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는 진화하고 싶다
오십 년 만의 추위라, 정말 대단한 날씨군. 이런 날, 사람들은 일찌감치 따뜻한 잠자리에 들었겠지. 나 같은 불침번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으면서 말이야. 이런 날일수록 정신 차려야 해. 인적은커녕 시도 때도 없이 달리는 차량도 볼 수 없으니 누가 이 틈을 노릴지 알 수 없는 일이거든.
하기야 눈 부릅뜨고 보는 일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게 힘들다는 거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당장에 나설 수가 없으니 속만 터질 수밖에.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단기 저 녀석도 이제 더 이상 팔을 치켜들 일이 없으니 조용하네. LED 불빛만 깜박이게 해놓고 잠에 빠져버렸군.
엊그제 살짝 내린 눈에 얼어붙은 주차장 바닥, 희미한 불빛에 반사되어 음산하기까지 해. 암만 둘러봐야 온기라고는 찾을 수가 없네. 하지만 움직임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다 해서 잠들 내가 아니지. 아차, 지금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잠이라는 프로그램은 내 태생에 입력되지 않은 걸 깜박했어. 사람들 속에서 지내다 보면 가끔은 내가 사람인 줄 착각도 하는 모양이야.
벌써 새벽 한 시. 추위는 지금부터 절정일 텐데 이제 별 일이야 있을라고. 아니, 그런데 누군가 다가오고 있지 않아? 이 시간에 텅 빈 주차장에는 왜 오는 거야.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봐서 취객이 분명한데 제발 그냥 가시게나. 가만 보니 낯익은 얼굴도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이지?
가만, 차단기 막대를 두 손으로 움켜잡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어렵쇼, 마구 흔들어대고 있어. 점멸등이 지그재그로 어둠을 가르며 춤을 추는구먼. 있는 힘을 다해 꺾어 보다가 억지로 땅바닥에 잡아 누르고 발로 지끈지끈 밟아대는군. 큰일이네. 저게 보기보다 값이 꽤나 나간다는데 말릴 방법이 없으니. 이럴 때는 붙박이 신세가 여간 답답한 게 아니야. 소리라도 지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저 여인은 또 누구야. 황급히 달려와 남자를 말리긴 시작하는군. 뒤에서 잡아당기다가 팔을 잡아채 봐도 소용없는 걸. 남자는 점점 광포해지는데 도무지 이길 힘이 없어 보이니, 이를 어쩐다. 저런, 말리는 여인을 냅다 팽개쳐 땅바닥에 처박아 버리다니. 차디찬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여자, 괜찮을까. 쯧쯧, 그새 차단기 막대를 기어이 절단 내고 마는군. 드디어 두 동강으로 꺾여버리고 말았어. 이제야 성이 좀 풀리셨나? 맞은 편 골목으로 비칠비칠 걸어가고 있어. 겨우 일어선 여자도 뒤따라가는 걸 봐서 그의 아내가 틀림없는데, 오죽 속이 상할까. 아마 저 속은 속이 아닐 거야.
내 어디서 동키호테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혹시 저 남자, 그를 흉내 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차단기는 그에게 풍차의 날개였단 말이지. 이런, 궁금해 하는 거, 사람들 버릇인데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어. 허구 헌 날 별별 일이 다 벌어지는 세상사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참견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해.
형편없이 망가진 차단기를 보고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하지. 다음 날, 당장 조사가 시작될 수밖에. 내 회로에 담긴 장면을 돌려보며 누군지 찾아내려 하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아. 이른 새벽의 그 남자, 그 순간에 지켜보던 눈이 있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하긴 누가 있건 없건 그는 일을 저질렀을 거야.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 그가 차단기와 씨름할 때 언뜻 보였던 울분과 외로움을 떠올리면 그나마 그를 살린 건 지난 밤 일이 아닌가 싶어. 그렇게 풀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어느 길모퉁이에 쓰러지기라도 했더라면 동사하고 말았을 테니까.
추위에 떨며 불침번을 섰던 새벽의 일을 생각하면 그가 잡혀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비틀거리며 사라지던 그의 초라한 뒷모습을 떠올리면 웬일인지 잡히지 말았으면 싶기도 해. 내 마음 나도 모르겠군.
나의 시야가 미치던 범위는 골목 어귀까지. 막상 어느 집으로 갔는지 찾을 수 없어 조사는 벽에 부딪치고 말았어. 할 일을 다 했지만 이럴 때는 속수무책. 경찰에서는 그런 조그만 사건 같은 건 수사하기 힘들다고 한다네. 그대로 끝나버리는 줄 알았어.
