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상철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때 그 상철이는 어디로 갔을까?
벌써 사십 여 년 전의 일이다. 까마득히 잊힐 것만 같았던 그 일이 가끔은 신산한 삶의 한 가운데를 비집고 들어와 헛헛한 웃음을 웃게 한다.
추억이란 이런 것일까?
초등학교, 아니 그 당시로 말하면 그 애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늦봄이었다.
그날도 4교시 수업을 마치고 그 애와 나는 재빠르게 우물가로 갔다.
늘 듣는 소리지만 그날 따라 선생님의 종례시간 훈시가 왜 그리 장황한지, 쑥과 콩을 갈아서 쌀알 몇 톨 넣어 만든 허여멀건 죽으로 아침을 떼우고 학교에 왔으니 오죽 배가 고팠을까?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나고, 그게 부끄러운 소린 줄 알고 제깐에는 소리를 죽이려 배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움켜줘 보기도 하고 안간힘을 써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그애가 옆구리를 찌른다.
그애도 나와 비슷한 상황인 듯 했으나 내코가 석자라 미쳐 가늠하지 못했었나 보다.
한 손으로는 자기 배를 움켜잡고 또 한 손으로는 이마에 삐직 맺혀있던 땀방울을 닦으며 그애가 귓속말을 한다.
“야, 우리 종례 마치고 우물가로 가자.”
선생님 훈시가 끝나자마자 책보따리를 허리 춤에 질끈 동여메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쌀같이 우물가로 달려갔다.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목에 힘줄이 당길 정도로 벌컥벌컥 마셨다.
그제서야 우물가에 서 있던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가 눈에 들어오고 파란 하늘도 보였다.
어느 정도 허기를 면했던지 그애가 먼저 씨익 웃으며 입가에 묻어 있던 물을 손으로 훔친다.
나도 계면쩍은 모습으로 실눈을 뜨고 그애를 바라 보았다.
풋풋한 웃음이 나왔다.
“너도 배고팠냐? 나도 배가 고파 죽는 줄 알았다. 오늘 아침에는 밥도 못 먹었거던.”
나는 죽이었지만 그래도 아침밥이라고 먹기는 했지.
괜시리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그애는 우리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장통 어귀에서 남의 집 세를 얻어 할아버지와 단 둘이서 산다. 누구 집 쌀독에 쌀이 얼마나 남아있고 숟가락이 몇 개 있는가를 알 정도로 서로의 사정을 환하게 아는 사람들이 고만고만하게 실팍한 살림살이를 보듬어 안고 살아가는 시장통 동네다. 그런데 상철이네는 여기가 고향이 아니라서 언젠가는 떠날 꺼라고 동네 어른들이 쉬쉬하며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강릉 어디가 고향이라고도 했다가 태백 어디가 고향이라고도 했다. 명절이 되어도 피붙이가 없는 지 찾아오는 손님 하나 없고 어디로 떠날 채비를 한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을 어른들은 상철이네 아버지가 탄광촌에서 일하다가 함몰사고로 돌아가시고 그후로 어머니도 떠났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상철이를 데리고 살길 찾아 여기저기 떠돌다가 우리 동네로 흘러 들어 왔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채를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그 당시만 해도 채의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아 겨우겨우 목에 풀칠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가끔씩 동네 아주머니들이 풋나물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무우며 배추 따위를 가져다 주는 것을 본 적은 있다. 그러니 상철이가 제대로 매 끼니를 떼울 수 없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애나 나나 세 끼 끼니를 풍족하게 먹을 수 없는 처지는 비슷했지만 적어도 나는 부모형제가 있지 않은가.
시큰거리는 콧잔등을 괜시리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그애가 바가지에 물을 떠 내앞으로 내밀며 한 번 더 마시라고 권한다.
“야, 우리 지금 역전으로 탄 주우러 갈래?”
옥산역은 문경 탄광에서 채탄한 석탄을 실어 나르던 기차가 꼭 쉬어가는 자리다. 여객열차를 제외하곤 대부분 석탄을 실어나르던 기차가 다니던 경북선 간이역이다 보니 어김없이 석탄을 싫은 기차는 이곳에서 정거를 한다. 기관차가 여남재 고개를 넘기 위해 역에 정거하여 석탄과 물을 채우기도 하고 때로는 기차에 실려 있던 석탄을 역사옆 간이 저탄소에 쌓아놓기 위해 인부들이 삼삼오오 힘을 합쳐 부려 놓기도 한다. 이때 인부들은 일부러 석탄을 흘리기도 하고 저탄소와의 경계가 모호한 곳에 석탄을 흩뿌려 놓기도 한다. 그러면 인부들의 식솔이거나 아니면 암암리에 약조를 한 남정네와 아낙들이 저탄소 창고지기의 눈을 피해 석탄을 은근슬쩍 주워다가 나름대로 구공탄과 갈탄을 만들어 쓰거나 혹은 그것을 팔아 살림에 보태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 당시는 거의 대부분 가정이 나무를 때 난방을 하거나 밥을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시장통이나 도로옆 소위 부잣집들은 구공탄이나 갈탄을 때 밥을 짓거나 난방을 하기도 하였다. 몇 안되는 어떤 가정은 아예 구공탄 찍는 틀을 준비해 두었다가 여름철 한꺼번에 일 년 쓸 구공탄과 갈탄을 찍어 말린 후 창고에 갈무리해 사용하기도 하였다. 