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 이진숙
토오옥, 토오옥.
봉황산 밑에서 깨 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저기 엄마가 계시는구나,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더욱 바빠진다. 예전 같으면 한걸음에 갔을 텐데…. 뇌경색으로 퇴원한 지 일주일. 아직은 마음을 안 따라주는 몸이다. 부르르, 부르르, 트리를 불고 혀를 잘근잘근 씹어본다. 다시 천천히 힘을 모아 한 걸음 한 걸음 엄마 숨결을 향해 발을 옮긴다.
바람의 무게가 느껴진다. 한 걸음.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난다. 샛노랗게 달린 열매에서 향긋한 향이 흘러나온다. 향의 소리도 가을 하늘만큼 상큼하고 신선하다. 어린 날의 추억이 슬그머니 기지개를 편다. 날카로운 가시를 피해가며 잘 익은 탱자 하나를 따서 입 안에 넣었다. 눈이 찡긋해질 만큼 새콤달콤한 맛이다. 동글동글 씨앗들이 한입 가득 남는다. 후루루 퉤, 입안이 알싸하다. 코끝까지 개운해진다. 엄마는 그것을 뒷마루에 말려두었다가 우리가 고뿔이라도 걸릴 양이면 화롯불에 약탕기를 올려놓고선 내내 달였다. 그런 날은 달빛조차 환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다시 한 걸음.
발이 돌에 걸려 삐끗했다. 작은 돌멩이에도 이젠 균형을 잃는다. 발밑을 조심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질경이가 밟혔다. 엄마는 이것을 소달구지 밑에서도 살아남는 배짱 좋은 녀석이라고 했다. 길가에 흔한 풀로 산에서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에게 질경이는 고소한 냄새로 남아있다. 엄마는 그것을 끓는 물에 데쳐 간장 넣고 조물거리다가 참깨를 뿌리고 들기름을 살짝 쳐서 무쳐 주시곤 하셨다. 지금도 그 고소함이 땅에 납작 엎드린 잎에 묻어 있다. 갈색이 되어가는 씨앗들도 대글대글 영글어 있다. 무르익어가는 것이다. 나도 이처럼 잘 익을 수 있을까? 오십 초반에 갑작스레 찾아온 뇌경색은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쉼표를 허락하는 선물임을 확신한다. 이렇게 한 걸음에도 5초 이상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잠포록한 날씨다. 또 한 걸음.
한 해를 달려온 엄마, 그녀의 마지막 숙제인 배추밭을 지난다. 일렬로 길게 뻗은 밭이랑에 진녹색 배추가 예닐곱 겹의 속살을 채워가고 있다. 김장철이 오면 노랗게 속이 찬 배추가 토방 가득 쌓이겠지. 배추를 네 조각으로 가르고, 그것을 소금에 절여 한밤을 재울 것이다. 품앗이 온 이웃 아주머니들과 무채를 치며 밤새는 줄 모를 것이다. 참깨 볶는 향이 진동하고, 시원한 배와 사과, 생강과 마늘, 대파, 양파의 매콤함과 달큼함이 온 마당을 차지할 것이다. 찹쌀 풀을 쑤어 태양초 고춧가루와 섞은 후 설탕 대신 홍시를 넣고, 까나리 액젓과 새우젓, 온갖 양념거리를 한데 섞어 버무리면 양념 준비는 끝이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배추에 빨간 양념을 입히며 시집간 딸 이야기와 갓 태어난 손주 이야기로 꽃을 피우시겠지. 부엌에선 보쌈 익는 냄새가 구수하고, 갓 버무린 배추김치를 손으로 죽죽 찢어 깨소금 듬뿍 묻혀서 고기 한 점을 싸 먹으면 겨울의 매운바람도 시어머니의 독한 시집살이도 모두 고소한 추억으로 변화될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두부를 가운데 놓고 한 입 두 입 김치와 곁들여 먹는 재미도 뺄 수 없다. 편하고 빠른 것만을 추구하는 나는 김장 문화가 변질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또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고구마를 캐내고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황토가 보인다. 무더기무더기 된서리를 맞은 고구마 순들은 축축 늘어져 있다. 그 옆으로 노란 호박이 하나, 둘, 셋…. 여덟 덩이나 달려 있다. 늙은 호박을 갈아서 부침개를 해 먹고, 호박죽을 쑤었던 그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우리 여덟 남매와 작은집 여섯, 고모네 여덟 남매를 책임졌던 엄마의 식사 준비에 호박죽이 최고였다. 언니들과 나는 빙 둘러앉아 한나절 내내 달챙이 숟가락으로 껍질을 긁고 속을 파냈다. 호박씨는 깨끗이 씻어 채반에 말렸다가 백산을 만들 때 고명으로 쓸 것이다. 뭉텅뭉텅 토막 낸 호박을 큰 가마솥에 넣고 기다란 나무주걱으로 저으면서 끓여준다. 거기에 불린 찹쌀을 학독(돌확)에 갈아서 부어준다. 불렸다가 삶은 붉은 팥도 넣으면 궁합이 제격이다. 한참을 젓다 보면 몽글몽글 밝은 주황빛 죽이 된다. 어우렁더우렁 조화를 이루며 살던 배부른 가난이 해결되는 순간이다. 찹쌀 새알을 넣어 끓인 뜨끈한 호박죽을 생각하며 한 걸음에 힘을 모아 다시 발을 옮긴다.
툭, 툭, 툭.
엄마가 보인다. 토독, 토독, 토도독, 산 그림자가 짙게 내려와 누운 봉황산 자락에 깨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거무죽죽하게 마른 들깨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다. 은행나무에 기댄 채 돌아앉아 깨를 터는 엄마의 뒷모습은 작고 쓸쓸하였다. 머리카락을 감싼 하얀 수건엔 검불이 쉬고, 웅크린 등으로 고단한 가을바람이 끙끙거리며 지나간다.
내가 다가서는 것도 모른 채 긴 막대기로 깨를 터는 구순의 엄마. 십 년 전 먼저 떠난 남편의 빈자리, 그 허전함을 애써 털어낸다. 톡톡,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이 한 보따리 털어진다. 먼저 가버린 큰아들에 대한 애증이 또 한 보따리 쏟아진다. 진안 성수면 봉황산 자락 상수리나무도 노랗게 다홍으로 물들어 가는데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는 이들을 부르는 소리다.
나는 아픈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허리를 세우고 웃음으로 입꼬리를 올린다. 솔음으로 엄마를 불러본다.
“엄…, 마…, 엄마!”
소리는 울음을 먹고 잠긴다. 쪼그라든 엄마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발길이 옮겨지지 않는다. 엄마의 깨 터는 소리는 여전히 봉황산에서 놀고, 엄마의 지게에 근심 한 짐을 더 지울 나는 한숨처럼 발길을 돌린다. 내 소리를 더 키워서 와야지. 내 걸음에 힘이 실리면 저 깨를 같이 털어야지. 고단한 엄마의 걸음에 힘을 주는 막내가 되어야지. 무수히 떨어지는 저 근심덩어리가 웃음소리가 되기를 빌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들깨의 고소한 향이 한 걸음 앞서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