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하면 성명왕이 전사하고 백제가 건국이래 단일 전투로 최대 손실을 입은 전투이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백제는 한동안 제대로 된 국정운영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치명타를 얻었습니다. 관산성 전투에 대해서 한 번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인은 봅니다.
관산성 전투에서 건국이래 사상 최대규모로 단일전투에서의 전사자를 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고대전투치고 백단위까지 전사자가 기록된 전투가 살수대첩과 관산성 전투밖에 없을 정도인데 사가들도 이 전투를 그 정도로 중시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본다면 한반도 중부와 남부의 패권대결이 사실상 신라측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었다고 볼 수도 있다.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자만 2만9천 6백명이고 좌평만 4명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본토백제의 인구가 180-200만 가량으로 계산한다면 전 국민의 1%, 성인남성의 3% 가까이가 단 며칠만에 죽어버린 것이다. 이 정도면 오늘날 같으면 당장 정권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6군이 30만이 넘는 병력 손실을 냈다. 당시 독일제국 본국 인구가 (오스트리아 포함) 7천 5백만정도이고 성인남성이 1천 6-7백만으로 추산되는데 이 전투에서 30만이 넘는 보병전력 손실로 인해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우위가 뒤집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치독일에서조차도 스탈린그라드 전투 대패로 인한 사기저하가 문제되었는데 하물며 당시 백제 국력을 기준으로 봐서 스탈린그라드 수준 이상으로 패한 관산성 전투는 백제라는 한 국가 자체를 뿌리채 뒤흔들어 버릴 정도의 파급효과를 가지고 왔다.
1.왕권의 급격한 약화와 대외정책에서의 소극화
위덕왕이 관산성 전투를 주도한 책임문제때문에 3년간이나 왕위에 앉지도 못하고 귀족들이 일종의 협의제에 의해 나라일을 처리하면서 초반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에거 크게 엊어맞아대기만 했다. 고구려군의 웅진성 공세와 신라군의 가야연맹 압박에 전혀 대응하지도 못하고 그저 땜질식의 자세만을 보여주었고 대륙 동부지역의 백제영토에 대한 통제권도 상당부분 이탈되어버렸다.
2. 농업생산력 문제
이는 자세히 조사해보지도 못했지만 당시 백제는 노동력의 대량 감소에 따른 경제적인 피해를 크게 보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당장 성인남성의 3%가 단번에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 인력을 매우는 것은 당시로써 장기간이 필요했다.
3. 영토축소와 방어선의 취약화
관산성 전투 대패로 인해 백제는 소백산맥지역에서 한동안 전면적으로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당장 대가야연맹이라는 완충지대가 신라측에 합병되어 버리고,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심지어 전주이동의 전라도 지역까지 신라로 넘어가 버린다. 이로 인해 신라에 비해 가뜩이나 방어선이 지형상 불리하던 백제는 더욱 불리한 위치에서 방어하게 되면서 국력소모정도가 신라와 고구려의 2배를 넘기게 되었다.
첫댓글관산성전투에서 몰살당한 병력은 백제-가야-왜 연합 모두를 합친 숫자입니다. 물론 그 중 절반 이상의 백제 병력 피해가 있었지만, 백제 멸망시에도 보듯이 그 패배 이후 수습할 만한 여력 정도는 있었습니다. 신라도 그렇기 때문에 관산성 전투 이후 더 이상 무리하게 백제로 진격 못했던 거구요... 그런데 전주이동의 전라도 지역이 신라로 넘어갔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전 처음 보는 말입니다만? 무왕 대에 수복했던 운봉 지역, 그 지리산 골짜기 쪽은 말씀하신 곳에서 더 동쪽 아닌가요?
카페에서 어느분이(기억은 나질 않습니다.) 관산성 전투이후 백제의 후퇴는 좌평등4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 좌평4인은 성왕-위덕왕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전사하자 위덕왕은 그 지지기반을 잃고, 왕권이 약화되고, 왕이 친정을 하지 못하고(국내정치가 안정되어야 친정을 할 수 있죠.) 그때문에 백제가 위축되었다. 수긍이 갑니다. 위덕왕은 귀족들의 압박에 병력을 수도근처로 집결시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귀족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죠. 결국 가야영토를 포기하게 되고, 한강유역도 마찬가지죠. 즉 관산성전투의 패배후 백제의 위축은 병력피해보다는 이런 내부문제 때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이유는 신라는 성왕을 죽이고, 그많은 병력을 괴멸시키고도 백제영토로 더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가야영토에 대한 압박에 더욱 박차를 가하죠. 3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괴멸당했다면 물런 백제군이 절반뿐이라고 해도 1만5천에 가까운 대군이 괴멸시켰다면 한번쯤 공격할만 하지 않았을까요? 백,신 양군이 서로 공격을 할때 병력은 1,2만명내외 였습니다. 1만에서 2만이 전사했다면 공격능력을 상실했다는것뿐입니다. 거기다가 위덕왕이 왕위수성을 위해서 병력을 더욱 수도근처로 집결시켰다면 원정군 편성은 엄두도 낼 수가 없겠죠. 가야영토 포기도 이런상황을 뒷받침한다고 봅니다.
