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수혈식 석실
주검을 묘광의 옆으로가 아니라 위로부터 묻는 방법이 수혈식이며, 두는 곳이 돌로 쌓은 방으로 되어 있어 이를 석실이라고 한다.
『대계』에 의하면 제 1기(4세기 전반기)의 전방 후원분에서는 처음에 수혈식 석실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그 전형적인 축조법은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먼저 분구의 꼭대기에 큰 구덩이를 판다. 구덩이의 크기는 깊이 8m, 폭이 5m를 넘으며 깊이는 2m, 구덩이 바닥은 고르게 한다. 다음에 바닥 중앙부에만 진흙을 깔고 통나무를 쪼갠 모양의 목관을 앉힌다. 관을 놓은 다음에는 남은 바닥에 조약돌을 깔고 그 위로 남작하게 쪼갠 돌을 차곡차곡 쌓아 4면의 석실 벽을 만든다. 관의 옆으로 쌓아 올리는 긴 벽은 상부가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으나 아래 위 좁은 벽은 수직으로 쌓는다. 목관의 크기가 직경 60cm가 넘는 나무를 길이 6m 전후나 되게 자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넣는 석실의 안도 폭 1m, 길이 7m, 전후 높이 1m 전후인 것이 표준이다. 4면 벽은 겹으로 돌을 쌓아 견고하게 하였다. 천정돌은 보통 10m 전후의 모양이 고르지 못한 큰 돌을 갖다 얹는 것이므로 틈이 생기게 되고, 그 틈은 잔돌이나 진흙으로 메운다. 그리고 이 천정 동의 전체 표면을 다시 진흙으로 덮는 것이 정식 방법이다. 그 다음에 전체 구덩이를 메우고 봉분을 쌓는다.
제 2기(4세기 후반∼5세기 초)의 수혈식 석실에서 일어난 변화는 목관 대신에 석관을 쓰기 시작한 대서 온 것이다. 그래서 석관의 규모에 따라 석실의 형태를 달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한결같지 않다.
제 3기(5세기 중엽 후반기)의 수혈식 석실 중에서 좀 이상스럽게 된 예를 들면 오까야마 현 가나구라(金藏) 산 고분인데, 여기서는 부장품을 넣는 작은 칸[소실(小室)]을 주실(主室) 바깥으로 따로 만들었다. 오―사까 부의 송악산 고분의 수혈식 석실에는 부장품을 넣는 소실을 석관 전후에 석관 일부를 이용해서 만들었다.
『대계』의 저자는 제 2기에는 석관·수혈식 석실 외에 제 1기 이래 쪼갠 통나무 관을 석실에 넣지 않고 그대로 땅 속에 묻어버린 예가 많다고 하며, 묻을 때에 전형적인 경우에는 관을 진훍으로 몽땅 바른 다음에 흙으로 묻었다고 한다. 관을 바른 이 진흙 부분은 진흙곽(粘土槨)이라고 부르고 있다. 진흙곽 외에 자갈곽(礫槨), 숯곽(木炭槨)의 예도 들었다. 황혈식 석실이 보급되기 이전,즉 4∼5세기 고분의 구조는 한 마디로 수혈식 석실에 목관 또는 석관을 묻었던 것으로 말하지마는 분묘 구조가 매우 복잡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외형에서도 전방 후원분 하나만이 아니며, 그것조차 여러 가지 변형이 있다는 사실과 결부해서 생각할 때 서부 일본 내의 사정이 매우 복잡하였다는 것을 거듭 느끼게 된다.
수혈식 석실은 우리 한국에서는 지석묘 이래 전통으로 볼 수 있고, 3국 시기에도 횡혈식 묘실이 출현하기 전에 수혈식 묘실은 보편적인 것이었고, 그 중의 많은 것이 석실로 되어 있었으며, 황혈식 고분이 고구려·백제에서 출현한 후에도 수혈식은 여전히 보존되었다. 앞서 인용한 공주에 있는 백제 고분의 조사자도 이 곳 고분의 유형을 여섯 개로 나눈 가운데서 그 제 2, 제 4, 제 6의 유형은 대체로 빈약한 것들이기는 하나 연도가 없다고 하였다.연도가 없으면 주검 위로 묻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 공주 것의 실은 물론 석실이다.
