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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생
박운현
(상)
우리 아버지는 반풍수다.
언뜻 지관이나 풍수사를 떠올리기 쉬우나 그게 아니다. 한문·신학문을 반 반 공부한 우리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밀양박공 황묵과 기성반씨 늑평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1월이었다.
한일합방 직후의 아득한 옛날이니 지금 시대와 비교해 보면 상전벽해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었다, 문명혜택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때였으니, 세상만사 돌아가는 물정이라고는 거의 알 수 없는 시절이었으리라.
청도군내에서 학교라고는 청도공립보통학교, 풍각공립보통학교, 금천공립보통학교가 전부였다. 물론 중등학교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우리 집은 이서면 수야리 귀일이었다. 풍각공립보통학교에서 2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1911년 청도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1918년에 풍각공립보통학교, 금천공립보통학교가 속속 개교되었다.
그중 우리 마을과 제일 가깝고 통근이 가능한 학교는 풍각공립보통학교였다. 우리 아버지는 14살 늦깎이 나이인 1924년 4월에 풍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던 것이다. 요즘 학령기로 따진다면 늦어도 한참 늦은, 중학교에 다닐 나이에.
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릴 적에는 자남 박재식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다 늦게야 할아버지가 개화의 물결에 따라 신학문에 눈을 뜬 것이다. 그러니 10년 가까이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한 셈이다.
할아버지 슬하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에 배우면 얼마나 배웠겠는가. 학교를 늦게 들어간 까닭은 우리 마을에서 학교까지 만만찮은 거리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고 할아버지가 신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로 늦게 깨달은 때문이리라.
20리 길에는 들을 지나고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고, 재를 넘는 먼 거리다. 교통수단이라고는 거의 전무하다 시피 하여 걸어 다니는 세상이었으니. 들판에는 들짐승이, 산에는 산짐승이 한없이 설쳐 대었다. 그때는 산에 호랑이가 남아있을 시절이었기 때문이니, 산이나 들에는 짐승들이 수도 없이 많이도 살고 있었을 것이리라.
먼 거리라서 새벽같이 집에서 나와 등굣길에 올라야했다. 자연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우리네 나라 잃은 백성들이 배를 굶주리며 조반석죽하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의복은 또 어떤가, 무명저고리에 바지, 무명두루마기 엉성한 학생모 차림에 얇은 버선 미투리신발이 고작이었다. 헐벗고 굶주리며 20리 학교 길을 걸어가니 어린 소년의 꼴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잘사는 양반가 자제들은 비단옷에다 비단가죽 신발을 신고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금수저 은수저를 갖고 태어난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은 편히 학교생활을 한 셈이다.
우리 아버지 같이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자제들은 갖은 고생고생 다하며 학교를 다닌 것이다. 꼭두새벽 동녘하늘이 채 밝아오기도 전에 아침을 먹고 그러하기 6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고 다닌 것이다.
흰쌀밥에 고기국 영양식은 상상도,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나물먹고 물을 마시고 멀건 죽으로 속을 채우며 학교생활을 하였으니, 그 쓰라린 고통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학교생활은 열심히 하고 다녔다. 개근상도 받고 우등상도 받고 하였으니.
이런 헐벗고 굶주리며 다닌 학교생활도 운명이려니 하고 다녔을 것이리라. 그 보람으로 6년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야말로 형설지공이었다. 졸업식 노래도 형설지공 그 노래였으니. 1930년 4월 7일이었다.
학교 진학은 꿈속에서도 못 꾸던 때였다. 청도군내 중등학교란 눈을 비벼 보고아도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중등학교가 있는 곳이란 대도시인 대구나 부산에 나가야 겨우 볼 수 있었다. 알려진 학교라고는 대구에는 대구 고등보통학교 정도.
경제력이 형편없는 지라 상급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내었다. 그젠 나이도 들었다. 20살이었다. 그때 20살이면 노총각 소릴 들을 나이었다. 그리하여 졸업을 한 그해, 지인의 중매로 대성면 운산리 규수를 아내로 맞이했다. 나이는 같은 1912년생. 하지만 향학의 꿈은 버릴 수는 없었다.
졸업을 하고 집에서 강의록을 공부하며 중등학교 과정을 배웠다. 영어며 수학 물리 등. 하지만 처음 접하는 공부라 만만찮았다. 중등과정은 배우기가 어려워 그만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집에서 농사나 거들며 살아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인생항로의 방향을 바꾸어 동네사람들의 권고와 아버지의 결심으로 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명동야학’이란 당당히 간판을 걸고 학동들에게는 교모 교복차림으로 정식학교인 보통학교 수준의 공부를 가르치며 수업을 하였다. 낮에는 농사를, 밤에는 공부를 가르친 것이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이다. 5,6세 아이들부터 20세 전후의 청년들까지. 수업료는 받지 않고 무료였다.
