이것이 우리가 아는 한식의 유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자추의 포목소사'는 아무래도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상상력의 산물 같아보인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개자추가 면산에 들어갔다는 것까지만 사실이다. 뒤늦게 이를 안 문공은 면산 일대를 개자추에게 봉지로 하사하여 농지로 삼게 하고 면산의 이름을 개자추의 성을 따 개산(介山)으로 부르게 하면서 “이로써 나의 잘못을 기억하게 하고 착한 사람을 표창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사기:세가> 권39. 진세가). 누가 봐도 <사기>의 기록이 현실적이고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따라서 한식을 개자추와 연결시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이 결합된 허구의 산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한식의 유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문화인류학에서는 개자추의 설화보다는 고대 원시사회의 개화(改火) 의례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오래된 불은 생명력이 떨어지고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므로 오래된 불을 끄고 새로운 불을 피우는 개화 의례를 했는데, 한식이란 이 불의 소멸과 생성 사이의 기간이라는 것이다. 관련 자료를 찾아 보면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이 한식인 것도 이 날이 천문학에서 말하는 28수(宿)의 하나로 불을 관장하는 별이 출현하는 날 어쩌고 하는데 솔직히 천문학까지는 내 능력 밖이라서 더 이상의 언급은 생략해야겠다. 궁금한 사람은 직접 찾아보시기 바란다.
하루 종일 촉촉하게 내리는 한식날의 비. 이 비를 보면서 생각컨대, 비록 천문학과 문화인류학에 연결되어 있는 한식에 대한 유래가 문화적, 과학적 진실일지언정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개자추의 포목소사'라는 슬픈 우화가 어려 있는 한식의 유래가 훨씬 더 마음 깊이 다가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게 비록 문학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위의 에피소드라 할지라도 말이다. 때로는 진실보다 감성이 더 가슴에 와 닿는 법이니까.
첫댓글 식목일이 되면 나무심기에 동원된 기억이 또렷하죠. 아마 일상에서 겪던 일이 아니어서 그럴거에요.
또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다고 송충이잡으러 동원된 적도 있었죠.
병과 나무젓가락을 들고 이름만 들어본 송충이를 한마리도 못잡고 나무 사이를 돌아다닌 듯.
개자추의 우화는 읽은 적이 있는데 잊고살다 다시 기억을 꺼냈어요.
이젠 개자추란 이름들으면 팍 떠오를 지 기억력이 가물거리는 나이만 되었군요.
아, 맞네요. 송충이 잡으러 다녔었네요.ㅎㅎ
그 어린 애들이 잡으면 뭘 얼마나 잡는다고. 참...
스피노자님
식목일관련된
중국고사 잘보고 갑니다
존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네요~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스피노자님 글을 잘 읽어요. 요즈음은 요란한 행사는 못보겠어요.
지금도 공공기관 같은곳에서는 몇년도 식목일 기념식수라는 명패가 붙어있는 나무를 많이 보지요.
저의 식목일 기억도 동원되어 나무심던 일이지만 지금 보면 그때 작은 내손으로 심었던 나무들이 아름드리로 되어 되돌려주는듯하여 뿌듯합니다.
네. 이제는 산들이 너무 우거져 주기적으로 벌목을 해주어야 하는 상황이지요.
물론 식목일에 나무를 심어서라기보다는 난방 방식의 변화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