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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오,나의 기타>
어깨에 기타를 메고 걷는다. 예전엔 그야말로 특별한 사람이나 메고 다닌다고 생각했던 그 기타를 내가 메고 다닌다. 아직도 조금은 쑥스럽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볼세라 일부러 후미진 길을 골라 다닐 때도 있다.
전국을 뒤흔든 기타 열풍에 딸아이가 배워보겠노라며 인터넷을 통해 기타를 한 대 샀다. 기타교본을 펴놓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열심히 튕기는가 싶더니 손가락이 아파 못하겠다며 투덜대기를 몇 번 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기타는 우두커니 벽에 기대어 세워진 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기타만 사면 다른 연주자들처럼 잘 연주할 수 있으리 여겼으리라. 천덕꾸러기가 다 된 기타를 보니 안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기타 인기에 힘입어 예전에 인기있었던 포크송가수들의 인기가 되살아 났다. 여기저기서 추억이 깃든 7080가요들이 넘쳐흘렀다.어릴적 우리 동네에도 기타를 메고 다니는 선배오빠가 있었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멋져보이곤 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는데 짝꿍아이가 자기네 집에 놀러가자고 하여 따라갔다.
작은 만화방을 하며 살아가는 짝꿍아이네는 살림이 누추해보였는데도 온 집안에 따스한 온기가 배어있었다.
자기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아이는 방 한켠에 세워져있던 기타를 쳤다.
내 귀가, 내 마음이 행복감으로 채워져 갔다.
그 아이는 '꽃반지 끼고' '긴 머리 소녀'를 비롯해 팝송까지 불러가며 능수능란하게 쳤다.
그 기분을 고스란히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시오리 길이 그날은 지루하지 않았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기타 하나로 어떤 노래든지 능숙하게 연주하던 그 아이는 나에게 너무나 먼 그녀였다.
딸아이 방을 드나들며 드르륵~기타줄을 튕겨보곤 하던 어느날, 나도 한 번 배워볼까? 하는 무모한 생각이 들었다. 에이 내가 무슨.....아니야 할 수 있어 이참에 한 번 배워봐? 초여름 장맛비처럼 내 마음이 오락가락하였다. 그러는 중에 까마귀날자 배떨어진다고 마침 성당에서 기타반이 만들어진다기에 염치불구하고 몸을 들이밀었다.그러나 나이도 많고 재능도 없는 나는 금세 기가 죽고 말았다. 딸아이도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던 손가락아픔도 아픔이지만 무엇보다도 머리가 녹이 슬어 제대로 감이 오지 않았다.
기타줄이 바르게 소리를 내는지 알아보는 조율도 나 혼자 힘으로는 하지 못해 옆사람에게 늘 부탁해야 했다. 도레미파솔라가 아니라 왜 미라레솔시미인지.....각 곡마다 다르게 적용해야 하는 아르페지오와 업,다운 스트로크는 왜 그리 어려운지.....머리를 짜내야 겨우 이해가 되는 타보악보는 또 왜 그리 복잡한지.....무엇보다도 무조건 외워야 하는 코드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이놈의 손가락은 왜이리 노곤노곤하지 않고 뻣뻣하여 내 맘대로 안되는지 원.....잔뜩 긴장한 채 연습하고 나면 어깨도 아프고 목도 아팠다.
이제라도 한 번 해보겠노라며 들이댔지만
늘 이팔청춘인 마음과는 달리 어느새 몸은 녹이 잔뜩 슬어있어 슬그머니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않는 손가락 놀림, 내 생각대로 나와주지 않는 목소리.....
