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호박의 꿈
등단작품이 실린 잡지가 독자들 손에 전달될 무렵. 블로그 방문자 수가 연 사흘간 날마다 천 명이 넘었다. 평소 많아야 오, 륙 십 명이던 방문자 수, 잘못 봤나 싶어 다시 세어 봤다. 단, 십, 백, 천…. 분명 천 단위였다. 웬일인가 싶었으나 그 숫자에 환호할 일이 아닌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넷 서핑하다 랜덤 타고 거쳐 가는 블로거들이 많았을 뿐 온전한 관심은 아니었다.
역시 그런 현상은 아주 잠깐 사이에 사그라졌다. 그 후로는 한동안 모르는 이들에게서 가끔 문자메시지가 왔다.
'님은 순호박? 아니면 청순?'
어느 날, 날아온 문자 메시지의 첫 마디, 그 다음 축하의 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등단소감에 곁들인 사진을 보고 하는 말이리라. 얼른 책을 펴, 실린 사진을 다시 봤다. 그러고 보니 두리뭉실한 모습이 갈데없는 순호박이다. 모르는 전화번호였지만 그 돌직구처럼 던진 문자가 전하는 느낌은 우선 재미있었다. 순호박과 청순을 나란히 두고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걸까? 순호박에 기분이 나빠질 것인가 '청순'이라는 낱말에 좋아해야 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했다. 둘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떠오르는 기억 하나. 시간은 아주 멀리 뒷걸음 쳐 물러나고 있었다.
이십 대 초반의 어느 날 저녁, 남영동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다가왔다. 시간 좀 내달라고 했든가, 만나자고 했든가 어쨌든 몇 번 거절하자 그는 자리를 떠나며 내뱉었다.
“쳇, 호박 같은 것이 잘난 체 하기는….”
조금 전 추근거리던 모습은 간데없고 적의에 차서 눈까지 흘기고 있었다. 거절은 내가 했는데 마치 내가 당한 것 같은 알 수 없는 당혹감이라니.
‘호박 같은 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속으로 열없이 구시렁거려봤자 이미 의문의 일패를 당한 후였다. 그 시절만 해도 누군가의 외모를 비하할 때 ‘호박 같다’는 말은 결정적 한방인 셈. 막상 그런 말을 듣게 되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지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났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 후, 생애 두 번째로 나는 또 호박이 된 셈이었다. 이번에는 순호박이다. 금도 순금이 더 윗 질이 아닌가. 문자를 보낸 그 사람은 좀 지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 주고 약 주고 있다. 속없이 '청순'이라는 단어로 약을 삼았다.
그 황당한 물음에 꼭 답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혼자 궁리를 해봤다.
아니라고 항변을 하려니 좀 켕기는 구석이 있고, 맞다 그러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그 물음이 그다지 마음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이미 약삭바르게 '청순'을 택해버렸으니까. 순호박은 외양을, 청순은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보니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물 타기에 능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책이 해외에까지 나가는 것으로 알아 스냅사진을 몇 번씩 다시 찍었다. 하지만 본판불변의 법칙은 예외가 없었다. 얼굴의 약점부터, 보이지 않는 세월까지 고스란히 담아내는 고지식함이라니….
고백하자면, 사진을 볼 때마다 누군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버리지 못했다. 때마다 ‘너 자신을 알라’며 철학적 명제까지 던지는 것이 사진이 아닌가. 그래도 뽀샵은 사양하고 싶었다. 일종의 기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순호박이냐는 소리에 속으로 은근히 아쉽기는 했다.
‘뽀샵을 좀 할 걸 그랬나?’
‘사진이 잘 나오는 얼굴 각도가 따로 있다는데 신경 좀 쓸 걸....
공연히 찜찜해 하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장금이의 대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순호박이 순호박이라 순호박이라 했는데 순호박이 아니라시면….’
젊어서 들었던 그 소리에 비해 유쾌하기까지 느껴지는 것은 나이와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사진에 고스란히 보이는 세월이 반갑지는 않지만 그 세월 덕분에 웬만한 일은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찌되었던 분명한 축하메시지였다. 상투적이 아니어서 오히려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순호박이라, 불러보니 은근히 편하다. 이왕이면 방석만한 늙은 호박이 되고 싶다. 언젠가 호박 밭에 쌓여있는 넓적하고 커다란 늙은 호박을 보면서 받았던 감동이 되살아났다. 그 무게감이며 질감의 당당함이라니. 마치 깊은 연륜이라도 내비치듯 되바라지지 않은 은은한 표면의 색감은 또 어떤가. 그뿐 아니다. 안을 꽉 채우고 있을 붉은 속살은 상상만 해도 오달지다.
넉넉하고 의젓한 풍신을 나로서는 도저히 닮을 재간이 없다. 약재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호박죽으로 환영받는 그 쓰임새 또한 따라갈 자신이 없다. 차라리 그의 또 다른 변신을 꿈꿔본다.
몸통을 빙 돌아 요철을 이루며 패인 골을 보면서 그것이 언젠가는 눈부신 마차로 변하는 상상을 해본다. 신데렐라를 태우고 궁궐로 향하는 호박마차만 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늙은 순호박으로 남아도 좋다. 거위도 꿈이 있다는데 순호박이라고 꿈이 없으라는 법이 없지 않겠나.
첫댓글 선생님 참 멋지세요.
멋이라고라? 저한테 어울리지 않는 낱말, '멋', 하나 붙여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추워졌어요. 자주 흔적 남겨주시는 노순희 선생님, 늘 다감한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그래서 여태도 청순미를 간직하고 있나 봅니다.
모습도, 글도, 맑고 고와요
어쩌다 보니 청순미가 있는 것처럼 되었네요.
할매가 청순미라.... ㅎㅎㅎ
다 그 누군가의 문자 때문입니다.
하긴 선생님,
지금 그때 사진을 보니 그만 해도 지금과 비교하면 젊음이 좀 남아있더라구요.
벌써 15년 전 일이라니.... 살아있음에 황감해야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