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사 목 /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
▲그림=허영희(일러스트레이터) | |
[시 심사평]선명한 묘사, 참신한 비유 돋보여
1300여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한 편의 뛰어난 시를 고르는 일은 무척이나 지난했다. 오랜 수련과 고뇌를 거쳐 생산되었을 다기한 사연의 시들은 그 부피와 다양성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자의 눈을 확 트이게 하는 작품은 쉬 찾아지질 않았다.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서. 수준급의 기량과 언어의 진정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다른 응모작들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 시편들로 우종태씨의 '대패질'외 2편, 김화섭씨의 '빈집에 서다'외 2편, 고경숙씨의 '고사목'외 3편을 최종적으로 선별해놓고 고심을 했다.
우종태씨의 경우 오랜 습작을 거친 분답게 시를 끌어가는 저력과 안정된 짜임이 돋보였지만 뒷심이 조금 딸리는 듯했다. 김화섭씨의 '빈집에 서다'는 묘사와 진술능력이 뛰어나고 이야기의 전달도 뚜렷했지만, 다른 작품들이 그에 상응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고경숙씨는 언어를 다루는 재치가 상당해보였다. 묘사의 선명성이나 비유의 참신함에 위트까지 두루 갖췄고 리듬에 대한 고려도 엿보인다. 그러나 재치가 승해서일까, 가끔씩 어휘가 시적 맥락 안에서의 조화를 잃고 튀는 흠결이 있었다. 나름대로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근본 명제를 들어 우리는 최종적으로 고경숙씨의 '고사목'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외에도 한교만, 안은주, 백명희, 이경옥 제씨의 작품들도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음을 밝혀둔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격려와 함께 지속적인 정진을 부탁드린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 있으라! <김승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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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매일신문 신춘문예당선작](시)1770호 소녀-우광훈// (시조)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 백점례
1770호 소녀/우광훈
꿈꾸듯, 한 편의 오래된 우화(寓話)가 소녀의 동공 깊숙이 스며든다. 소녀는 과묵하고 비밀스런 눈빛으로 책장만을 넘겨댄다. 별이 뜨고, 소녀는 마을 어귀 파피루스 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광활하고 황량한 사막이 있는, 때론 우아하고 권위적인 무덤이 있는 이곳 오시리스 동물원으로 흘러든다. 바다표범도, 펭귄도, 사막여우도, 치타도, 판다도 없는 이곳에는 햇볕에 잘 그을린 허허로운 얼굴에 키 큰 금발의 코끼리가 있다.
소녀는 향수어린 얼굴로 코끼리를 바라보다 석관 속에 놓인 접시저울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타조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그녀의 심장. 사육사의 경쾌한 신호음에 맞춰 코끼리가 저울 위로 올라선다. 똬리를 튼 비단뱀처럼 매끄럽게 내려앉는 그녀의 영혼. 순간 불꽃이 흩날리고, 파도가 울부짖고, 사자(死者)가 춤을 춘다. 기괴하고, 음울하며, 극도로 염세적인 그들만의 연극. 불멸을 향한 오래된 문명의 허망한 몸짓.
나일강에 물그림자 드리우고, 피안(彼岸)에 다다른 소녀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목욕을 한다. 늙은 고양이처럼, 별과 달이 질 때까지
그녀의 푸른 목덜미 아래로
모래 이빨 자국만이 선명하다.
☆ 1770호 소녀= 1976년 맨체스터대에서 로잘리 데이비드 박사가 집도한 이집트 미라. 학자들은 방사능 분석을 통해 서기 105~405년 사이에 미라로 제작된 갈색 눈의 소녀로 추정하고 있다.
◇ 심사평
언어의 구체성과 상상력의 탁월함
마지막까지 남은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외 3편, 박윤근의 ‘말티즈와 아내’ 외 2편, 박승일의 ‘비 내리는 법’ 외 2편, 우광훈의 ‘1770호 소녀’ 외 2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들이었다. 네 사람 모두 언어의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만만치 않은 수준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은 긴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다양한 감각으로 그려낸 상상력이 돋보였다. 이 한 작품만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다른 작품이 너무 처져 있었다. 박윤근의 ‘말티즈와 아내’는 시를 형성할 줄 아는 능력과 선명한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구체성이 시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말티즈가 죽어도 그 딸랑거림을 그리워할 것이다.”라든가, “아내는 土耳犬으로 남고 싶어 하는/저 바다 빛 그늘 진 눈동자를 보았을 것이다.”와 같은 이미지들을 높게 보았다. ‘당선작’으로도 무난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역시 ‘외 2편’이 ‘말티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다른 작품들의 경우 무리한 설정과 그에 따른 언어의 ‘과부하’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박승일의 ‘비 내리는 법’은 재기발랄한 말솜씨와 상상력, 거침없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억지가 없는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붕에 걸린 구름의 뼈를 다 발라”내고, “샛강의 입이 건너편 뚝방까지 죽 찢어져”가는 이 작품 또한 충분히 당선의 영예를 안겨줄 만 했으나, 어쩌랴, 이 응모자에게도 작품 간의 심한 편차가 걸림돌이 되었다. 작품 공모에 여러 편을 응모할 경우 그 수준이 고르지 못하면 뽑는 이에게 불안감을 주게 마련이다.
