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방생하노라
계단을 올라오다 보니 뭔가 못 보던 것이 흘낏 눈에 들어왔다. 목을 빼 밑을 보았다. 죽은 나무들을 타고 나팔꽃 덩굴이 올라오고 있었다. 흰 꽃들이 한 몸이 된 듯 나무를 거의 뒤덮고 있었다. 죽은 생명을 다시 피우는 방법엔 저런 것도 있구나. 죽은 것에 기생해 자기 생명을 피우고 마침내 그 영역을 확장해 가는 꽃들의 의지라니. 그들로 해서 계단 밑이 환하게 새로워지고 있었다. 죽은 것과 산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새로움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아침을 마치고 일과대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눈에 띈 기사는 사찰의 방생 법회였다. 오늘은 계속 생명에 관해 맞닥뜨리게 되네. 어떤 하루가 되려고? 설핏 기대되면서도 방생이란 낱말 뒤에서 얼굴을 내미는 염려가 개운치는 않았다.
방생의 애초 목적은 죽을 위기에 처한 작은 생명(生)을 놓아주는(放) 일이었다. 자비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인간의 뜻(?)이 조금씩 보태져 요즘은 그 행위로 해서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는 행위라 미화된다. 일종의 인과응보랄지. 심지어 시장의 물고기를 사서 바다로 나가 풀어주기도 한다. 게다 가는 길에 잘 못 돌보아 그냥 죽이기도 한다. 내세 복락을 위해 한목숨을 일회용으로 사용하는 셈인가. 불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휘가 회향(回向)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자신이 닦은 공덕, 즉 복을 다른 중생에게 돌리는 일. 이도 자비의 마음가짐이며 불교 정신의 진수라 생각했다. 한데 이젠 복을 돌리기는커녕 타 목숨을 써서 제 복을 짓겠다고? 이타와 이기가 충돌을 일으켜 관심을 접은 적 있다.
기독교에서 불교의 방생과 비슷하게 쓰이는 개념을 찾으라면 사면이 되지 않을까. 인자가 많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어 속전이나 희생물로 죄를 사(赦)하여 면(免)해 주시고, 그 생명을 이어가게 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행위를 인간이 대행하며 심지어 사면권을 판매해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사면, 하니 언젠가 읽은 기사가 하나 더 생각난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의 기사다. 미국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을 하루 앞둔 날,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특별 사면받은 칠면조 '정직'(Honest)과 '에이브'(The Abe)는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까? 정답은 '아니다'다. 농장을 떠나 통구이로 인간의 식탁에 오르는 여타 칠면조보다 몇 달을 더 살 뿐이다. 이유는 급속도로 살을 찌우도록 사육된 탓에 뼈와 장기가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손상돼 오래 살지 못한다고.
이건 생명을 긍휼히 여기는 진정한 사면이 아니다. 인간의 한 가지 놀이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단박 떠올랐다. 기사는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행사 주관자가 칠면조 식육 판매 촉진에 앞장서는 이익단체 미국 칠면조 연맹이라 했다. 단체의 건물도 백악관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고. 그들은 비밀경호국 요원 행세를 하는 가짜 경호 인력을 동원해 농장에서 공항까지 백악관 사면 칠면조를 호위하는 그럴싸한 쇼를 펼치는 데 아낌없이 돈을 쓴단다. 이벤트를 통해 ‘미국민이 중시하는 명절엔 칠면조’란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란다. 일종의 광고 극대화랄까. 농담 같은 사면이다.
사면받은 칠면조는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리스버그에 위치한 모븐 파크의 칠면조 언덕으로 보내진다고. 이곳은 웨스트모어 데이비스 전 버지니아 주지사 자택 안에 있는 역사적인 칠면조 농장이며, 여기서 사면의 은총을 받은 칠면조는 불과 몇 달을 더 살 뿐이란다. 동물 애호단체는 비인도적으로 사육된 칠면조를 사면하는 행사야말로 미국에서 가장 멍청한 전통이라고 비판하고, 미국 칠면조 연맹은 추수한 곡식과 한 해 수확물에 감사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이라는 원래 의미에 걸맞은 행사라고 맞선다.
불교에서 행하는 방생이 그나마 진지해서 생명에 대한 진담이라 한다면 칠면조 사면은 그야말로 생활 속의 농담에 불과한 게 아닐지. 방생이 됐든 사면이 됐든 생명을 인간의 손으로 좌지우지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경하다. 타 생명을 방생하기에 앞서 자신의 오염된 영혼부터 자유롭도록 자연을 향해 방생해야 하지 않을지. 이기로 돌멩이처럼 단단해져 가는 자아를 부숴 방생해야 하지 않을지. 순간 일어난 돈오의 찰나다.
은총을 느끼는 사람에겐 구체적인 환희의 아침이겠으나 그 느낌을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평범한 아침일 것,
나팔꽃의 영광은 아직 이르지 않았을 터. 죽은 것을 환히 밝혀 묵묵히 지구 한 귀퉁이를 지켜 주는 나팔꽃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희열, 돈오점수(頓悟漸修)의 희락 상태다. 그 꽃은 하필 잎사귀조차 심장 모양을 닮았다. 하여 생명이 되살아나는 아침, 생명이 터져 나오는 아침에 새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뇌어 본다. 자연으로, 외계로 고착된 나를 방생하노라. 나를 놓아 보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