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방
정 성 화
초등학교 시절, 방 두 칸에서 여덟 식구가 살았다. 두 칸이라 해도 중간의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면 방은 하나가 되었다. 방 모퉁이에 둥근 양은 밥상을 펴놓고 숙제를 했다. 그 때마다 어린 동생들이 달려와 밥상 다리를 잡아당기거나 밥상을 뒤집었다. 앉은뱅이책상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가구보다 공간에 대한 갈망이었다.
가정을 이루고도 한참 동안 나만의 방을 갖지 못했다. 그래도 늘 무언가를 썼다. 말로 하는 것보다 그게 편했다. 식구들이 잠든 시간에 식탁에 앉아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친정엄마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엄마가 잠든 후 환자 휴게실에서 글을 쓴 적도 있다.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는 장소 같은 게 문제되지 않았다.
지금 나의 글방은 해운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37층에 있다. 책상을 벽에 붙이지 않고 방 가운데에 놓았다. 어느 벽에도 기대지 않은 책상은 자유로워 보인다.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배, 출어를 끝내고 돌아와서 쉬는 배, 다음 고기잡이를 위해 어구를 챙기는 배 등, 나의 책상에는 이런 배의 이미지가 있다.
하얀 캔버스 천에다 나의 수필 한 단락을 적은 액자가 한 쪽 벽에 걸려있다. 글에 대한 의욕이 가라앉을 때 읽어보는 구절이다.
“인생이란 자동점멸등과도 같은 것. 기다렸다는 듯 반짝 불이 들어왔다가도 몇 발자국 옮기는 사이에 이내 불빛이 사라지고 만다. 우리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시간도 그 자동점멸등이 꺼지기 전까지다.” ( ‘다시 수필이다’ 중 일부)
나는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이 방의 불을 켠다. 그 때마다 새벽 조업을 나가는 어선을 보게 된다. 근처 선착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어선들 중의 하나다. 파도가 있는 날은 배에 매단 외등이 곡선을 그리면서 가고, 바다가 잔잔한 날에는 외등이 거의 직선을 그으며 간다. 나는 그 배가 외항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본다. 산다는 건 참으로 엄숙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가 아래에는 화분을 나란히 놓아두었다. 레인보우, 오렌지 쟈스민, 산세베리아, 관음죽. 식물은 하루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는다. 주인이 눈길을 주든 안주든 저 혼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어제는 방에 들어서는데 그윽한 향기가 확 풍겨왔다. 키 작은 오렌지 쟈스민이 아기 주먹만 한 꽃다발을 세 개나 매달고 있었다. 식물의 이런 성실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책상 위 가운데 자리에는 ‘원고 제출 계획표’가 놓여있다. 수필 잡지 이름과 원고마감일을 날짜 순서대로 적어둔 것이다. 글을 쓰고 싶어서 쓸 때도 있지만 마감일에 쫓기며 쓸 때가 많다. 나의 글 상당수가 이런 강박증의 결과물이다. 그래서일까. 글을 잘 쓰는 수필가도 부럽지만 아직 지면에 발표하지 않은 작품을 여러 편 갖고 있는 수필가가 더 부럽다.
내 삶의 두 가지 축은 의미와 재미다.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해 온 글쓰기를 즐겁게 할 수는 없을까. 그러려면 글에 대한 동력이 떨어지지 않게 내 감정을 잘 다독여야 할 것 같다. 마음의 바퀴도 자동차처럼 네 개쯤 될 것 같다. 하나의 축에 연결되어있지만 바퀴마다 관심사가 다를 수 있으니 얼마든지 이음새가 틀어질 수 있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동차로 치면 ‘휠 얼라이먼트 작업’이다. 나의 글방이 그런 역할까지 하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는 공간이면서 하루를 돌아보는 공간이다.
글에 대한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스칠 때가 있다. 얼른 메모지를 찾아 몇 글자라도 적어둔다. 그리고는 책상 맨 위 서랍에 모아둔다. 그 메모지들이 나를 책상에 불러 앉히기도 한다. 글을 한 편 완성하고 나면 내 몸에 생기가 도는 걸 느낀다. 글에 대한 애착은 그대로다. 그런데 애달프게도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은 별개다. 나에게 수필은 여전히 ‘사용설명서가 없는 전자제품’이다. 이것저것 눌러보며 여전히 사용법을 알아가는 중이다.
글을 잘 쓰려면 우선 섬세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느낌을 나만의 표현으로 옮기되, 공감이 가도록 써야 한다. 그런데 정작 글을 쓸 때는 이런 다짐을 한 쪽으로 밀쳐둔 채, 되는 대로 쓰고 있으니 그게 문제다.
그래도 희망적인 생각 하나를 떠올려본다. ‘오늘 몇 줄이라도 쓴다면 내일도 쓸 수 있겠지.’ 그래서 지금도 꾸역꾸역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