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 뉴스도 요약본으로, 강의 영상도 배속으로
‘분초사회’ 트렌드 가속…2030 시간부족 인식률 68~72%나
대학생 박모(22)씨는 최근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지 못한 경험이 있다. “시간이 아까워 30분 요약 영상을 먼저 봤는데, 막상 결말을 알고 나니까 정작 영화가 주는 감정이나 여운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효율적으로 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작품의 재미를 놓친 기분”이 든 것은 물론, 본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는 상태로 어중간하게 영화를 보니 오히려 시간을 허비하는 느낌까지 들었던 것이다.
영화와 같은 여가 활동 뿐 아니라 대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도 시간의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모습도 등장하고 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이모(22)씨는 “여러 강의를 동시에 배속으로 들으며 공부했지만, 정작 중요한 내용이 머릿속에 남지 않아 다시 공부해야 했다”며 “시간을 아끼려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소비 트렌드 전문가인 김난도 교수가 지난 2024년 꼽은 트렌드는 ‘분초사회’였다. 시간을 분 단위, 초 단위로 나눠 아껴 쓰려 드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후 Z세대 소비 트렌드로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는 시간을 돈 만큼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하며, 제한된 시간 안에서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박씨와 이씨의 사례는 분초사회의 시간 다툼이 사회 각 분야에서 점점 일상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핵심만 소비하는 방식은 일상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유튜브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를 몇 분 만에 요약한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심지어 뉴스 기사도 이제는 구글 등 플랫폼이 기사 링크와 함께 요약본을 제공, 뉴스 사이트로의 트래픽 감소로 뉴스 산업이 울상이라는 미국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시간을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하는 ‘시성비’ 소비 트렌드는 이제 음식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식당 종사자가 서빙을 하러 나오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테이블에 배치된 QR코드를 통해 주문 시간을 줄이는 시스템이 보편화됐으니 말이다.
사실 ‘분초사회’와 ‘시성비’라는 단어는 갑자기 부상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빨리빨리’라는 말로 익숙한 한국인의 정신이 QR코드와 AI의 요약 기능을 만나 분초사회와 시성비라는 퓨전형 ‘빨리빨리’의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난도 교수는 시성비만을 따지며 극도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다 보면 많은 것을 놓쳐가는 사회도 올 것이라 지적한 바 있다 .현대 사회가 점점 더 빠른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런 흐름이 개인의 삶을 압축시키고 피로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분석과 함께 말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직무와 관련된 만성적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규정하며 과도한 업무와 지속적인 긴장 상태가 개인의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분초 사회’ 현상은 단순히 문화비평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사회 건강을 해치는 보건 현상이 될 수 있음을 알리는 통계 수치도 있다. 국가통계연구원과 통계청, 한국노동연구원의 데이터를 종합해보면 20~30대의 주관적 번아웃 경험률은 32~33%에 달하는데 이는 50대의 18%보다 훨씬 높다.
2030 응답자의 68~72%나 “시간이 부족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50대는 상대적으로 훨씬 낮은 45%가 주관적 시간 부족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국가통계연구원과 통계청, 한국노동연구원의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AI 도구를 활용해 재구성한 세대별 피로와 시간 압박감.
‘시성비’를 따지는 효율 중심의 삶은 개인에게 지속적인 긴장 상태를 요구하며 이는 번아웃과 같은 정신적 소진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단순히 시간을 아끼고 효율을 높이는 것이 삶의 질 향상이 아니라 하락으로 직결될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사회가 단순히 빠름과 효율만을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고 휴식을 선택하는 흐름 역시 함께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보 과부하 시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수행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적절히 멈추고 회복하는 시간 또한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분초사회의 시간 다툼이 치열해질수록 ‘느림’과 ‘쉼’의 가치 인식 확산도 예고되고 있다.
이새봄 대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