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
노란빛을 사윈 모과는 점점이 누릿해지다가 갈색으로 변해 결국 하나의 검은 덩어리가 되었다. 한 시절 단단히 나무에 매달려 세상을 호령했던 호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처음부터 나무의 본 껍질이었던 양 시간의 저만치를 추억하고 있다.
모과는 생김새도 고왔고 몸도 컸으며 향도 짙었다. 그 색이 변하는 짧은 시간이 못내 아쉬웠다. 상처 하나 없이 몸통이 고와 오래 가려나 했는데, 여느 모과와 다를 바 없이 껍질을 웅크린 채 어느 날 갑자기 시들어버렸다. 범접하지 못할 검은색의 딱딱함으로 또 다른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매끈한 모과를 쓰다듬던 그날은 나도 그도 찬란했다. 찬란한 시간은 우리의 뜻대로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늦은 저녁, 지하철에서 내린 나는 집이 아닌 단골 커피집으로 향했다. 바람 불고 날이 찬데 그대로 집으로 가기에는 왠지 심심했다. 흐리게 남아있던 술기운도 합세했다.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 하면서 찻집 주인과 수다라도 떨까 했는데 모과를 보면서 나의 시간은 언제인지 모르게 멈춰버렸다.
커피를 주문하고 돌아서는데 마룻바닥에 모과들이 커다란 가방 가득 담겨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강아지처럼 쪼그리고 앉아 냄새를 탐했다. 주인은 몇 개든 맘껏 가져가라고 했다. 방금 딴 것인데 올해는 모과가 참 잘 됐다며 차를 만들어먹으라고 레시피까지 읽어주었다. 그의 말이 탐탁찮게 들렸다. 차茶라니. 모과를 토막 내 적당한 두께로 썰어 설탕에 재고 그것을 숙성시켜 차로 마시라는데 나는 영 그 과정이 싫게 들렸다. 모과는 아무래도 설긴 바구니에 담아 향을 즐기는 쪽이 어울렸다. 손에 잡히는 대로 다섯 개를 집어 들었다. 주인이 누런 종이가방에 내가 건넨 모과를 담아주었다.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에 털어 넣고 수다를 미련 없이 다음으로 미룬 채 모과 향을 맡으며 집을 향했다.
걸어오는 내내 자꾸만 모과빛 웃음이 쏟아졌다. 모과도 나를 따라 묵직하게 웃어주었다. 모과를 들고 오는 길이 행복했다. 책상 모퉁이 바구니에 담긴 모과도 행복했다. 좁은 방안을 채우는 짙은 향기는 더더욱 행복했다.
그랬던 모과는 하루이틀사흘……. 색이 변하고 형체가 무너지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겨울을 모두 채우기도 전에 쓸모를 다한 모과가 덩그러니 바구니에 담겨 있을 뿐이었다. 모과의 생을 말하기에는 나의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도 이것을 언제쯤 버려야 하나 벌써부터 궁리 중이었다.
검은 덩어리로 변해버린 모과를 보면서 나는 반소매 아래 내 살갗을 습관처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이도 언젠가는 쓸모없이 무너질 것이었다. 나는 팔꿈치와 발뒤꿈치와 하이힐에 구부러진 엄지발가락도 차례로 쓰다듬었다. 무뎌지고 꺼칠한 것이 보드라움과는 거리를 둔 채 멋쩍었다.
욕실로 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나의 껍질들이 일제히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탄력을 잃어버린 채로 어느 곳은 색이 변했고 또 어느 곳은 멍이 든 채였다. 언제, 어디서 부딪혔는지도 모를 피멍, 아팠던 기억도 없는 흔적들이 늘어진 살갗에 무늬를 남겨두었다. 거울에 비친 몸은 더욱 형편이 없었다. 몇 차례의 수술로 흉터가 나 있는 앞모습과 살아온 만큼 늘어진 뒷모습이 어느 한곳 만족스럽지 못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세월이 준, 잃어버린 탄력 앞에 까마득한 어느 날의 나를 더듬어보지만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기억은 차단되어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다.
살뜰히 챙겨본 적 없는 나의 껍질, 물기를 닦고 로션을 전체에 바르면서 처음으로 신경 쓰며 다독였다. 그것들은 힘을 잃어 이리저리 밀려났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체념한 척 웃어넘기기에는 아직도 나에겐 여자이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었던가. 나머지 로션을 덜어 손이 닿는 곳까지 펴 발랐다. 거울을 보니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이 더 형편없었다. 성형의 힘을 빌린다면 모를까 회복이 불가능한 주름은 세월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나의 껍데기였다.
나는 왜 모과를 보며 나의 살갗을 생각한 걸까. 여직 그런 생각은 처음이었다.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자각이 된 것이었다. 모과처럼 나도 아무도 모르게 색이 변하고 애당초 흙이었던 것처럼 적당히 무너져 흙으로 돌아갈 일이었다. 결국엔 벌레의 먹이가 되고 나무의 거름이 되어서 무언가의 단단한 힘줄이 돼 주겠지.
그런데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죄스러움에 못내 몸을 떨었다. 성장을 멈춘 듯 애도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한 어떤 여자아이가 나를 보며 웅크린 채로 거울 속에 앉아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검게 변한 모과를 사각봉투에 담았다. 화단 한 켠에 묻어줄 참이었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거름으로 돌아가길 바라면서도,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새롭게 피어날 봄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