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밥
“성철 스님 사리를 볼 수 있다네.” 어머니가 내게 이렇게 말한 것은 성철 스님 사리를 보러 가자는 뜻이었다. 내게 거절할 권한은 없었기에 토요일 새벽 여섯 시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나섰다. 동지를 향해 달려가는 12월 초, 날은 어둡고 쌀쌀했다.
집에서 해인사까지 700리 길, 대략 280킬로미터이니 내 작은 승용 차로 네 시간이 걸릴 터였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김천 인터체인지까지 가서 59번 국도를 타고 60킬로미터를 남하하다가 가야면사무소를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해인사 입구로 들어선다. 그러니까 고속도로로 220킬로미터를 가고 국도로 60킬로미터를 가면 된다.
그즈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저곳 절들을 순례했다. 자동차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어머니 혼자 버스를 타고 절에 갔는데 자동차가 생겼으니 이제 절에 가는 길이 순조로웠고 어머니는 더 자주 절에 갔다. 그럴수록 나의 시간표는 복잡해졌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어머니를 모시고 이 절 저 절을 다녀야 했다. 새벽예불을 하려면 밤길도 마 다하지 않고 다녀야 했는데 고속도로나 국도도 운전에 늘 신경이 쓰이지만, 더욱 위험한 곳은 지방도였다. 차도와 인도도 분명하지 않은 길을 다니는 것은 늘 위험이 따랐다. 밤길은 더 위험했다. 하지만 내가 그 일을 거역할 수 없었던 까닭은 자동차가 어머니 명의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해인사를 향해 내려가면서 나는 왜 해인사의 승려들은 성철 스님의 말씀을 거역했는지가 궁금했다. 분명 내가 듣기로 성철 스님은 생전에 “사리를 거두지 말라”고 말씀했다. 《유마경》에 이르되 “법에는 형상이 없는데도 어떤 형상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형상을 구함이지 법을 구함이 아니다”라고 했다. 형상은 아예 없고 법은 무상하다. 성 철 스님의 당부도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다비식이 끝난 뒤 깨알만 한 사리까지 모두 찾아 무려 200과나 되는 사리를 수습했다고 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다비식을 진행할 때 ‘혹시나 사리가 나오지 않으면’이라거나 ‘혹시나 이전에 입적한 스님들보다 사리가 적게 나오면’ 등등을 걱정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세간에서는 성철 스님의 수행이 부족했다느니, 조계종 이라는 데가 문중이라는 정치세력 간의 보이지 않는 다툼의 본산인데, 다른 문중에서 성철 스님 문중을 공격하거나 비하하는 데 아주 적격인 수단이 될 게 뻔했다. 모든 인간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자의 든 타의든 정치세력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산중도 마찬가지 이다. 그런데도 해인사 성철 문중 승려들에게는 어떤 근거 없는 자신 감이 있었을까, 사리를 수습하는 모험을 단행했다.
더욱이 참된 수행을 하면 사리가 나온다고 하나 그것은 하나의 믿음일 뿐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사리로써 승려의 법력이나 수행을 가늠하는 것을 금지한다.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충청도 어느 절에서 평생을 불만 땐 승려는 입적하면서 백 과가 넘는 사리를 남겼다고 하니 사리라는 것이 고행과도 같은 수행의 결과로 나오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하긴 이판사판이라고 불 때는 것도 고통스러운 수행이라면 사리가 나올 법도 할 것이다.
다행히 200과가 수습되었기에 망정이지 스무 과 정도가 수습됐다면 성철 스님이 평생을 쌓아온 수행과 말씀이 살금살금 부정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며 대상의 참모습을 벗어 나지 않는 인식을 말씀한 스님이건만, 세상은 성철 스님의 산과 물은 보지 않고 다른 것을 볼 게 뻔했다.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이라 했건만 사람들은 그 임시성을 영원성으로 착각하고 있다.
성철 스님은 열반송에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친다”고 했다. 평생을 사부대중에게 “나를 보지도 말고 내 말을 듣지도 말고” 자기 자신을 바로 보라고 했건만 세상 사람들이 성철 스님을 보 고 법문에 기대면서 스스로 가진 능력과 지혜를 소홀히 했으니 그 죄가 오로지 스님의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열반송도 헤아리지 못하고 이제는 사리를 수습하면서 그 제자들은 스님에게 새로운 죄업 하나를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어머니를 모시고 해인사 가는 길도 내게는 고역이었다. 하긴 가기 싫은 길을 가다 보니 이런 생각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자동차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해인사길로 접어들었다. 구름 없는 초겨울의 햇살이 매우 청명했다. 그런데 합천이 가까워질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이제부터는 해인사 주차장까지 이르는 길이 고행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스님의 사리를 보겠다며 수많은 차들이 해인사로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야천삼거리부터 자동차들이 서행하기 시작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사리를 친견하고 해인사를 빠져나가야 나중 온 자동차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고행의 길이 아니라 고행의 교통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천둥이 쳤다.
사리를 보러 달려온 700리 길을 3천 배와 견줄 수는 없겠으나 사리를 보는 것이 무망한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평소 사숙했던 성철 스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나라도 실천해야 한다는 오만이 피어올랐다. 그 700리 길을 달려온 것으로 나는 다른 이들이 사리를 보면서도 얻지 못할 통찰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올라가는 길도 칠백 리이 니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사리를 보는 게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래야 집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일이었다. 기사가 졸려 죽겠는데 사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자동차에 남았고 어머니는 사리를 보러 갔다. 한 시간이 넘게 지나서 어머니가 돌아왔다. 어머니는 사리 본 것을 마치 무용담처럼 얘기하기 시작했다. “사리가 참 영롱한데, 내가 보는 순간 창틈으로 한 줄기 빛이 구름을 헤집고 들어와 영롱한 사리를 더욱 빛나게 했다”는 말이었다. 하필 왜 햇빛은 어머니가 사리를 보는 순간에 들어온 것일까? 어머니가 사리를 보아 만족을 얻었으니 다행이었다. 하긴 어느 누구인들 만족을 얻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사리를 수행의 결실로 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성철 스님에게서 사리가 많이 나온 것이 스님이 부처라고 증명하는 수단일 것이다. 그 사 리들을 보는 이들도 자기가 부처가 되었다고, 아니면 부처에 한발 더 다가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깨달음이 부족했는지 그래도 해인사까지 와서 스님의 사리를 보지 못한 것이 티끌 사리 하나만큼의 아쉬움으로는 남았다. 시계는 어느새 오후 세 시를 가리켰고, 초겨울 짧은 해는 서산으로 서서히 눕기 시작했다. 스님이 가실 때 절정을 이루었던 가야산 단풍들은 모두 지고, 새들도 떠난 들 판, 겨울을 준비하느라 벌거벗은 나무들, 그렇다, 떠날 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게 좋은 일이다. 오늘따라 푸르름이 연갈색으로 바뀐 산하가 더욱 멋스러웠다. 그때 어느 집 담장 안 감나무 꼭대기에 남은 까치밥이 보였다. 까치밥은 서산 넘어 눕기 시작하는 겨울 햇살을 옆으로 받으며 붉은색을 토해 내고 있었다. 성철 스님의 사리가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첫댓글 계속 웃으며 읽었어요. 초연한 이성과, 진정한 성찰, 현실감각이 고속도로처럼 선명합니다.
참 교묘하게(?) 공감을 이끌어내십니다.
감사합니다. 읽는 즐거움이 뿌듯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