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만 푸르러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만 달리면 남강을 끼고 있는 충주시립박물관에 닿는다. 가끔 혼자 바람을 쐬고 싶을 적이면 이곳 야외전시장을 둘러보곤 한다. 강 건너 풍경이 좋기도 하거니와 충주 근교 사적지에서 주워들인 불상이며, 석탑․ 석인상, 석등, 망주석 등에 말을 걸거나 눈을 맞추면 자신들이 박물관 뜰채에서 곁방살이를 하게 된 사연을 수월수월 풀어놓곤 한다. 한데 오늘은 검버섯이 얼쑹덜쑹 붙어 있는 할미 보살까지 말문을 닫고 있다. 젊은 내외의 다툼이 아무래도 심상찮아 나의 문안 따위는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박물관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박물관 뜰에 있는 전시장으로 들어섰을 때다. 삼십 대 중반쯤 되었을 부부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야외전시장이란 점도 개의치 않고,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여자가 먼저 “5년 동안 생지옥에서 살았다”며 포악스럽게 대들자 남자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침밥 한 번도 살갑게 해 준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천벌 받는다. 병석에 누운 우리 어머니께 네가 어떻게 했는지 가슴에 손 좀 얹어보라”고 대꾸하는 그의 숨결은 성난 들소처럼 거칠었다.
우연히 마주친 상황이었지만 민망했다. 황망하게 물러나와 인문석을 모셔놓은 앞뜰로 자리를 옮기자 대여섯 살쯤 되었을 사내아이가 잔뜩 부은 얼굴로 늙은 석인상을 발끝으로 툭툭 차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부부의 아이임을 짐작했다. 시치미를 떼고 네 영역을 침범해 미안하다는 뜻으로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보였다. 녀석은 그런 식으로나마 예의를 치르는 게 마음에 들었던지 계면쩍은 웃음을 흘리며 뜻밖에 함께 놀아주길 바라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 내 손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갑자기 맞은편 길 쪽에서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회오리바람이 달려왔다. 재빠르게 아이를 감싸 안으며 눈을 감고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회오리바람이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지나간 뒤에야 엄마는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니 녀석은 박물관 뒤로 눈길을 보냈다.
아이는 석이라고 했다. 나는 아빠와 엄마가 벌이는 처신사나운 꼴을 피해 혼자 놀고 있던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가위 바위 보로 이마에 꿀밤 먹이기를 했고, 돌을 몇 개 주워 홀짝 놀이를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부부가 아이를 찾아 우리 쪽으로 걸어오면서도 여전히 싸움은 이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구구한 얘기 나눌 필요 없어. 애는 내가 키울 거야.”
“그게 원이라면 너 좋을 대로 해 봐. 위자료는 한 푼도 줄 수 없으니깐."
“그건 법이 해결할 일이지.”
“석아 어딨니?”
꼬마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속내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나는 잡았던 손을 놓고 등을 떠밀었다. 아니 등을 떠밀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멈칫거리다가 두 번째 부름에는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로 다가갔고, 애 어미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가듯 아이 손목을 잡아채어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아이는 울상을 짓고 제 아빠와 내가 바라다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엉덩이를 뒤로 빼었으나, 자식의 양육권을 멋대로 선택한 어미 손에 이끌려 빨간 프라이드에 올라타고 시내 쪽으로 사라졌다.
아내와 아이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애 아비는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 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조각공원으로 내려갔다. 영락없이 오지게 퍼붓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한 산승(山僧)의 뒷 태였다.
나도 자리를 떴다. 술 박물관 이 층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강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 앞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몹시 우울했다. 우울한 날의 피날레는 ‘블루 스카이’ 한 잔이 최고라던 일현 선생의 예찬론이 생각났다. 하지만 차를 끌고 온 탓으로 카모마일을 주문했다. 그리곤 조각공원으로 내려간 애아범의 행방을 찾아 주변을 더듬었다.
그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촬영한 파란 의자에서 좀 떨어진 정자에 걸터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는 그들도 불시착으로 심장에 떨어진 열정에 휘감겨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속삭이며 격렬한 입맞춤을 불세례로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배신감과 분노로 서로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
미움이 마그마처럼 소용돌이로 끓어오를 땐 어떤 위로도 수용할 여지가 없다. 질투는 사랑의 반증이지만, 서로 어긋난 상태에서 헤어질 것을 결심하고 나면 서로에 대한 배신감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심장의 박동을 빠르게 끌어올리는 울화를 참지 못해 냉수를 들이키거나 소주병을 끌어안고 원망과 미움을 키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미숙한 짓이었는지를, 얼마나 크나큰 오류를 저질렀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너 없으면 못 산다고 입으로 천 번을 외쳐도 그 뜨거운 열애는 결혼 전에만 가능할 뿐이다. 둘이서 가정이란 공동체를 이루고 나면 사랑한 만큼의 값으로 배당되는 윤리적 의무가 따른다. 명절마다 제사를 모시는 일부터 가족들의 생일을 챙기는 일까지 수많은 건수를 완만하게 감당해야만 부부가 한 생을 이루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도망치면 양쪽 부모 사이에서 자식들 입장만 난처해진다.
문득 유행가 한 소절이 떠올랐다. ‘님’이란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고 했던가. 애틋하도록 그리웠던 ‘님’에게 한사코 점 하나 찍겠다고 어린 새끼 손목을 잡아끌고 돌아간 어미도 필경 낭자한 아픔을 눈물로 닦아내고 있을 것이다. 다섯 살 난 아이도 집으로 돌아가 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엄마와 아빠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데 창 넘어 강물은 푸르기만 했다. 하도 푸르러 카모마일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는 핑크뮬리 군락이 바람의 선율을 타고 일렁이는 탄금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아볼 요량으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첫댓글 저런 저런
이런 이런
모두가 아픔이다
안타깝고 아픔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