이상에서 소개한 일본의 수혈식 석실과 우리 고분과의 관계는 백제 것 뿐만 아니라 가락 고분들과의 사이에도 공통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방 고분들은 일제 강점 초기부터 심한 파괴를 입어 거의 원형을 알아 보기 힘든 것이 대부분이며 조사도 변변히 된 것이 없었다. 다만 1917년에 진행된 경북 고령(高靈: 대가야의 소재지)군 내 가락(가야) 고분에 대한 조사 보고서의 한 구절에서 우리의 생각이 그리 어긋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령군에 있었던 대가야(가락)국은 낙동강 중류에 자리잡고 앉아 가락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유력한 존재였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23년(562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사부(異斯夫)가 거느린 신라군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정복된 나라였다. 이곳 가락 고분들은 군내에 네 곳에 몰려 있다고 하며, 1927년의 일제『보고서』에서는 그 제 3군이 있는 운수면(雲水面) 월산동(月山洞) 무덤 떼 중에서 <묘광(墓壙)>의 예로서 ‘현저하다’는 두 가지 예를 들었다.
《그 첫째는 운라(云羅) 산성 동쪽 내성의 봉우리로부터 월성동 동방으로 내려가는 언덕마루 중간 쯤에 있다. 광(壙)은 석축(石築: 석실이라는 말이다―필자)으로서 막돌의 쪼갠 면을 고르게 해서 쌓았다. 석재(石材)는 비교적 얇고 평평하다. 방향은 남북에 걸쳐 있고, 남북 양측이 모두 내부로부터 쌓아 올린 것이며, 즉 수혈식이다. 광의 길이가 11척(尺: 4m미만) 남짓하며 높이는 4척 3촌(寸)이며, 폭은 상부가 2척 9촌이며 하부가 4척 5촌이다. 뚜껑 돌은 다섯 개다.》
그 둘째 예에 관한 서술도 비슷하다. 관에 대하여 언급이 없는 것은 목관이었기 때문이다. 썩어버렸고 파괴가 심하여 그 흔적도 알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가락 고분은 앞서 쓴 일본의 ‘표준’예에 비하면 길이에서는 절반이 좀 넘는 것이나 그 장방형의 모양과 구조가 모듬 면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쌓은 돌의 모양도 같고 석실의 양쪽 벽이 아래 바닥에서는 넓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드는 것도 같은 것이다.
이 가락 고분의 연대는 알 수 없다. 이 『보고서』에 서술된 이 지방의 다른 고분들과 다른 지방의 고분들과도 거의 비슷한 것들이다. 간혹 횡혈식 이라고 한 것이 있을 뿐이다. 가락국들도 후기에 이르러서는 백제로 부터의 영향을 받아 횡혈식 분묘도 만들었던 것이라고 추측할 구밖에 없다. 함안(咸安)에 있는 가락 고분들도 “나지막한 언덕 위에 군집해 있고 낮은 곳에는 없다”고 한 이‘보고자’는 둥근 봉분 앞에 제단과 같은 것이 있었겠는지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전연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오늘 알 길이 없으나 그런 것이 있을 수 있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다) 횡혈식 석실과 일본 고분 구조의 한국적 성격
일본의 고분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크게 나누는 경우에 후기의 특색으로서 첫째로 들어야 할 것은 전기의 수혈식 석실에 대신하여 등장한 횡혈식 석실이라고 『대계』의 저자의 말을 추려 보기로 한다.
