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서울. 긴 복도 끝에서 한 여자가 걸어온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그녀는 젊고 잘생긴 애인과 거침없이 정사를 나눈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그들의 정사를 시선 한번 떼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스크린에 가득 찬 남자와 여자의 허벅지, 엉덩이와 신음 소리는 아직 맘에 준비가 안된 관객들을 숨죽이게 만든다.
젊고 아름답고 똑똑한 (아마도 돈도 잘버는) 아내의 대담한 애정 행각과 헌책방 귀퉁이에서 세로로 쓰여진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는 쭈그리 남편의 삶은 이미 한참 어긋나 있다 다시 돌아오긴 틀렸다고 생각한 남편은 부인을 영리하고 깔끔하게 처리한다. 모든 것이 정리된 뒤 그는 혼자 쭈그려 앉아 숨죽여 운다.
영화의 이야기는 매우 통속적이다. 뻔뻔하게 바람피는 여자와 찌질하게 집착하는 내연남, 착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남편. 이 세 인물이 만드는 비극적 종말로 치닫는 이야기는 남편이 읽던 로맨스 소설이나 추리 소설 속 내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크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세 주인공의 감정을 보여준다. 옆에 있어도 맘은 다른 곳에 가있고 섹스를 해도 내 것 같지 않은. 이들의 공허하고 발붙일데 없는 외로움을 .
특히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도연을 영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비중있는 "여배우"로 인정하게 됐을 것이다. 배우 자신조차.
1999년. 세기말이란 불안을 내재하고 있는 숫자와 IMF가 휩쓸고 간 자리는 온통 폐허였다. IMF가 아니었다면 남편은 큰 아파트에서 예쁜 부인과 딸도 있는 은행원으로 행복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아내의 외도를 알았더라도 이혼하고 말지 살인까지 가지는 안았으리라. 나는 낙원상가에 있는 헐리우드 극장에서 이 영화를 혼자 봤었다. 보고 나서 너무나 쓸쓸했던 기분을 지금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언제, 어떤 기분으로 그 영화를 만났는지에 크게 영향을 받기도 한다. 내게는 해피엔드가 그런 영화다. 낙원상가의 허름함과 스무살의 쓸쓸함이 버무려진. 오늘 오랫만에 영화를 다시 보며 그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첫댓글 그 때는 야해서 좋았는데
나이 드니 씁쓸하게 아픈 영화더군요
세 남녀 모두..
그러기요 아파요 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초반에 너무 쌔서 놀랐습니다. 정지우 감독님의 최근작 유열의 음악앨범 보다가 그냥 키스장면인데도 다음에 해피엔드 시작부분처럼 진행될까봐 괜히 긴장했을 정도로 살짝 트라우마? 가족들이랑 같이 보다가 긴장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어제 오랫만에 보고 깜놀했어요 이 정도였나? 했다는
다시 보기 두려운 영화 중 하나입니다. 이래저래 너무 공감할까 봐 ㅠ
본 영화인데 기억이 안나네요 기회가 되면 다시봐야겠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