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영화 [고지전]에서 ‘2초’의 의미
악어부대 대원들은 모두 '2초'를 두려워 한다.
'2초'가 뭐냐고 묻는 신참에게 그런 게 있다고, 나중에 알게 될 거라며 수수께끼로 남겨둘 정도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다. 언뜻 시간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공포에 붙인 엄연한 명사다. 형체도 없고 실재하지 않지만 그것의 존재감은 무시무시하다.
서로 뺏고 뺏기는 고지를 가운데 두고 적진의 상황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선뜻 전진을 계속하기는 어려운 일. 게다가 엄폐물도 없다. 그래도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을 때 비로소 '2초'의 존재가 드러난다.
싸움은 멈출 수가 없다. 누구라도 먼저 앞장을 서야 한다. 그때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앞 선 병사 한 명이 쓰러진다. 뒤이어 골짜기를 흔들며 들려오는 총성.
병사가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진 후, 비로소 들려오는 총소리. 그 간격이 꼭 2초여서 그런 별명으로 불리는 상황이 ‘2초’다.
골짜기 건너편 산등성이 무성한 숲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움직임만 보이면 방아쇠를 당기는 저격수. 총성도 울리기 전에 쓰러지는 전우를 보며 구하러 나갈 수도, 총성이 들려온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아군의 무력감.
'2초'의 정체는 누굴까.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어느 날, 골짜기 냇가에서 신하균은 우연히 앳된 촌부를 발견한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이곳은 위험하니 얼른 가라고 당부하면서 초콜릿을 준다.
얼마 후, 소년병 같은 신참이 소변을 보다 옷을 추스르기도 전에 '2초'에게 당한다.
쓰러져 몸부림치는 신참을 구하러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전우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총탄, 그 상황을 차갑게 바라보는 2초의 시선, 그를 단번에 보내지 않고 몇 번의 저격으로 고통과 두려움을 배가시킨다.
그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 끝에 그 지점에 대한 포격이 있었으나 집중포화 속에서도 그는 종적을 감춘다. 그러나 끈질긴 추격을 하던 신하균의 눈에 포착된 저격수는 뜻밖에도 그 어린 촌부였다. 그러니까 둘은 이미 낯이 익은 사이.
총신이 긴 저격용 총은 완제품이 아닌 손으로 만든 듯 조악해 보였다. 질질 끌다시피 들고 가는 조그만 그녀를 신하균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는데 그냥 보내고 만다.
왜 그랬을까. 짧은 순간의 교감일지라도 그에게는 그녀가 이미 적이 아닌 연민의 대상이 되었던 탓일까. 마음이 약해져 기회를 놓쳐버리는 일은 어리석음으로 남았다..
결국 부대장인 이재훈도 친구인 고수도 다 그녀의 총을 맞고 숨지고 만다.
피아간에 뺏고 뺏기는 과정에 고지에는 무언의 약속이 자리 잡고 있던 터였다.
다시 고지를 빼앗을 때를 대비해 상자 속에 먹을 것을 넣고 묻어두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적도 아군도 두려움 가득한 전장에서 그 묻어둔 상자는 잠시나마 병사가 아닌인간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술상자였다.
상자는 일종의 메신저가 되었다. 다른 물건과 편지와 더불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예쁜 처녀의 사진 한 장.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생사의 백척간두, 전선에서 그 사진은 한 순간의 꿈이고 평화며 설렘이었다.
그녀가 적군 부대장의 동생이라는 것도 다 알았지만 설마 그 무서운 저격수일 줄은...
영화에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남녀의 묘한 기류는 숨길 수가 없다. 꼭 없애야 하는 저격수임에도 순간 머뭇거리는 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결국 마지막의 조우에서 신하균은 그녀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그 순간에도 망설이는 자신을 미워하면서.
두 사람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절로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연민이었을까.
많은 스토리가 적을 사랑하게 되는, 아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러브라인을 꼭 설정한다. 그런 설정은 오히려 애틋함으로 더욱 절실하다.
이 영화에서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혐의를 두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봄기운에 저절로 싹이 튼 아주 작은 씨앗,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곳이 전선이며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절박하고 치열한 상황이어서 내 눈에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원한도 없고 미움도 없고 오히려 마음 깊이 자기도 모를 호감을 가졌다 하더라도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는 냉혹한 전쟁.
볼까말까 망설였던 것은 전쟁영화에 대한 선입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TV 화면을 통해 감상한 영화 [고지전]은 많은 생각과 감동을 남겨주었다.
'2초'라 불리는 보이지 않는 공포, 그 뒤에 숨은 비극은 가슴 저릿한 여운으로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