수혈식, 횡혈식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수혈식 석실에서는 마지막으로 돌로 덮은 천정 부분 외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가지지 못하는 데 대하여 횡혈식 석실은 묘실(그 석실)의 한 쪽 벽면에 만든 통로에 의하여 본분의 옆으로 출입구를 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혈식 석실이 관을 안치한 다음에 축조되는 것이며, 원칙적으로 다만 한 번만 매장(수혈식)하는데 쓰이는 것인 데 대하여 횡혈식 석실은 매장 전에 축조를 완료해 둘 수 있고 그 출입구로 여러 번 매장을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횡혈식 석실은 일반적으로 주검을 안치하는 주실[현실(玄室)]과 그 앞에 만든 통로에 해당하는 부분[연도(●道)]으로 되어 있다. 현실이 전후 두 실로 나뉘어 있거나 연도가 전후 두 구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그 현실은 수혈식 석실에 비하여 훨씬 넓고 높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데 대하여 연도는 관과 기태 것들을 날라 들일 만한 폭과 너비를 가졌고, 보통은 현실보다는 폭도 좁고 높이도 낮게 만든다. 연도의 입구는 돌덩이를 쌓거나 판석(板石)을 세워서 다시 막았다. 제 4기(『대계』저자에 의하면 6세기 전반기로 될 것이다)에 이르러 횡혈식 석실은 전국적으로 채용되었는데, 그것은 대소 부동한 자연석 또는 쪼갠 돌을 큰 돌을 뒤섞어 간신히 고임식으로 되게 현실 연도의 벽을 쌓고 그 위를 몇 개의 큰 돌로 덮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제 3기의 초두(5세기 중엽쯤 될 것이다) 경에 횡혈식 석실은 먼저 북 큐슈에 출현하여 서서히 큐슈 지방에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최초에 북 큐슈에 출현했다는 것으로써 알 수 있는 것처럼 횡혈식 석실은 ‘대륙계’의 묘실 제도였다.
석재를 쌓아서 수혈식 석실보다 넓고 높은 묘실을 구축하는 횡혈식 석실의 특색은 이에 적합한 구축법의 연구를 필요로 했다. 북 큐슈의 횡혈식 석실, 예컨대 후꾸오까 현 마루구마(丸 ) 고분(5세기 것으로 말한다) 같은 것은 수혈식 석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납작한 쪼갠 돌을 수다히 쌓아 올려서 벽체를 만들었다. 이 축조법에서는 벽체의 상부를 안으로 굽어들게 할 수는 있으나 석제의 부피와 크기가 일정하지 못하므로 벽돌 무덤처럼 천정을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 수가 없어서 꼭대기에는 큰 돌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뚜껑돌의 크기에 맞추어서 석실의 크기도 조절되어야 했다. 즉 모처럼 큰 석실을 만들려 해도 이 뚜껑돌(천정돌) 때문에 촉소해야만 하기도 하였다. 오까야마 현 지다루(千足) 고분의 횡혈식 석실도 큐슈 것과 동일한 축조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5세기에는 이러한 구축법 밖에 몰랐던 것이다. 지다루 고분은 휘귀한 예에 속하며, 이러한 구축법의 제한이 횡혈식 석실의 보급을 방해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제 4기에 들어와 급속히 각지에 나타난 횡혈식이 제 3기의 것과는 다른 축조법에 의하게 됨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며, 새로운 축조법의 채용이 횡혈식 석실을 보급할 수 있게 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축조법이란 한 마디로 말하여 납작한 쪼갠 돌 대신에 큰 석재를 쓰게 된 것이고, 큰 석제를 자유롭게 다루는 토목 기술의 습득에 의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횡혈식 석실의 최하단에는 석재를 세워서 그 최대의 면을 벽면으로 쓰게 되었다. 후꾸오까 현의 고분 수명왕총(壽命王塚)벽화가 그려진 큰 돌은 이렇게 되어 세워진 것이다.
이 수명왕총의 횡혈식 석실에서는 벽면 상반부에는 비교적 작은 석재를 썼으나 석재를 썼으나 석재를 다루기에 익숙해진 후로는 다른 고분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부분에 놀랄 만큼 큰 돌을 쓰고 있다. 한 발자국 더 기술적으로 발전된 것은 다듬은 돌을 가지고 쌓은 것이다. 이런 다듬은 돌을 쓴 횔혈식 석실이 축조되게 된 것은 단순히 석관 조각의 기술적 경험 외에 한국 묘제의 영향에 의한 것이겠다고 단언할수 있고, 다시 연질(軟質) 석제로부터 경질 석제에로의 전환을 볼 수 있는 것은 불교 건축의 발달로 인하여 높은 석공 기술의 전래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도 단언할 수 있다.