석탄을 잘게 부수워 흙과 짚을 섞어 구공탄을 찍기도 하였고 고구마만한 크기의 갈탄을 손으로 직접 빚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추운 겨울날 구공탄이나 갈탄의 화력을 확인한 사람들은 석탄의 위력에 매료되어 그 수요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있던터라 이 때를 틈타 시장통에는 충하형님네라고 수공틀에 구공탄을 찍어 만들어 파는 가내수공업 연탄공장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이 연탄 공장에서는 대부분 석탄을 사서 구공탄을 찍어 팔았지만 더러는 은근슬쩍 훔친 석탄을 싼값으로 사 섞어 찍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부적절하지만 판로가 있으니 자연적 연탄 부스러기를 주워 오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그 소식을 들은 동네 조무래기들까지 합세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암암리에 석탄부스러기를 시멘트 푸대에 넣어와 몇 푼의 돈과 바꾸어 가곤 하였다. 더러는 직접 구공탄과 갈탄을 만들어 사용하던 부잣집에 석탄부스러기를 가져다 주는 경우도 있었다. 연탄공장이건 개인 집이건 간에 석탄을 가져오는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가 역 언저리에서 석탄을 주워왔다고 하였다. 우리같은 동네 조무래기들은 저탄소의 쌓인 석탄을 손가락으로 긁어 손톱 밑이 새카맣게 변하는 줄도 모르고 시멘트 푸대에 넣다가 제 몸보다 더 커진 푸대를 운반한답시고 낑낑대다 창고지기에게 들켜 혼쭐이 나기도 어려번이다. 그렇지만 다행히 시커먼 손에 쥔 몇 푼의 돈으로 면할 허기를 생각하면 겁모를 용기가 생기기도 하였다. 몇푼의 돈을 받아쥐자마자 우리는 우체국 옆 국화빵을 파는 가게로 달음박질 한다. 그곳에는 갓 구운 국화무늬 풀빵과 함께 늘 시래깃국을 한 그릇씩 주었다. 허겁지겁 국화빵을 먹으면 사래가 들리기도 하고 목이 메이기도 하지만 뜨끈뜨끈한 시래깃국 한 그릇은 얼마나 든든한 요깃거리인가?
상철이는 아마도 우체국 옆 빵집을 생각하며 흐뭇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깟 위험이 대수냐? 씨익 웃으며 곧장 석탄을 주우러 가자고 채근이다.
“그래, 가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허리춤에 있는 책보자기를 펴 책을 합쳤다. 합친 책을 상철이가 다시 허리춤에 단단히 동여 멨다. 석탄을 담을 푸대 대신 책보자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옥산역으로 달음박질 쳤다.
다행히 창고지기는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살금살금 산등성이 만한 저탄소 그늘막으로 몸을 피하며 준비해 온 책보자기에 석탄을 주워 담았다.
만약에 창고지기나 역무원이 오면 재빨리 땅바닥에서 석탄을 주웠다고 말하리라.
우리의 깜냥으로 책보자기에 가득 찰 만큼 석탄을 담았다. 네 귀퉁이를 겨우 묶고 책보자기를 들고 나오려는데 아뿔사 들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이 담은 모양이다. 낑낑대며 어떻게든 운반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뿌지직, 찌이익...”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난감해 하고 있었다.
큰 일이다.
책보자기가 찢어졌다.
석탄의 무게를 못 견딘 책보자기가 그만 찌이익 찢어지고 말았다.
입 언저리를 씰룩거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시커먼 손으로 닦고 있는데 상철이가 더 난감한 표정으로
“야, 어떡하지?”
“?......”
“쌌어. 나 똥 쌌단 말이야.”
자조적인 표정으로 상철이가 똥을 쌌다고 말한다.
찰진 것 하나 없이 하루 종일 물만 들이킨 상철이가 책보자기에 담긴 석탄을 들려다 배에 너무 힘을 준 모양이다.
“이놈들, 거기서 뭐하냐?”
갑자기 창고지기의 커다란 목소리가 저만치서 들렸다.
우리는 책보자기고 석탄이고 할 것 없이 왔던 길로 줄행랑을 놓았다.
어떻게 뛰었는지도 모르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참을 뛴 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멈칫 뒤를 돌아 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따라 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다행히 상철이의 허리춤에는 책 보자기가 그대로 뎅그라니 달려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까운 시냇가로 느릿느릿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석탄을 주워담다가 묻은 손때는 물론 땀으로 얼룩진 낯이라도 씻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은 상철이 똥싼 바지를 씻는 일이 어쩌면 가장 시급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옷을 입은 채로 풍덩 물에 들어갔다.
물이 허리춤까지 찼다.
차가운 냉기 때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늦은 봄이었지만 시냇가에 몸을 담그기는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구린내나는 바지를 입고 내일 학교를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시냇물에 헹군 상철이의 바지가 마를 때까지 우리는 풀숲에 누워 푸른 하늘을 쳐다 보았다.
가까운 산에서 간간히 뻐꾸기가 울었다.
첫댓글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그 친구분 소식이 궁금합니다. 압축 고도 성장으로 물질은 풍요로와졌지만 우리 아이들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실된 우정, 아름다운 추억, 자연과의 교감, 우리 사회가 지금 가고있는 방향이 무섭습니다. 어쩌면 좋아요?
정신 없이 읽어 내려가는데 엥? 끝나버럿소? 배고픈 시절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따기운 햇살 아래 흔들리는 발자국들이 보입니다.
60년대 배고프고 힘들어도 투정조차 부릴 수 없었던 시절.상철이와 병삼이, 또 우리 모두에게도 산처럼 쌓인
그리움으로 남아 살아 있습니다.그러나 다 지나갑니다.흐르는 물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