병원 신세를 져서 고쳐진다면 정말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무심히 흘려보낸 세월 속에 내 몸도 생각도 덩달아 흘러가버리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아, 옛날이여. 훨씬 더 젊었을 때에 미리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탄식하며 배움에도 다 때가 있다고 했던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이건 아닌데, 그만 두어야 하나? 몇 번씩이나 갈등의 그네를 오르락내리락 타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도 이왕지사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찔러야 한다는 신념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버텨내어서 '꽃반지 끼고'라도 제대로 칠 수 있어야 한다는 나만의 고집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배운 곡은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이었다. D, G, Em, A7, F#m코드가 진행되는 감미로운 곡이었다. 처음 배우는 곡이라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제대로 칠 때 쯤엔 나도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일 처음 배운 첫곡이라 첫사랑처럼 마음속에 설레임으로 오래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가사가 너무 아름다워 한 편의 시같은 곡 징검다리의 노래 '님에게'도 배웠다. ~온 산에 꽃 만발할때 우리의 꿈을 이루어봐요 찬비가 오면 꿈은 꽃처럼 피어 온 세상 환히 비춰줄테요~얼마나 아름다운 노랫말인가?
즐겨들었던 팝송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아직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 과정이 다소 어렵고 무리가 있어 힘들긴 하지만 차근차근 배워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나는 행복한 사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나 어떡해' '밤에 피는 장미'도 기쁨 속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는 중이다.'꽃반지 끼고'는 내가 좋아해서 배운 곡이다. 소녀시절, 개울가 둑방길에 앉아서 토끼풀꽃을 따 손가락에 끼운 채 그 가사에 취해서 부르곤 했던 곡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그 외에도 몇몇 성가곡을 부르며 마음 속을 울리는 감동에 젖어들곤 한다.
사람이 듣기에 가장 좋은 음정이 솔음이라고 한다. 기타에선 G음에 해당하기에 중창단 이름을 'G音'으로 지었다. 그 이름에는 몇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God'의 첫 글자를 따 '주님을 찬양하는 소리'이기도 하고, 소리나는 대로 읽어 '지음'이 되면 ~을 지어내다. 창작하다의 뜻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 우리도 우리만의 노래를 만들어 주님을 찬양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큰 기쁨이 될 것인가? 또 한자어로 나타내면 '知音'이 되어 마음이 통하는 친구라는 뜻이 되어 기타와 나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될 것이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공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때때로 배우고 익히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마음을 울리는 새로운 노래를 배우며 그 곡을 내 손으로 연주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큰 기쁨이고 즐거움인가? 계속 새로운 노래를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어려운 곡을 만나면 좌절도 하게 되지만, 그것은 지나가는 일일뿐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이 더 크기에 오늘도 나는 기타를 정성스레 쓰다듬어 본다.
기타를 배운지 일년이 조금 더 지났으니 이제 걸음마를 배워 세상에 나서는 아기와 같다. 걸음이 서툴러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익숙하지 못하여 느리기도 하겠지만 넓은 미지의 세상을 향해 내딛는 아기의 걸음걸이처럼, 멋진 연주를 할 수 있는 실력이 다져질 그날을 위해 나는 오늘도 기타를 메고 집을 나선다.
<되새김질>
내 마음 속에 고요히 자리 잡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을 가끔씩 떠올려본다. 대부분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긴 하지만 되새겨보노라면 마음속에 고즈넉이 평화가 깃든다.
여름날 마루 끝에 걸터앉아 바라본 앞산의 모습이 그러하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가득하고 멀리 보였던 앞산은 아버지처럼 든든한 모습이었다. 소를 몰고 건너던 개울의 징검다리도 생각난다. 열 두어 개 정도의 돌이 놓여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아직까지 그 돌의 모양새며 크기가 사진으로 보듯 선명하게 기억된다.
개울가엔 버드나무들이 사열하듯 쭉 서있었다. 개울가 하얀 모래밭엔 자갈들 사이로 키 작은 풀들이 나있었는데 꽃처럼 예뻐서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마당가득 황토물이 가득차고 빗방울이 동그랗게 물결을 만들며 흘러내리던 모습을 마루 끝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던 때도 좋았다. 물결을 따라 내 몸도 둥실둥실 흘러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하얗게 쓸어놓은 흙 마당에 감꽃이 툭툭 떨어져 있는 모습. 더운 여름날 저녁에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그 위에서 식구들이 둘러앉아 수제비를 먹던 모습들.......뒷동산에 앉아서 동무들과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부르던 시간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평화로운 모습으로 남아있는 기억은 우리 집 소가 배불리 먹은 뒤 배를 깔고 누워 되새김질 하던 모습이다.