네 사람의 시 가운데, 우광훈의 ‘1770호 소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함께 보내온 나머지 두 작품도 똑같이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선작에서 보듯이 이 작품은 스케일이 참 크다. 시인의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깊은 사유를 거느린 채, 그것도 아주 느리게, 우주와 역사, 문명세계를 거닐며 현실과 삶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 시인은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닦아 쓰는 말의 절차탁마가 보였고, 행간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오랜 내공이 느껴졌다. 신뢰가 가는 시인이다. 묵묵히 ‘장인’의 길을 걷기 바란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도광의(시인)· 문인수(시인)
◇당선소감
저는 분명히 미쳤어요. 미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요. 앨리스는 왜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일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3년 전, 한 무명 소설가는 소설이란 것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쉽게 말해 코커스 경주에서 그 흔한 골무조차 받지 못했던 거죠. 이후, 그는 하루 종일 깜깜한 토끼굴 속을 헤매며 책만 읽었습니다. 재미있고 기이한 이야기만이 시간을 세워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설가는 문득 시(詩)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시가 나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오래된 동경과 해묵은 오해 때문이었죠.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오로지 시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그는 아내의 조언과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곧장 하트여왕이 있는 성으로 3편의 원고를 보냈습니다. 이후, 그는 우체국에 갔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이 시의 목을 베어라! 저 시의 목을 베어라!” 3주일 뒤, 멋진 제복을 차려입은 물고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거울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처구니없음에 한동안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그날 밤, 그는 밀려드는 두려움에 좀처럼 잠들지 못했습니다. 툭 튀어나온 자신의 이가 한없이 부끄러웠으니까요. 존경하는 장토끼 형의 충고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아, 나는 드디어 파멸해버린 것일까요? 그렇게 뒤척이다, 스르르 잠들어버렸습니다. 입가엔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소설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다시 눈을 뜨면, 세상은 온통 지루한 일상과 무관심으로 바뀌어있으리라는 것을. 그런데, 험프티 덤프티를 만나려면 도대체 어느 길로 가야 하는 거죠? 시냇물인가요? 아니면 양의 가게인가요?
◆ 약력
우광훈
△ 1969년 대구출생 △ 대구교대 졸업 △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등단
△ 제2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소설)
2011 매일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 백점례
참 고단한 항해였다
거친 저 난바다 속
풍랑을 맨손으로 돌리고 쳐내면서
한 생애, 다 삭은 뒤에 가까스로 내게 왔다
그 무슨 불빛 있어
예까지 내달려 왔나
가랑잎 배 버선 한 척 나침반도 동력도 없이
올올이 힘줄을 풀어 비바람을 묶어낸 날
모지라진 이물 쪽에 얼룩덜룩 번진 설움
다잡아 꿰맨 구멍은 지난 날 내 죄였다
자꾸만 비워낸 속이 껍질만 남아 있다
꽃무늬 번 솔기 하나 머뭇대다 접어놓고
주름살 잔물결이 문지방에 잦아든다
어머니, 바람 든 뼈를
꿈꾸듯이 말고 있다
◇심사평
곡식을 되로 될 때 반듯하게 깎아서 정량만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덤으로 한 줌 더 얹어 주기도 한다. 그 한 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인심이 후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응모작들은 저마다 되로 담기에는 모자라지 않았지만, 흑백 속에 숨어 있는 긁힌 상처의 흔적을 읽어내는 일에 다소간 편차를 보였다. 인심이 후하다는 말을 들을 길은 없는 선자(選者)는 여러 작품들 중에 단 한 편만 으뜸의 자리에 앉힌다.
