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동 티타임] 김애자/ 작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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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자/ 수필가, 계간수필 자문위원 역임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충주문인협회 고문.
의료 파행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내가 존경하고 믿었던 의사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정부가 발표한 의대생 증원 2천 명에 대한 저항에 내가 옳고 그름을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거룩한 직업이란 점이다. 거룩한 직업이기 때문에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도 몸이 아프면 의사 말에 절대복종한다. 옷을 벗으라면 옷을 벗고, 사타구니를 보이라면 사타구니를 들어 올린다. 이렇게 환자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인정받는 이가 바로 의사다.
나의 기억 속에는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다니던 젊은 의사 모습이 성자로 남아 있다. 1960년대 초에 연세대 의대에서 내과를 전공한 젊은 의사가 시골 면사무소 뒤에 병원을 개원했다. ‘연세병원’이란 간판을 걸고 간호사인 아내와 병원을 차린 의사는 환자가 거동을 못 하면 청진기와 약품을 자전거 뒤에 싣고 환자의 집으로 왕진을 나갔다. 영업용 택시도, 자가용도 없던 시절이라 자전거를 끌고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 찾아가면 환자의 방은 어두컴컴하기 일쑤였다. 목욕시설도 없던 때여서 환자의 몸에선 악취가 났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양 환자의 가슴을 풀어 청진기를 대고 진찰했다. 응급할 땐 자전거 바퀴를 최대한 빨리 돌려 경찰서로 달려가 경찰서에 있는 지프차에 환자를 태워 도립의료원으로 이송시키는 일도 그분의 몫이었다.
시골병원에 들어온 의사의 친절함이 입소문을 타자 다른 지역에서도 환자를 마차에 태우거나 자전거를 이용하여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천연두와 장티푸스 예방접종도 연세병원에 맡겨졌다. 군 보건과에서 요청한 일이었고, 주사 약품은 정부에서 무상으로 보급해 주었다.
연세병원 원장은 착실한 장로교 교인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세브란스의과대학을 설립하도록 도왔던 언더우드와 에비슨, 그리고 설립자금을 후원해준 ‘존 세브란스’를 존경했던 그는 전공의료 과정을 이수하면 농촌으로 들어가 가난한 환자들을 돌볼 것을 학생시절부터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한국이란 후진국에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언더우드와 그 가족들이 보여준 박애정신에 감동한 원장은 그 감동을 실천하기 위해 농촌으로 들어와 병원을 차렸던 것이다. 보릿고개를 넘길 즈음에 환자들은 현금이 없어 치료비를 가을로 미루면 미룬 대로 받아들였다. 가을이면 돈 대신 잡곡으로 가져오는 이들도 허다했다. 원장은 쌀이나 잡곡을 받으면 곧바로 충주시에 있는 맹아학교로 보냈다. 가톨릭재단에서 운영하는 맹아학교 기숙사에서 돈이 없어 밥값을 미루는 장애학생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원장은 주일이면 아내와 주일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교회 건물은 작고 초라했다. 교회 바닥은 멍석을 깔았고, 지붕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올린 초가였다. 게다가 목회자 월급을 줄 형편이 못 되어 전도사가 사목 활동을 대신 했지만, 그분은 멍석을 깐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으며 매달 11조 헌금을 냈다. 그 헌금은 전도사의 생활비와 교회운영비로 요긴하게 쓰였다.
원장은 30년 동안 그렇게 이타정신으로 연세병원을 운영하고 고향에 있는 보건소로 돌아갔다. 그분의 진료실 벽에는 히포크라테스 선언문 대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쓴 연세대학 교훈을 액자에 담아 걸어 놓았었다. 그분은 작은 예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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