그러니 아버지 당신의 공부는 한문도 신학문도 끝을 못 본 반풍수인 셈이다. 아버지가 한문을 끝까지 배웠더라면 큰 한학자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때 아버지 나이의 사람들은 정식학교 공부를 한 사람은 드물었다.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생보다 귀한 존재였다. 2,3백호 마을에 보통학교 학생 10명 정도 될까 말까 한 수준이었으니.
그렇게 몇 십 년을 마을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친 것이다. 1941년 일본제국주의가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강제징용을 하며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 아버지는 징용을 반대하며 마을 청년 징용대상자들에게 정보를 알리고 피신시켜 귀중한 목숨을 건져준 일이 많았다.
결국 면사무소에 알려지고 일본 앞장이 면장에게 혼이 나기 일쑤. 아버지는 이런 자들에게 한국의 독립이 정당함을 주장하며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야간에 공부를 가르치며 우리나라 독립의 정당성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문맹퇴치 운동, 조국의 광복운동을 그렇게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면사무소에서는 면서기로 채용하기 위해 아버지를 불렀으나 황국신민, 내선일체의 일제 협력이 싫어 끝내 거절하고 마을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부를 계속 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끈질긴 단말마적인 발악도 끝내 수포로 돌아갔다. 일본 제국주의자의 본토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두 손을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본제국주의는 멸망하였고 꿈에서도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조국은 해방이 되었다. 그 감격은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해외에서, 먼 이국땅에서 환희의 태극기 물결로 넘쳐흘렀다. 육로로 또는 귀국선을 타고 독립투사나 징용자들이 속속 고국으로 귀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감격의 눈물도 잠시. 그 이후 국가운영의 통치방식을 두고 신탁찬반으로 나뉘어져 전후 혼란이 계속되었고 이로 인한 정국은 미군이 담당하여 주었다. 이른바 미군정시절이다.
아버지는 미군정시절에 문맹퇴치 운동 교육 강사로 위촉받고 동네사람들에게 해방 전과 다름없이 공부를 가르쳤다. 그 공로로 표창도 받았다.
그렇게 해방정국이 계속되다가 미군이 손을 떼고 드디어 감격의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였고 나라도 점차 안정되어 갔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미군정 시절을 그렇게 질곡의 삶을 살아오셨다.
어느 인생
박운현
(하)
조국은 광복되었고, 1948년 5월 10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총선거에 마을사람들이 많이 참여하도록 알리며 투표를 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실시한 선거다.
그리하여 지금 정부에서는 이날을 기념하여 5월 10일을 ‘투표의 날로’지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우리 청도에서는 많은 후보가 이 선거에 출마하여 난립하였으나 독립촉성회의(후에 자유당으로 당명변경) 박종환 후보가 당선되었다. 다행히 전국적으로 큰 사건사고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다행이었다.
역사적인 총선거로 대한민국 탄생의 모태가 된 선거였다. 그해 5월에 개원하고 의장, 부의장 및 상임위원장 선거가 있었는데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가 각각 당선되었다.
바로 정부가 탄생되면서 대통령에 이승만, 국회의장은 신익희, 대법원장은 김병로가 각각 취임하였다. 이어서 국무위원이 임명되고 내각이 구성하여 정식으로 대한민국호가 출범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유엔에서 인정을 하였다. 대한민국이 정통성 있는 합법정부로 세계만방에 고한 셈이다. 한편 3.8선 이북에서는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가짜김성주가 소련의 사주아래 권력을 잡았다. 남한 내에서도 박헌영, 김두봉 등이 남로당을 결성하여 좌익게일라 활동을 펼쳤다.
그 뜻깊은 대한민국호의 출범으로 어엿한 독립정부로 세계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독립국가의 백성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일상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대한민국정부가 출범하고도 곳곳에는 해방공간에 결성된 남한 내 남로당 빨치산게릴라들이 여전히 사회를 혼란시켰다.
특히나 제주도, 여수·순천, 지리산공비들이 심히 지역치안을 혼란케 하고 주민약탈, 방화, 요인납치 암살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고 적화통일의 폭력혁명을 기도하였다.
청도에는 운문산, 용각산, 비슬산 등지에 게릴라들이 숨어 활동을 자행하였다. 이서 삼성산 일대에도 그들의 마수가 뻗어있었다. 낮에는 숨어있다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갖은 만행을 다 저질렀던 것이다.