당선작 백점례 씨의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의 시적 배경이나 제재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생을 "항해"로 본 것이 그것이고, 몇 군데 낯익은 표현이 드러나고 있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제목에서 보듯 참신한 착상과 네 수 한 편이 일정한 톤을 유지하며 주제 구현을 향한 강한 응집력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다른 응모작들을 뒤로 제쳐놓게 하였다. 특히 “어머니의 버선”으로 은유된 “배”의 항해를 육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풍랑을 맨손으로 돌리고 쳐내면서”와 “올올이 힘줄을 풀어 비바람을 묶어낸 날” 등과 같은 대목은 인생과 세계에 대한 개성적인 재해석과 리얼리티를 내장하고 있다. 함께 보낸 작품들도 고른 형상 능력을 보이고 있어 신뢰를 준다. 그동안의 담금질을 바탕으로 기량을 잘 살린다면 오늘의 영광에 값하는 단단하고 옹골찬 작업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끝까지 남은 작품들은 고은희 씨의 '입, 혹은 구두', 김석이 씨의 '아우라지', 이한 씨의 '과일가게 앞에서'이다. 깊이 있는 육화 과정과 새로운 감각이 돋보였지만, 마무리가 미흡하거나 호흡이 짧아 아쉬운 점 등이 당선작에 못 미쳤다. 에오라지 시조 하나만 끌어안고 일평생을 천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회는 올 것이다. 신묘년 새해에도 시조의 밝은 미래를 보여준 모든 응모자들의 건승과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이정환(시조 시인)
◇시조 부문 당선 소감
아픈 마음 어루만져주는 시조
세상에 태어나서 늘 나에게 기쁨만을 안겨준 아들이 큰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날이었다. 이틀째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 나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신춘문예 공모에 작품을 보낸 것마저 깜빡 잊고 있었는데 당선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움켜쥐고 있었던 문학, 내가 모든 힘든 상황들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문학의 힘이었다. 마침내 그 문학이 내게 이렇게 큰 위로와 기쁨을 안겨 주는 순간이었다.
막연하게 문학의 세상을 그리워 해온 나에게 적극적으로 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10년 동안 마음 써 주시며 격려해 주신 경주문예대학 이근식 원장님. 그리고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 통신으로 귀한 시조 공부를 하게 해 주시고 자상하게 챙겨 주신 민족시사관학교 윤금초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또한 시조 쓰기를 권유하셨던 정혜숙 시인께도 이 기회를 빌려 인사를 드리고 싶다.
매일신문사와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보답할 수 있도록 좋은 시조, 아픈 마음들을 어루만져 주는 시조를 쓰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약력
백점례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경주문예대학수료·민족시사관학교 수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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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새는 없다 -박송이
'새는 없다'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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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 |신춘문예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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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문화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 | Daum 미디어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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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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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오래된 골목 - 장정희|신춘문예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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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래된 골목 - 장정희
작은 아버지 바지가 걸린 바지랑대 사이로 푸석한 골목이 보였다.
구암댁 할아버지 이끼 낀 돌담을 짚으며 모퉁이를 돌아가고
양철대문이 덜컹, 삽살개가 기다림의 목덜미를 물었다.
입대한 큰아들 주검으로 돌아오던 그날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는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발가락이 오그라든 대문은 문패를 버리고 밤새
신작로 쪽으로 귀를 던져 놓고 있었다.
낮은 지붕을 내려온 거미가 먼저 발을 내딛는 골목,
목줄을 잡아 맬 수 없는 굴뚝으로 연기는 담쟁이넝쿨같이 기어 나왔다.
뼈마디 드러난 상처를 덮듯 배추는 또 자라나고
햇살은 어두운 골목에 도둑고양이의 눈빛을 씨앗처럼 심어주었다.
다섯 살 박이 손자가 작은 아버지 팔을 잡아당기며 대문을 나서고.
나는 빨랫줄 문 집게처럼 뻣뻣한 골목의 시간을 만지고.
바람이 골목에 발을 담글 때마다, 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수없이 들여다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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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파밭 - 홍문숙 |신춘문예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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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파밭 /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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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늘의 운세 - 권민경|신춘문예작품
//
■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늘의 운세 /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1982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중
[심사평] 권민경 씨의 시는 묘사와 표현의 감각이 청신했다. 당선작이 된 ‘오늘의 운세’라는 작품의 경우, 개인적 운명과 삶의 시작을 둘러싼 시적 해석이 세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으며,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은 시간의 아이러니에 살아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이시영 시인·이광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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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춘 문예 작이네요 잘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