이상 서술에 계속하여 『대계』의 저자는 대략 6세기 초두부터 시작되는 고분 시대 제 4기는 황혈식 석실의 보급기로서 특징 지을 수 있으나 일본 전국 각자 고분의 매장 시설이 모조리 이 시기에 횡혈식 석실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니고, 돌 상자 널이나 목관을 직접 땅 속에 묻는 매장 방법도 여진히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가장 중심적인 분형은 전방 후원분이나, 여기에 횡혈식 석실이 배합되므로 인하여 큰 변화가 생긴 것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큰 돌을 다루게 됨과 관련하여 튼튼한 지반 위에 설 것이 요구되고, 대부분의 무덤이 인공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연도가 전방부로는 달리지 못하고 옆으로나 뒤로 달리게 되며, 연도가 달리는 쪽을 무덤의 정면으로 친다면 이런 경우에는 전방부가 무덤의 정면으로 되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큰 변화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소개한 『대계』의 서술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횡혈식 석실 변천의 연혁이 처음에는 수혈식 석실처럼 납작한 쪼갠 돌을 포개어 쌓아 올리던 유치한 첫 단계와 잘 다듬은 큰 돌을 쓰게 된 발전된 둘째 단계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첫 단계는 아직 5세기에 속하며, 둘째 단계는 6세기에 속한다. 그리고 5세기 첫째 단계에서는 횡혈식 고분이 혼슈 섬 효고 현에서는 볼 수 있으나 이는 희귀한 예에 속하며 대체로 북 큐슈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음 6세기 둘째 단계부터 북 큐슈로부터 기내 야마도 지방에로도 퍼져 들어갔고 계속해서 전국적으로도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계』는 첫 단계의 횡혈식 석실은 대륙 계통이며, 둘째는 단계의 것의 한국 묘제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대륙 계통이라는 말에는 그것이 한국의 묘재는 아니라는 뜻을 포함시킨 것이다. 이는 『대계』의 저자가 둘째 단계의 석실에 대하여서는 따로이 한국의 묘제이라고 지적한 것을 가지고도 알 수 있다.
우선 ‘대륙 계통’이요, 그 ‘영향’이요 하는 말부터 해명할 필요가 있다. 야요이 문화를 서술할 때에도 이런 말을 일본 학자들은 많이 썼으며, 그것은 바로 한국 문화 그것에 대하여도 사용하던 말들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횡혈식 석실은 바로 고구려, 백제에서도 전형적으로 발전한 묘제다. 그리고 그것은 북 큐슈로부터 일본 열도에로 퍼져 나간 고구려, 백제의 묘제였다. 이제 ‘대륙 계통’이라고 『대계』의 저자가 말한 첫 단계의 횡혈식 석실과 백제의 고분과 대비해 보자.
앞서 인용한 바 있는 공부 부근 백제 고분의 ‘보고자’는 송산리 제 1호 고분에 대하여 파괴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현실은 남북으로 좀 긴 장방형으로 폭이 1.77m, 길이 2.58m이다. 네 벽은 자연의 결을 이용해서 만든 점판암(粘板岩)의 벽돌장 같은 돌로 포개었고, 높이는 1m가량 되는 데서부터 4방으로 내밀어 올라가는 궁륭(아치) 천정으로 만들고 정면으로 향하여 오른 편으로 붙여서 연도를 만들었다.》
라고 하였고,
제 2호 고분의 벽도 벽돌장 같은 점판암으로 쌓아 올렸다고 하였다. 북 큐슈의 5세기 횡혈식 석실을 쌓아 올린 방법과 이보다 좀 나중인 5세기 말 이후의 이 백제 고분의 그것이 많은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보는 다른 점은, 우리 백제 것은 천정이 궁륭식으로 발전되었으나 북 큐슈 것은 그냥 튼 돌로 막 덮은 데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소개한 백제 고분은 ‘보고자’가 소위 제 1유형에 소속시킨 것이다. 그가 분류한 제 3유형에 속하는 고분은 장방형 현실에 “그 정명의 왼쪽으로 치우쳐 연도를 가졌고, 4면 벽은 수직으로 벽돌장 같은 석제를 포개어 쌓아 올렸다가 다시 좌우 양 벽의 윗 부분은 안쪽으로 기울게 해서 반통형으로 만들고, 천정에는 몇 개의 큰 돌을 써서 덮는 것이다”고 하였다. 천정을 그냥 큰 돌로 막 덮어버리는 구조가 이 시기 백제 고분에서도 한 개 갈래로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위 제 3유형의 천정은 발전된 제 1유형에 선행하는 것이 틀림 없다. 일본 고분의 천정은 이 제 3유형의 천정을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잘못이 없을 것이다.