수야1리에는 마을이장이 피살되고 방화가 일어나고 식량, 닭, 개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을 해갔다. 그리하여 이서지서에서 경찰이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펴고 가까스로 진압을 한 것이다.
지진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면 일제히 쥐들이 바삐 움직이며 숨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다가 끝내는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북한의 김일성이 탱크를 앞세우고 6.25일 새벽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다. 모내기철이라 장병들이 영농휴가를 가고 전방은 텅 비다시피 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피를 흘리고 주요 산업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어 눈으로 보기에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국민들은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유엔군이 파견되고 의료지원이 뒤따라, 우리 대한민국이 나락에서 위기를 건질 수 있었다.
6.25가 끝나고 유엔의 지원 아래 전후복구도 원만히 이루어져 차츰 나라가 안정을 되찾아 갔다. 전쟁이 끝나고 국민들이 일상생활로 돌아온 것이다.
이 시절, 우리 아버지는 우리문중의 보첩편찬 사업을 맡았다. 대구에 가서 기숙을 하면서. 이게 지금의 우리문중 보첩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 편찬은 생애 큰 보람으로 남아셨을 것이리라.
어느 듯 나도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6.25의 상처가 다 아물기 전이라 가정이나 나라의 살림살이가 팍팍하였다. 지·엔·피 80불 수준밖에 안되었으니. 여전히 초근목피하며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다.
봄철이면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덜 익은 풋보리이삭을 따다 찧어 사카린을 넣고 떡보리를 해먹기도 일쑤, 쑥을 뜯어 죽을 쑤어 먹기도 예사. 형편이 좀 나은 집에다 가을에 갚기로 하고 장리쌀을 조금씩 꾸어 먹기도 했다. 그래도 집안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짓는 농사는 소규모 영농에다 농사일도 숙달된 일꾼처럼 일을 하시지 못한 탓이기 때문에.
어린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겨우 농사일을 거들었다. 시원찮은 부자가 농사일을 하면 얼마나 하랴. 그런 악순환을 해마다 되풀이하다 우리 청도에서 잘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이 일어났고, 근면·자조·협동의 기치아래 주민모두가 합심하여 발벗고 나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였던 것이다.
마을안길과 농로를 넓히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개량하고, 토담을 블록으로 마을담장을 새로 쌓았다. 여태 호롱불 아래 살아오던 생활에서 전기도 들어와 문명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 탈바꿈 하였다.
이때 지난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유실되었던 우리 집 앞 200㎡ 정도의 텃밭 부지에 흙을 퍼 날러와 복토를 하여 축대를 쌓고 마을길에 편입하였고, 그리고 동네입구에도 100 ㎡정도의 텃밭을 한 푼의 보상도 없이 무상으로의 마을길에 희사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내가 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하여 가정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졌다.
이어서 두 동생도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여 가정사정은 남들과 같이 삼세끼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동네사람들도 모두가 다행으로 여겼다. 가로 늦게 가정형편이 나아졌고, 그리하여 마을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복 노인’이라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도 조상대대로 가난에 쪼들리다 겨우 밥먹고 살 형편이 되었으니 그 감개는 이루다 말하지 못할 만큼 지대하였으리라….
세월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멈추지도 않고 흐른다. 하여 어느 듯 아버지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노령으로 건강은 많이 쇠약해져 갔다. 좋은 세상, 좋은 시절을 더 오래 향유하다 가셨으면 좋으련만 세월을 붙잡아 둘 수는 없는 일.
좋은 세상 좋은 시절을 만나 마음껏 오래도록 살아 보지도 채 못하시고, 1995년 11월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어르신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이 있듯, 태산과 같이 믿고 의지하고 따르며 집안의 바람막이, 버팀목 역할을 해오시던 어른이 돌아가시니 허허롭기 그지없다.
부디 저 세상에서는 이 세상에서처럼 모진 풍파를 겪지 마시고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 가셨으면 좋겠다. 이것으로 아버지의 한 많은 인생을 한 조각 글로 정리하고 끝을 맺는다. 아버지의 85년 생을 짧을 글로 대신하다 보니 누락된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하지만 짧은 지면, 짧은 시간에 간단히 기술하느라 부분 부분만 약술한 것으로 해량하시리라 알고, 스스로 과오를 저지른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누구나 한번 겪는 인생은 지나고 보면, 지난 세월이 꿈만 같을 것이다. 좋은 시절, 좋은 세상에 좋은 일 많이 하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간절하게 느껴진다.
첫댓글 아버님께서 정말 훌륭하셨네요. 좋은글 고맙습니다. 박선생님. 하반기 수필반 신청하셨어요. 9월수업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