관산성 전투는 본래 백제의 응징차원의 준비된 공격이었고 신라는 신주 군주인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합류까지 해야하는 총력적인 방어 전투로 보입니다..그러나 불행히도 신라의 매복 기습에 성왕이 전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약 3만에 가까운 전사자를 냅니다만 그렇다고 백제가 멸망할 정도로 병력이 소진된 것도 아닙니다..물론 일시적인 혼란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해 겨울 10월에 물에 빠진 사람 머리를 오히려 물속에 다시 쳐 박는 일이 발생합니다..성왕이 전사한 혼란한 시점에 바로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백제 웅천성을 공격합니다만 백제가 잘 막아냅니다..
첫댓글 관산성전투에서 몰살당한 병력은 백제-가야-왜 연합 모두를 합친 숫자입니다. 물론 그 중 절반 이상의 백제 병력 피해가 있었지만, 백제 멸망시에도 보듯이 그 패배 이후 수습할 만한 여력 정도는 있었습니다. 신라도 그렇기 때문에 관산성 전투 이후 더 이상 무리하게 백제로 진격 못했던 거구요... 그런데 전주이동의 전라도 지역이 신라로 넘어갔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전 처음 보는 말입니다만? 무왕 대에 수복했던 운봉 지역, 그 지리산 골짜기 쪽은 말씀하신 곳에서 더 동쪽 아닌가요?
카페에서 어느분이(기억은 나질 않습니다.) 관산성 전투이후 백제의 후퇴는 좌평등4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 좌평4인은 성왕-위덕왕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전사하자 위덕왕은 그 지지기반을 잃고, 왕권이 약화되고, 왕이 친정을 하지 못하고(국내정치가 안정되어야 친정을 할 수 있죠.) 그때문에 백제가 위축되었다. 수긍이 갑니다. 위덕왕은 귀족들의 압박에 병력을 수도근처로 집결시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귀족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죠. 결국 가야영토를 포기하게 되고, 한강유역도 마찬가지죠. 즉 관산성전투의 패배후 백제의 위축은 병력피해보다는 이런 내부문제 때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이유는 신라는 성왕을 죽이고, 그많은 병력을 괴멸시키고도 백제영토로 더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가야영토에 대한 압박에 더욱 박차를 가하죠. 3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괴멸당했다면 물런 백제군이 절반뿐이라고 해도 1만5천에 가까운 대군이 괴멸시켰다면 한번쯤 공격할만 하지 않았을까요? 백,신 양군이 서로 공격을 할때 병력은 1,2만명내외 였습니다. 1만에서 2만이 전사했다면 공격능력을 상실했다는것뿐입니다. 거기다가 위덕왕이 왕위수성을 위해서 병력을 더욱 수도근처로 집결시켰다면 원정군 편성은 엄두도 낼 수가 없겠죠. 가야영토 포기도 이런상황을 뒷받침한다고 봅니다.
관산성 전투는 본래 백제의 응징차원의 준비된 공격이었고 신라는 신주 군주인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합류까지 해야하는 총력적인 방어 전투로 보입니다..그러나 불행히도 신라의 매복 기습에 성왕이 전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약 3만에 가까운 전사자를 냅니다만 그렇다고 백제가 멸망할 정도로 병력이 소진된 것도 아닙니다..물론 일시적인 혼란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해 겨울 10월에 물에 빠진 사람 머리를 오히려 물속에 다시 쳐 박는 일이 발생합니다..성왕이 전사한 혼란한 시점에 바로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백제 웅천성을 공격합니다만 백제가 잘 막아냅니다..
..이처럼 백제의 국력이 관산성에서 비록 3만명의 전사자를 냈다하더라도 결코 한 순간에 멸망 당 할만큼 약해지지는 안했다는 증거이지요..
아신왕이 1번, 개로왕이 1번, 성왕이 1번 무려 3번이나 대패하고, 세력이 꺽였음에도 백제는 의자왕대에도 엄청난 힘을 자랑했습니다. 신당연합군이 백제를 완전 정리하는데 3년이란 시간이 걸린걸 보면... 대단한 나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