정축 년 소띠 해에 태어난 나는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도 유난히 소에게 많은 애정이 간다. 그래서인지 성격조차도 소를 많이 닮은 듯하다. 우직한 면이 있는 반면에 애살스러운 점은 전혀 없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꾀를 부리진 않지만 요령을 피울 줄도 모르는 편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외양간으로 돌아온 소는 배불리 여물을 먹고 난 후엔, 배를 깔고 누워 되새김질을 한다. 같은 속도로 천천히.......때로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얼굴로 쉼 없이 되새김질을 한다. 되새김질 하는 소의 모습이 나는 참 좋았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모습.
내가 어렸을 적엔, 우리 마을에서 대부분의 집들은 농사를 지었고, 집집마다 소가 한,두 마리씩 있었다. 소가 있어야만 논과 밭을 갈 수 있었고, 무거운 짐을 달구지로 나를 수 있었다. 나중에 경운기를 구입하게 되면서 부터 소의 일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농촌에선 소가 큰 재산이었고 몇 사람의 몫을 해내는 큰 일꾼이었다.
아버지는 새벽 일찍 일어나 들에 나가셔서 소에게 먹일 꼴을 바지게 가득 베어 오셨다. 싱싱한 꼴을 구유 가득히 넣어준 뒤 소가 워낭을 딸랑거리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시다가 그제야 아침 밥상을 받으셨다.
풀이 없는 겨울엔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쇠죽을 쑤었다. 큰 가마솥에다 작두로 잘게 썬 볏짚과 콩 껍질, 그리고 호박이나 무, 고구마를 숭숭 썰어 넣어 아궁이에 불을 때서 푹 끓였다. 무거운 솥뚜껑을 들어올리기라도 할 기세로 거센 김이 뿜어져 나오면 그제야 불 때기를 멈춘 후 뜸을 들였다. 김이 잦아들면, 구수한 냄새가 나는 쇠죽을 퍼서 소에게 가져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쇠죽을 본 소는 코를 벌렁거리며 킁킁거렸다. 맛있게 먹는 소를 그렇게 한참동안 바라보시다가 바지에 묻은 지푸라기를 탁탁 터시며 섬돌로 올라서셨다. 아버지가 벗어놓은 검정고무신엔 늘 지푸라기와 쇠똥이 달라붙어 있었다.
소의 아침밥을 챙기는 일은 늘 아버지의 몫이었지만 낮에 소를 먹이는 일은 내 차지였다. 점심 때가 지나면 동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집 소를 끌고 나와 산으로 올라갔다. 소의 목에다 줄을 느슨하게 감아 멱을 감긴 후, 소들을 골짜기로 몰아넣었다. 소들이 정신없이 풀을 뜯는 동안 더위에 지친 아이들은 조그만 보에서 멱을 감았다. 얼마가 지나면 산으로 올라가 두 개 조로 편을 짜서 양 쪽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맞은 편 산등성이로 소가 넘어갈라 치면 큰소리로 알려서 소를 다시 골짜기로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소를 지키는 동안 노래자랑을 하기도 하고, 집에 있는 토끼에게 먹일 칡잎을 따기도 했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오면 정금열매도 따먹고, 개암도 까서 먹었다. 정금열매는 새콤한 맛이 일품이었는데 지금의 블루베리와 생김새며 맛이 똑같았다. 보리수 열매도 줄기째 훑어서 한주먹 씩 입에 넣어 먹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건 송기(松己)였다. 소나무 제일 가운데 쭉 뻗은 가지를 꺾어 칼로 겉껍질을 벗겨낸 뒤 하얀 속살을 발라먹었는데 물도 많고 고소했다. 늦여름이 지날 때쯤이면 산 여기저기에 하얗게 된 송기나무가 해골처럼 나뒹굴었다.
