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도 저물어 가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나는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억지로 일어나 먼저 거울을 봤다. 새빨갛게 충혈된 두 눈이 지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컬트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무서운 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탈진, 무슨 병도 아닌 것이 그렇게 무서운지 처음 알았다. 수액주사를 한 대 맞고 출근했다. 그러나 종일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퇴근을 서둘렀다.
구파발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일산으로 달리는 길은 내가 좋아하던 코스였다. 지금은 온통 아파트가 들어서 사라졌지만 삼송리에 들어서면서 차창 밖 풍경은 목가적 아름다움으로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길가의 묵정밭, 가끔 보이는 나무숲의 우둠지들. 서삼능 입구를 지나면서 멀리 울멍줄멍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보면 어린 시절처럼 막연한 그리움에 가슴이 싸해지기도 했다.
사계절이 다 좋았지만 가을빛 내려앉은 풍경이 주는 소슬한 느낌은 늘 가슴 언저리를 물들이곤 했다. 억새풀이 바람에 하얗게 빛나는 언덕길을 스쳐 지나며 버스는 키 작은 묘목과 큰 나무들이 어우러진 농업박물관을 오른쪽으로 끼고 8차선 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색색의 단풍들은 언제 보아도 설렘이었다. 해질녘에 그 길을 지날 때가 있다. 붉게 물들었다가 차츰 연보라 빛으로 잦아들어 마침내 여명으로 남은 환한 하늘에는 나뭇가지들이 검고 선명한 수를 놓았다. 버스에 앉아 차창 밖으로 한참씩 하늘을 올려다보면 까닭 없이 행복했다. 내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문득 돌아볼 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런 순간 또한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가을이 깊어진 빈 들녘은 쓸쓸했고 가슴속으로 휑하니 찬바람까지 불어갔다. 때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녁하늘은 여전히 고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오렌지색 하늘이 곱기는커녕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설핏하고 낯선 하늘은 이승이 아닌 저승이었다. 아직 본 적 없는 저세상을 이미 체험하고 있는 듯, 그렇게 기묘한 느낌은 난생 처음이었다.
회복하기 힘든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은 바로 그해 초여름의 일. 후유증이 크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되도록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마음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다행히 여름내 바쁘게 일하면서 평정을 되찾은 줄만 알았다. 잘 이겨낸다고 믿었고 그런 내가 스스로 기특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바쁜 일에서 놓여났다. 이제 마음 놓고 가을을 좀 즐겨 보리라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탈진이라니. 마치 복병이라도 만난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꼭 치러야 할 일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리 깊이 묻어버렸어도 상처란 어떤 방법으로라도 터져야 아물고 새살이 나는 것이 아닐까.
그 가을, 일산의 나무들은 유난히 단풍이 고왔다. 붉은 단풍잎들이 가로에 가득 깔려 있다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잠깐씩 꽃잎처럼 날리기도 하고 샛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그러나 소리 없는 화면을 보듯 아무 감동도 의미도 없었다. 입이 써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눈길 닿는 세상 모두가 그저 씁쓸하게만 보였다.
무슨 일에건 회복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일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던 그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올 즈음, 이미 절기는 겨울로 들어선 다음이었다. 초겨울의 스산함이 배여 있음에도 아직 남아있는 가을의 여운을 그제야 아쉽게 더듬어 볼 수 있었다.
다시는 그렇게 당혹스럽고 낯선 느낌은 맛보고 싶지 않지만 암만 해도 자신이 없다. 몸과 마음이 건재해야만 세상도 아름답다는 것을 체험하고 나니 남은 세월이 두려워진다. 사는 날까지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건강한 감성이다. 삶의 결핍을 채워주고 지탱해주며 희미하게나마 다시 꿈을 꾸게 하는 데 그것만한 것이 또 있을까.
다시 시월이 가고 있다. 늘 좋았던 시월도 그 얼굴이 많이 변했다. 변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이제 달라진다는 것에 많이 길들어간다.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빛을 잃어가는 나무들이 어쩐지 정답다. 내일은 또 가수 이용의 '시월의 마지막 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겠지. 어쩌라고 … .
첫댓글 '사는 날까지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건강한 감성'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나이 들 수록 몸 건강이 절실하지만 더 절실한 게 감성이라는 생각입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더군요.
마음이 몸을 배반하는지 그 반대인지 모를 정도.
여린 듯 강한 선생님은 아마 지킬 수 있지 싶어요.
어쨌든 몸과 마음 늘 건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