북 큐슈의 첫 단계 횡혈식 석실과 가락국들의 고분과는 공통성이 없겠는가? 상세한 것은 잘 알 수 없으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극히 불충분한 자료로써도 이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낙동강 유역의 가락 계통 <소국>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창녕(昌寧)군 내 무덤 떼에서는 북 큐슈의 첫 단계 고부노가 흡사한 실례를 본다. 오늘 우리 땅에 남아 있는 것은 파괴가 심하여 온전한 것이 없으며, 그 연대도 그 대표적인 유형도 알아내기 힘들게 되어 있다는 것과, 그러나 이 고분들은 6세기 초 이전의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같은 군 읍내면 송현동에 있는 소위 제 2호분에 대한 다음의 일제 ‘보고자’의 말을 읽어야 할 것이다.
《제 1호분의 서쪽에 있고 이와 봉토를 언접하나 그 터가 낮으므로 해서 제 1호분 위에 서서 바라보면 이 무덤 (제 2호분―필자)은 거의 봉토의 모양을 잃고 있으며, 좌우에 있는 논들의 평면보다 좀 높은 풀밭으로 나타나는 데 불과하다. 지면 상태가 심히 변화된 탓일 것이다.
그러나 묘광의 일단을 그 서남쪽 비탈에 노출시키고 있다. 광은 노출된 서남 모쿵이가 파괴되었으므로 광 내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다.
광은 장방형으로 돌로써 네 벽을 쌓아 올려 뚜껑돌을 덧놓은 것은 다른 고분과 다르지 않다. 길이 22척 3촌(약 7m―필자), 높이 5척 이상이며 폭은 상부가 2척 9촌, 하부는 4척 7촌이며 높이 5척을 쌓아 올린 돌은 여덟 개 내지 열 개를 포개놓은 막돌(野石)들이다. 뚜껑돌은 일곱 개이며, 널 같은 돌을 쓰는 것은 다른 예들과 같다. 광의 방향은 북쪽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약 15도다. 돠우 양측과 남쪽 측벽의 나머지 부분을 비교한 즉 돌쌓는 방법이 전연 동일하다. 북쪽 측벽은 이와 달라 얼핏 보면 광 내에서 뒷벽(북쪽 측면)앞으로 여러 개의 석재를 말끔하게 쌓아 올린 것 같아서 처음에는 이것은 광의 안 속에 안치한 관곽을 다시 여러 개 돌을 쌓아서 이를 막고 보호한 특수한 구조인가 하고도 생각하였으나 상세하게 검사를 해 본즉 이렇게 쌓은 돌의 상부는 광 내 뚜껑돌 측면에 붙어서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광을 완공한 후에 광내 작업으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광 벽의 이 부분(뒷벽―필자)만 남겨두고 다른 3면 벽을 쌓고 뚜껑돌로 덮었다가 장사가 끝난 다음에 바깥에서 쌓아 막은 것이 명백하다. 즉 광구를 바깥에서 쌓아서 막은 것이며 이례(異例)에 속하는 횡혈식 구조라고 친다.
이 고분은 오늘의 지형으로 보면 뜻밖에도 북쪽을 정면으로 하는 것이다.》
창녕군은 낙동강 동쪽 기슭의 작은 군으로 『삼국사기』지리지에 본(本) 이름을 <비자화(比自火)> 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 하였고, 진흥왕 16년(555년)에는 여기에 하주(下州)를 설치했다고 하였다. <비자화> 또는 <비사벌>은 다 같이 <빗벌>이라고 했을 원 한국말 발음을 한자로 저렇게 표기했을 따름이다. 창녕군 고적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이 일본 학자는 이 <비자>내지 <비사>가 『삼국사기』신라 본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9년(108년에 해당)에 신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정복했다고 하는 세 개 <소국>중의 하나인 <비지국(比只國)>일 것이라고 하고, 일본 사람의 버릇대로 그도 또한 이를 <미마나>문제와 결부시켜 이 곳이 <신공 황후>때에 일본군에 의하여 평정된 <7국>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원 108년에 신라에 의하여 정복되었다면 이 곳에 이런 고분들이 남아 있을 수 없고, <신공 황후>연대인 3세기 중엽은 물론이요. 1세기 가량 늦추어 4세기 후반기에 이 곳이 왜군에 의하여 평정되었다면 또한 이런 고분들이 남을 수 없다. 『보고서』에 의하더라도 이 군대에는 여섯 개소에 무덤 떼가 있고, 그 제 5군의 22호 분 같은 것은 구릉 꼭대기에 봉토 높이가 32척(약 9m)이나 된다고 하였다. 낙동강 유역의 다른 가락들과 마찬가지로 당당한 독립 세력이 수 세기간 이 고장에 있었으며 그것의 신라에 의한 정복은 6세기 진흥왕 대를 그리 멀리는 소급하지 않은 시기였을 것이다.
