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렘은 가난하다
‘설렘’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나, 사라져버려 서운한 그것을 어디서 혹시 팔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얼른 달려가겠다. 그만큼 설렘이라는 감성은 삶에 윤기를 주어 촉촉하게 만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윤활유 같아 항상 지니고 싶다. 하지만 끓는 물이 식어버리면 김이 사라지듯 내게서 떠난지 오래다.
늘 켜있는 컴퓨터, 누가 보면 쉴 새 없이 일만 하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매일 나를 지배하고 있는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의 유혹처럼 강렬했다.
직장생활 할 때, 블로그를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였다. 사각의 화면은 저 혼자 명멸하고 있을 뿐인데 누가 부르기라도 한 듯 안절부절, 수시로 사이트를 찾았다. 간혹 고장이라도 나서 그 창이 닫혀버리면 금단증세까지 생긴다.
잡문을 올리고 내가 찍은 사진이 화면에 재생되면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한꺼번에 맛보았다. 일타 쌍피. 별 취미가 없는 사람이 찾아낸 은밀한 즐거움. 조회 수는 상관이 없어서 이웃을 맺지도 않았는데 랜덤으로 방문객이 들어오기도 했다.
언제나 홍보물 아니면 고객관리용 소식만 가득한 메일함처럼 어쩌다 달린 댓글도 ‘제 블로그에도 방문 바랍니다’라든가 상품이나 사업용 홍보를 위해 블로그를 사용하면 얼마를 주겠다는 반갑지 않은 청도 곧잘 들어온다.
메일함도 마찬가지다. 잡초처럼 무성한 스팸메일 가운데 반가운 이름 하나 보게 되면 한 송이 꽃이라도 발견한 듯 기쁘기 그지없다. 자신은 정작 안부 글 한 번 제대로 못 보내면서, 받으면 즐거운 것이다. 염치가 좀 없다고나 할까.
의도치 않게 만든 블로그였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겨 즐거웠다. 정원을 가꾸듯 정성을 기울였다. 인터넷은 문턱이 없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새로운 포스팅 하나 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마음이 불편하다. 마치 가꾸지 않은 집안을 들킨 것 같아 영 개운치 않은 것이다.
시청률이 바닥이라는 드라마처럼 재미없는 블로그지만 그래도 버리고 떠난 빈집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게다가 가끔은 모르는 사람이 글을 남기기도 하고 오래 전 알던 사람도 들어오니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핑계였다.
어쩌다 낯선 이의 쪽지도 받고 가끔은 대화요청도 들어온다. 쪽지로 이어져 잠깐의 인연을 가진 적도 있다. 나라는 사람이 좀 별나서 그럴까. 상대가 너무 적극적인 바람에 더럭 겁이 나 도망치기도 했다. 시작이나 말 것이지 공연히 애먼 사람 상처를 주고 만 일이었다.
그러다가 밑도 끝도 없는 쪽지하나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리턴’이라는 닉네임이었다. 다시 돌아오다니 누가 누구에게로? 그보다도 내용은 더 아리송했다.
그대
마음 안에
내가 있어 외로웠다면
사랑으로 기억 했던가요
막을 수 없는 내 인생의 노을은
자꾸만 다가오는데
초라해져 가고 있는 내 모습이
그대가 그리워하던 얼굴이었을까 (중략)
상당히 긴 시였다. 앞뒤 설명도 없는 시 한 편. 어쩌면 젊음과 한참 멀어져 회한의 정으로 이런 글을 남긴 걸까 싶어 잠깐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만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헌데 아니었다.
시가 전하는 은유가 분명 있는 것만 같은 것은 무슨 헛된 기대일까.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 다시 읽어보았다. 자꾸 읽으니 처음엔 아무 생각 없던 쪽지가 그 의미를 점점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의 내용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 쪽지를 열어 다시 읽어보았다. 무슨 조화속일까. 이번에는 그 글이 꼭 내게 보내는 것만 같다. 특히 ‘막을 수 없는 내 인생의 노을은 자꾸만 다가오는데…로 시작된 두 번째 연이 무언가 냄새를 피워 올리는 것이다. 혹시 젊은 시절, 나와 연관이 있던 사람이 아닐까.
그러자 ‘리턴’이라는 닉네임도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오래 전 나를 스쳐 갔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돌아왔다는 암시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급기야는 멜로드라마 한 편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라해져 가고 있는 내 모습이 그대가 그리워하던 얼굴이었을까…’
이 대목에서는 세월의 뒤안길, 거울 앞에 선 초로의 얼굴까지 떠올랐다. 대상은 확실하지 않았다. 이제는 단지 추억으로만 남았지만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아쉬움에 이런 글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 상상은 터무니없다고 꾹꾹 눌러봐도 살금살금 피어나는 것이다.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아련하고 달콤 쌉쌀한 감상이 가슴을 물들이자 대상도 없이 사랑의 감정까지 느꼈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작위로 보냈을지도 모를 쪽지 하나에 지나치게 의미를 둔 것 같아 혼자 민망해졌던 것이다. 삶이 무미건조하다 보면 이렇게 망상도 생기는가 싶어 쓴 웃음이 나왔다. 일상의 무료함을 단번에 벗어던지게 하는 신선한 사건을 은연중에 기다리기라도 했었던가.
인터넷이 보편화 되고 카페나 블로그를 통해 사이버상의 교류가 잦아졌다. 그러나 오프라인에서 시작된 온라인 모임이 아닌 이상 모두 익명의 만남일 뿐이다. 점멸하는 조명등처럼 때로는 아는 척을 하며 반짝이다가 슬며시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닉네임들.
그런데 비록 익명이지만 꼭 내가 알던 어떤 사람이 아닐까 싶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올려놓은 음악, 혹은 사연이 낯익어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킬 때 특히 그랬다. 어쩌면 전혀 소식을 모르던 그때 그 사람을, 길이 아닌 모니터에서 우연히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깨를 스치고도 모르는 채 지나가는 길 없는 그 길에서 오늘은 또 어떤 이의 그림자를 문득 보게 될까. 세상으로 향해 열린 나의 창, 모니터를 켤 때마다 부질없이 그런 기대를 가져본다. 그것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심심한 나에게 내가 선사한 값없는 선물이다.
이제는 블로그 활동도 접은 지 오래다. 하여 정체모를 낭만도 사라졌다. 스마트폰의 건조한 메시지, 세상에 떠도는 식상한 ‘좋은 글’들을 보며 오래 전 그 뜬금없는 설렘이 차라리 그립다. 하긴 이제는 설렘조차 생기지 않는 가난한 세월 아닌가. 한 줄기 바람, 문득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로도 그리움이 솟구치던 감성의 시간을 찾아 세월의 태엽을 한 번쯤 다시 감아볼 일이다. 아직 살아있음으로.
첫댓글 ㅎㅎㅎ많이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