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늬 바지
장롱을 정리한다. 서랍 맨 아래 포장지에 곱게 싸인 옷이 보인다. 반갑다. 첫눈에 마음에 들어 덥석 사놓고 제대로 입어보지 못한 바지다. 세월이 흘렀어도 꽃무늬는 여전히 생생하다. 바지를 들고 이리저리 마음을 재던 조금은 젊었던 날의 내가 떠오른다.
이십여 년 전, 백화점 의류매장을 돌다가 마네킹이 입고 있는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중해 바다색에 초록빛 나뭇잎과 빨간 장미꽃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엔 자잘한 흰 장미, 분홍 장미들이 무리를 지어 활짝 피었다. 언뜻 해당화가 만개했던 바닷가가 떠오르며 마음이 환해졌다.
하지만 무늬가 너무 화려해서 망설여졌다. 눈치 빠른 점원이 똑같은 바지를 들고 나오더니 사지 않아도 되니까 한번 입어보라고 했다. 못 이기는 척 입었다. 길이와 품이 딱 맞았다. 무엇보다 사방으로 늘어나서 편했다. 가격이 만만찮았지만 큰마음 먹고 들고 왔다.
장미꽃이 활짝 핀 바지에 밤색 티셔츠를 입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바지가 몸에 착 감기는 게 기분이 좋아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서 만난 친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웬 꽃 바지!” 하며 의아해했다. 늘 무채색 옷을 입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느냐고 물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갑자기 남의 바지를 빌려 입은 느낌이 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 다리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벗어 던졌다. 한 번 입었으니 교환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왠지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는 않았다. 포장지에 곱게 싸서 장롱 서랍 맨 아래에 넣었다.
이 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지도 못할 거면서 왜 샀을까. 값이 싸지도 않고, 남의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직장에 다니며 늘 시간에 쫒기는 나는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를 주로 입었다. 시간이 가장 적게 드는 차림이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다 보니 차려입고 외출할 일도 줄어들었다. 내 옷장에는 화려한 색이 스며들 틈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고운 색을 입히고 싶었을까. 그냥 화사한 옷 하나쯤 가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쉬움을 털 듯 먼지를 탈탈 털고 입어본다. 꽉 조여서 불편하다. 옷은 그대로인데 내 몸이 변했다. 나잇살이 붙은 데다 키도 줄어들었나 보다. 바짓단이 발등을 덮는다. 몸에 맞추느라 늘어난 바지의 꽃들은 한층 만발하다.
이제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입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선집에 들고 갔다. 바느질하던 주인이 옷을 뒤집어서 이리저리 살피더니 늘여야 할 곳이 많아서 수선비가 꽤 든다고 한다. 버리고 새 옷을 사 입을까 하다 그냥 고쳐 달라고 맡긴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길을 가다 보면 이보다 더 현란한 무늬의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요즘은 나이가 들수록 밝게 입어야 한다고도 한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젊게 살아야 한단다. 아이러니다. 어쩌면 꽃무늬 바지는 펼칠 수 없었던 내 젊은 날의 꿈들이 날염된 옷인지도 모른다.
수선집에서 찾아온 바지를 펼쳐본다. 날씬하던 바지가 펑퍼짐하다. 허리에 고무 밴드를 잇대어 늘인 바지를 입어보니 편안하다. 새 옷을 사 입은 것처럼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비춰본다. 이 옷을 살 때만 해도 두루뭉술한 몸을 흔들며 다니는 사람을 보면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거울 속에 서 있는 나를 보니 쿡 웃음이 나온다.
오랜만에 동창 모임이 있는 날이다. 장미꽃이 활짝 핀 바지에 진한 호박색 모직 재킷을 입고 나간다. 하늘은 쾌청하고 거리엔 노란 은행잎이 폴폴 날린다. 찻집에서 한바탕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한 친구가 물었다. 못 보던 바지인데 언제 그런 예쁜 바지를 사 입었냐고 묻는다. 이십 년 전에 샀는데 부끄러워 못 입었다고 했더니 눈을 흘기며 큰 소리로 웃는다. 이 바지가 어때서! 아무도 관심 없는데 혼자 고민했구먼,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저릿하다. 나쁜 짓 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벗어 던질 것까진 없었다. 괜히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 쑥스러워하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 단정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면 몸만 늙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퇴색하는 것 같다. 요즘의 나는 무뎌진 건지 뻔뻔해진 건지 화려한 꽃무늬 바지를 입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가로수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닌다. 예기치 않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상상까지 하면서 말이다.
첫댓글 좋은 일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일어난답니다.
여자의 마음, 똑 같은 심정.... ㅎㅎㅎ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이야기....
임진옥 선생님, 맘껏 뭐든 해보십시다.
남이 무슨 상관이랍니까.
이혜연선생님 가스등 켜 카페 밝혀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