워낙 가락 고분들에는 횡혈식 석실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가락 나라들에는 앞서 쓴 ‘보고자’가 ‘이례’라고 한 횡혈식 유형도 있으며, 4∼5세기 경부터는 여기서도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묘실 구조로서의 횔혈식이 채용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가락 나라들은 6세기 초에는 신라에 의하여 정복되었기 때문에 백제식으로 횡혈식이 채용되었다고 하더라도 보급을 보지 못했을 수 있다.
북 큐슈의 첫 단계 횡혈식 석실 구조가 백제나 가락의 석실 구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으로서 짐작되리라고 생각한다. 백제·가락의 테주리라고 함은 백제 것에 가락식이 가미된, 또는 가락식에 백제식이 가미된 그러한 것이 북 큐슈 첫 단계의 횡혈식 석실이겠다는 것이다. 4∼5세기 이전부터도 고국에서는 백제가 단연 가락을 압도할 만큼 대국으었으므로 북 큐슈에는 백제적 성격이 보다 강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북 큐슈와 좀 떨어진 야마구찌 현의 어떤 횡혈식 고분에 <구다라(百濟)>왕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붙어 있다는 사실도 이상과 같은 사정을 전하는 것으로 본다. 일찍이 이 곳 아끼요시(秋吉) 촌 유적을 조사한 보고자의 말의 한 구절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잇다. 이 곳 고분은,
《소구릉 상에 있는 팔반사(八幡社) 앞 오른편 경사지의 대밭 속에 암석(큰 돌?―필자)을 노출시키고 있고, 그 용재는 모두 세도(내해 연안―필자)고분과 같은 질에 속하나 이것(고분―필자)은 거대한 뚜껑돌을 남기고 있고, 다시 상세한 것은 밝히기 어려우나 연도까지 있었던 것 같고, 특히 이미말한 고분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이 백제 왕의 무덤이라는 전설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 백제의 왕릉으로 전하는 무덤에 대하여 이 이상의 자료를 우리는 가지지 못했다. 이 이상 더 말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이 무덤에 붙은 전설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횡혈식 고분들도 적지 않은 경우에 백제 왕릉으로서 그 곳에서는 전해 내려왔을 수도 있었겠다는 것이다. 다른 자료가 없는 조건에서 위태로운 추단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으나 우리가 반드시 창작해야 할 사실은 저 8∼9세기 경 한동안 신라를 반대하는, 즉 한국을 반대한 큰 소동이다. 백제 왕릉으로 오늘까지 전하는 한 가지 사실이 일반(一斑)이 전표(全豹)를 알 수 있게 한다는 격으로 그러한 수십 수백의 전하지 않게 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대계』의 저자는 횡혈식 석실을 해설한 가운데서 이 석실 구조가 일본 전국에 보급되게 된 것은 토목 기술의 습득에 의하여 가능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 묘제의 영향도 지적하였다.
횡혈식 석실 연혁에서는 둘째 단계라고 볼 수 있는 6세기 초 이후의 것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일본 학자들이 한국 묘제의 영향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백제나 고구려의 묘제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의 횡혈식 석실을 떼놓고 일본 전국의 그러한 것들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이 ‘대륙 계통’이라고 한 첫 댄계의 것과 함께 한국적인 것임은 여러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둘째 단계의 석실구조에서도 저 땅의 특징은 있다. 대부분의 석실 천정이 첫 단계의 것처럼 큰 돌로써 그냥 눌러 덮은 것이다. 천정 구조에서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교를 부린 것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 벽화분도 극히 제한된 수의 초라한 것들 뿐이다.