그러다가 또 심심해지면 노래자랑을 하기도 하였다. 오리나무 가지를 꺾어 그 끝에다 동그랗게 말아 만든 청미래덩굴 잎을 달아서 마이크를 만들었다. 언니들은 이미자의 '기러기아빠'나 '섬마을 선생님'을 구성지게 잘 불렀다. 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괜히 서글픈 마음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엄마 구름, 애기 구름을 찾아보곤 했다. 그 가사 내용 때문에 금지곡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식교육 때문에 아이와 부인을 외국에 보내놓고 혼자 밥해먹으며 외롭게 살고 있는 기러기아빠들이 많다고 한다. 어쨌든 그 노래는 참 슬퍼서 마음이 저려오곤 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면 양쪽 산등성이에서 소들을 골짜기 아래로 몰아 내렸다. 소들은 배가 불룩해져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곧추세우곤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목에 감았던 줄을 풀어 끌고 와야 하는데 어떤 때는 소들이 너무 빨리 뛰어 잡을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집에 와보면 소가 먼저 와서 외양간에 들어가 있곤 했다. 자기 집을 찾아오는 소가 어찌나 기특하던지.......아버지는 불룩해진 소의 배를 쓰다듬어 보시곤 기분 좋아 하셨다.
한여름 내내 그렇게 산에서 소를 먹이다가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그냥 가까운 개울가로 소를 몰고 나갔다. 물가에서 소가 풀을 뜯는 동안에 물수제비 뜨기도 하고 예쁜 돌을 줍기도 했다. 소가 알아듣는 말은 '워'와 '이랴'였지만 말이 필요치 않았어도 고삐 하나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소가 배를 깔고 누워 되새김질을 하는 모습은 참으로 평화스럽다. 몸에 달라붙는 파리를 긴 꼬리로 휘휘 쫓으며 되새김질 했던 예전의 소들과는 달리 지금의 소들은 울에 갇힌 채 사육되고 있다. 풀을 먹지 않고 소화가 잘되는 사료를 먹기 때문에 되새김질도 거의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산과 들을 뛰며 마음껏 풀을 뜯던 소들은 이제 가공된 사료를 씹으며 살고 있다. 몇 사람의 몫을 해냈던 예전의 우리 소들과는 달리 울안에 갇혀 살찌우는 일에만 급급해하고 있다. 쇠죽을 먼저 끓여준 뒤에야 밥상 앞에 앉았던, 소도 한 식구로 여겼던 우리 아버지 때와 달리 지금은 자꾸만 치솟는 소 값에 연연해하며 재산 증식의 도구로만 여기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나 아직도 영화 '워낭소리'에서 보여진 것처럼, 소가 한 식구인 우리 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있다는 것을 안다. 오십만 원이라는 값어치에 크게 서운해 하며 차라리 팔기를 포기한 채, 평생 쟁기질하며 오고갔던 밭 언저리에 무덤을 만들어주고는 작별인사를 나누던 할아버지의 헛헛한 마음을 우리 모두 공감했었지 않은가?
소처럼 산과 들을 누비며 맘껏 뛰어놀았던 나의 어린 시절과는 달리 학원과 컴퓨터에 갇혀 자라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은, 좁은 우리에 갇혀서 풀대신 사료를 먹으며 답답하게 길러지고 있는 요즘의 소와 닮은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눈을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 하던 소처럼 사람들도 되새김질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하루 일이 끝나고 황혼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밀레의 그림 '만종'속의 부부처럼 여유를 가지는 마음이 바로 되새김질이지 않은가 싶다. 어느 때라도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새김질을 해보자. 앞으로 나가는 일에만 매진할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생각을 정리하며 되새겨 보자.
산에서 저만치 홀로 피어있는 꽃을 떠올리며 시 한 구절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감미로운 노래 한 소절을 읊조리기라도 해보자. 물수제비를 따라 동그랗게 번져나가던 물결 같은 감동이 마음 한 구석에서 부터 가만히 울려 퍼지리라. 소가 되새김질 하듯 내 마음의 평화도 만들고 다듬어야 자리 잡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첫댓글 이번에 동인지가 새로 나와서 거기에 실린 두 편의 수필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