그런데 하, 이런 일도 있다니. 뜻밖에 그 남자가 제 발로 찾아와 이실직고를 하는 거야. 환한 낮에 본 그 사람은 의외로 얌전한 생김새에 차라리 소심하고 불쌍해 보이지 뭐야. 내 주제에 마음이 짠해졌다면 코웃음 칠지 모르지만 정말 그랬어.
그러면 그렇지. 그 순간에 남자는 동키호테가 되었음에 분명해. 풍차의 날개 대신 차단기가 그의 눈에 띄었던 게지. 한 가지 다른 점은 그에게는 동키호테적 낭만은 없었다는 거야. 어쩌면 차단기는 그가 부딪친 삶의 울분이나 절망에 다름 아니었던 건 아닐까. 새벽의 기세로 봐서 내 추측이 틀림없어. 나, 주제도 모르고 너무 인간적이지 않아?
꼭 들어가야만 하는데 눈앞에서 철커덕 닫혀버리는 문 앞에 서본 적이 있으신가? 새벽의 차단기가 홧술을 마신 그의 눈에 깨부수고 싶은 삶의 장벽으로 보였을지 누가 알겠어. 하지만 화(火)는 화(禍)를 부른다고 그 불쌍한 사람은 결국 차단기 값을 물어내야 했지. 그 돈 마련하기도 힘든지 며칠 걸린 것 같더라고.
이번에는 그렇게 일이 풀렸지만 뻔히 보면서도 별 수 없이 당하는 일도 많아. 그러고 보면 내 역할의 한계는 어쩔 수가 없더군. 물론 나로 인해 해결되는 일도 많다지만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게 여간 복장 터지는 게 아니더라고.
뭐 성형외과 의사들을 의느님이라고 부른다면서? 조물주가 만든 얼굴보다 더 잘 고쳐줘서 그런다나 어쩐다나. 이참에 내게도 신묘한 기능을 더해 주면 싶어. 맘보 나쁜 누군가가 일을 저지르려는 순간, 벼락같은 경고음으로 놀라 도망치게 한다든지 여차하면 물대포라도 쏴서 꼼짝 못하게 붙들어 놓는다면 내게도 이름 하나 붙여주려나 몰라. C느님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알았어, 알았어. 아무래도 사람을 닮아 공명심이 생기는 모양인데 만들어준 대로 살아야지 뭐. 그런데 좀 불공평하네. 의느님은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진화하고 싶은 내 욕심이 뭐 나를 위한 건 아닌데 말이야.
첫 수필집 《안녕하신지 》에 발표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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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화가 되었어요. 그것도 아주 상상 초월의 신묘함으로.... 인간은 못하는 게 없다는 생각, 다시 해봅니다.
제가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cctv가 그렇게 촘총하지 않았고 화질도 좋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그때가 2017년도 경이었는데
방송을 보다 보니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이제 cctv가 없는 곳이 없을 지경이고 그로 인한 사건해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점은 수상한 사람이 야밤에 차들이 주차되어있는 골목길을 비척비척 걸어갑니다. 위험을 감지한 인공지능카메라는 줌이 작동되면서 마치 누가 키메라를 들고 뒤에서 쫒아가듯 계속 따라가며 그의 행동을 감시 체크합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경찰에 연락해 경찰차가 출동. 현장에서 절도범을 잡습니다.
저 글을 쓸 때, 기왕이면 범죄현장을 포착했을 때 녹화만 하지 않고 cctv가 좀더 진화된 기능으로 바로 검거하고 저지할 수 있었음하는 바람이 컸는데 몇 년 사이에 내 빈약한 상상 이상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좋아서 막 웃었습니다.
선량한 사람은 cctv가 그렇게 많아도 의식을 하지 않고 살지요.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동반경이 엄청 많이 찍힌다고 하더군요. 혹여 으슥한 거리를 가실 때도 꼭 cctv가 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까요.
누구라도 설혹 행적이 다 보이는 시선 속에 살고 있더라도 그것이 사건의 자료로서 필요한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첫댓글 각자의 양심에 맡기고도 큰탈 없이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곳곳에서 cctv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데도 끔찍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으니...그놈의 양심은 어디에다 팔아 먹었을까요?
소양인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명칭조차 갈수록 특별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젠 cctv 영상 자료를 아주 세밀하게 분석해서 숨겨진 장면까지 찾아내 단서를 만들어 범인을 잡는다고 합니다.
제가 저 글을 쓸 때 그런 아쉬움 때문에 상상을 해봤는데 뛰어난 두뇌들이 많아 제 상상 그 이상으로
발전된 기능으로 진화한 것을 보고 공연히 쾌재를 부르며 졸고를 한 번 올려봤습니다. ㅎㅎㅎ
그래도 흉악한 일은 날마다 일어나고 저 제3의 눈 같은 건 두려워하지도 않는 세상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