이상에서 일본 고분들 중 가장 일본적이며 중심적이라고 치는 것들의 구조를 통하여서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학적인 요소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주류를 이루는 것이 한국으로부터 건너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저 땅에 퍼진 후 과연 일본식으로 얼마나 발전을 하였던가? 전방 후원분의 외형면에서는 큰 발전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내부 구조 면에서는 고국에서의 구투를 벗어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고분 시대의 전기까지는 한국으로부터의 영향이 계속 강하다가 후기라고 하는 6세기 이후부터는 그러한 영향에 그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짐작컨대 5세기 기내 야마도 지방 고분 문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 각지의 <소천하>들이 <소천하>대로 뭉치기 시작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대 세력들의 출현과 그리고 그러한 정세의 계속 발전과 관련될 것이다. 즉 신라적인 것, 백제적인 것, 가락적인 것들이 종전처럼 쉽게는 서부 일본의 각지에 직통할 수 없게 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5세기 말 북 큐슈의 횡혈식 석실 구조가 기내 야마도로 침투되는 데서도 엿볼 수 있으며 앞으로 문헌 자료를 가지고도 논급될 북 큐슈 세력의 기내 야마도에로의 진출, 5세기 말 이후에는 한국적인 것의 침투는 일정한 제한을 받으면서 종전과는 달리 기내 야마도 왕정의 어떠한 제한 하에 놓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북 큐슈 일각에서 더는 나가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북 큐슈에 전파된 백제식 벽돌 무덤[전곽분( 槨墳)]과 그 밖의 것들이 후자의 실례에 속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을 우리는 다음의 일본 학자의 말에서도 짐작하는 것이다.
《특히 벽돌 무덤[전실분(塼室墳)]과 같은 것의 모방도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비교적 빨리, 아마 중기(5세기로 본다―필자)에 채용되었던 것으로도 생각되며, 후꾸오까 현 이도시마 군 주선사(周船寺)촌의 마루구마 산 고분이나 사가 현 동 마쯔우라 군 하마사끼 정 요꼬다하(橫田下) 고분 등도 그 예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석인(石人), 석마(石馬) 같은 것에 대하여서도 단순히 석제에 의한 지역성(地域性)만 생각하고 대륙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며, 결국 저 땅(대륙―필자)에 있어서의 석인 석수와의 관련을 찾아야 할 것이다.
횡혈식 석실이 널리 보급되게 된 후부터는 내부 색채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도 북 큐슈를 중심으로 하여 현저히 발달했으나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묘제에서도 보는 것이요, 일관한 관계를 찾을 수 있다.》
이 논자의 기본 취지는 북 큐슈 일각에만 있는 벽돌 무덤과 벽화 무덤, 그리고 석인 석수를 무덤 앞에 세우는 까닭을 그 곳에서 석제나 벽돌 원료가 많이 생산된다는 ‘지역성’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런 방법이 한국으로부터 전파된 데서 찾아야 한다고 말라고 있다.
이 실로 당연한 입론은 그런 것들조차 한국으로부터 간 것임을 부정하거나 그렇게 말하기를 주저하는 논의가 일본 학계에 아직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첫째로 이미 역사적으로 형성된 길을 따라 한국으로부터 그러한 ‘우수한’것들이 계속 고분 시대 중기 이후에도 일본 열도로 흘러 갔다는 측면에서와, 다음으로는 그런 것들이 후기에 이르러서는 북 큐슈로부터 더는 동쪽으로 퍼져 나가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새로운 사태로써 고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 사태란 큐슈 이동에서는 벌써 한국으로부터의 새로운 것의 자유로운 진출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세력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북 큐슈가 6세기에 이르도록 저러한 야마도 중심의 세력에 대하여 자기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호족들의 무덤에서 기내 지방에서와는 달리 벽돌을 구워 쓰고 석인 석수를 배열하며 또는 석실 벽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는 사실은, 이런 고분들의 주인공들은 야마도 지방에 대하여 독자적이면서도 아직도 백제에 대하여서는 비독자적이며 그 문화는 야마도에 비하여 보다 한국적이었음을 말한다. 유물들의 자료가 앞으로도 다시 이를 증명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 개 문화적인 현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북 큐슈라는 곳이 역사적으로 백제(가락제국 포함)와 맺고 있었던 정치적 관계를 또한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